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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시장(市長)이 반찬인가

금동수의 세상 읽기(210213)

by 금삿갓

소설가 김훈은 서울을 만인(萬人)의 타향이라고 했다. 2021년 1월 현재 약 966만 명 정도 서울에 주민등록을 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우리나라 총인구의 18.2%를 차지하고, 연간 40조 원이 넘는 예산을 집행하는 메트로폴리스(Metropolis)의 수장(首長)이 성희롱(性戲弄) 관련으로 사망한 후 7개월째 공석이다. 4월에 보궐(補闕) 선거로 뽑겠지만 임명직 시장 시절에는 이러한 공백은 상상할 수 없다. 재직 시 늘 건배사로 <시장이 반찬이다>라고 외치던 사람의 파렴치(破廉恥)한 행동으로 애꿎은 시민들만 날벼락을 맞았다. 서울시 본청과 25개 구청의 모든 공무원들이 열심히 근무 잘해서 시정(市政)이 혼란 없이 잘 돌아가는 것일까? 선출직 빅 투(Big Two)의 정치적 무게감이나 영향력에 비해 공석의 후폭풍은 찻잔 속의 태풍이다.

서울시청의 누리집을 보면 서울이 수도(首都)로서의 역사가 2,000년이 넘는다. 기원전 18년 온조왕(溫祚王)이 하남 위례성으로 백제의 도읍을 정했다.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침공으로 개로왕(蓋鹵王)이 죽고 공주로 천도하기까지 493년간 수도였다. 그 후 서울은 고구려가 76년, 백제가 3년을 지배하다가 지배권이 신라로 완전히 넘어갔다. 고려의 문종(文宗) 때인 1067년에 서울을 남경(南京)으로 격상했다가 숙종(肅宗) 때인 1101년에 궁궐도 지었다. 평양의 서경(西京), 경주의 동경(東京)과 같이 삼경(三京)의 하나였다. 충선왕(忠宣王) 1310년에 삼경을 폐하고 한양부로 고쳤다가 1382년 우왕(禹王) 때와 1390년 공양왕(恭讓王) 때 한양으로 천도하여 몇 개월 가량 있다가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다. 조선이 건국하고 2년 후인 1394년에 한양을 수도로 확정해서 현재에 이른다.

서울이란 명칭은 여러 학설이 있지만 대체로 신라의 서라벌(徐羅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부록 상권 고이편(考異篇)의 사나벌장(徐那伐章)에 “서라벌(徐羅伐)·서나벌(徐那伐)·서벌(徐伐)·사라(斯羅)·사로(斯盧)·서울(徐蔚)” 등으로 불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변화되어 수도인 서울(京)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역 행정명칭은 역사 기록상으로 백제 때 위례성·한성으로, 신라 때는 신주(新州)·한산주(漢山州)·한주(漢州)로 불렀다. 고려에서는 양주(楊州)·남경(南京)·한양부(漢陽府)로 불렀고, 조선에서는 공식적으로 한성부(漢城府), 일반적으로 한양(漢陽)·경도(京都)·경성(京城)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의 예하(隸下) 경성부로 격하해서 해방 후 1년까지 불리다가 해방 1주년을 맞아 서울로 변경되었다. 1946.8.10. 에 미군정이 제정하여 8월 14일에 서울시 군정담당관(Mayor) 윌슨(James E Wilson) 중령이 서울시민에 대한 선물이라면서 서울시헌장(Charter of the city of Seoul)을 발표했다. 헌장 제1조에 “경성부를 서울시라 칭하고 차를 특별자유시(Special Free City)로 함. 서울시의 관할구역은 중구....... 영등포구로 하되 금후 법률에 의하야 차를 변경함을 득함”이라 했다. 국문본과 영문본 두 가지로 제정되었다. 그 후 미군정 법령(Ordinance) 제106호로 <서울시 설치령>이 공포되었다. 제1조는 경기도로부터 분리, 제2조는 특별시(Independent City) 설치를 포함해 총 5개 조항이었다. 군정에서 만든 독립시(Independent City)란 용어가 한국인 직원에게 생소하여서 특별시로 번역한 국문본을 작성하여 특별시로 되었다. 국내법으로는 1949.7.4. 에 제정된 지방자치법 제2조에 따라 서울특별시로 하고 도(道)와 같이 정부의 직할이 되었다.

고유 명칭에 수도(京 : 도읍지)를 일컫는 보통명사인 순수 우리말 ‘서울’을 쓰게 된 건 어떨 결에 한성부윤이 된 김형민(金炯敏) 시장이 한글을 고수(固守)한 덕이다. 그는 전북 익산 출신으로 전주신흥학교를 나와서 교편을 잡다가 미국 오하이오(Ohio)의 웨슬리안(Wesleyan) 대학을 거쳐 미시간(Michigan)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하고 귀국했다. 개성의 송도고보에서 영어교사를 할 때 우남(雩南)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한 것이 일경(日警)에 걸려서 옥살이를 했다. 광복 후에 그는 <3·1사>라는 석유판매상을 경영하였다. 미군정하의 경성부윤 김창영(金昌永)·이범승(李範昇)의 뒤를 이어 1946년 5월 10일에 취임했다. 행정 경험도 전혀 없고 당시 38세의 젊은 나이에 시장으로 임명된 것은 순전히 미국 유학 인연이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미군정 사령관 하지(John R. Hodge) 중장의 외숙(外叔)과 유학 시 인연으로 추천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서울’이란 순한글 이름에 대한 반대와 이승만 박사의 호(號)인 우남시(雩南市)로 하자는 의견 등이 비등(沸騰)했다. 그가 영어를 잘하고 하지의 추천으로 임명되었기에 미군정의 힘을 입어 서울의 명칭을 지킨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민족사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일본식 명칭인 정(町)·통(通)·정목(丁目)을 동(洞)·로(路)·가(街) 등으로 변경한 것도 업적이다.

현대의 서울시 행정 최고책임자는 4년 임기의 선출직 서울특별시장이다. 다른 광역시장이 차관급인데 유일하게 장관급이다. 국무회의에 의결권은 없지만 배석(陪席)하여 발언할 수는 있다. 조선시대의 한성판윤도 정 2품 자헌대부(資憲大夫)이지만 사법·행정권을 모두 갖춘 3법사(三法司)의 하나이고 종 2품인 좌윤(左尹)과 우윤(右尹)을 두어 종 2품이 참판뿐인 판서보다 더 위상이 높았다. 조선의 개국부터 지금까지 최고 수장의 명칭은 판한양부사·판한성부사·한성부윤·한성판윤·관찰사·경성부윤·서울시장·서울특별시장 등 총 13번의 변경이 있었다. 한성판윤에 대한 연구는 많지만 역대 판윤의 명단을 정리한 것은 드물다. 1997년 서울특별시립박물관에서 발간한 <한성판윤전>에 한성판윤의 명단이 정리되어 있고 조선시대만 1,390명, 박원순까지 1446명으로 파악된다. 그 외에 1977~1979년에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서울 육 백년사>, 1990년 강원대 원영환 교수가 쓴 <조선시대 한성부 연구>, 1993년 서울특별시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서울 육 백년사 : 인물편>,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에서 1997년에 간행한 <서울행정사> 부록에 한성판윤선생안 등의 자료가 있다.

향토사학자인 성균관 전학(典學) 박희(朴熹) 박사가 서울 정도(定都) 610주년인 2005년 6월 12일에 <역대 서울시장 연구>를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2005년 당시 이명박 시장이 공교롭게도 2,005대 서울시의 수장이고, 모두 1,427명이 교체되었다고 했다. 반면에 전 연세대 중문학 교수 이석호의 <한성판윤 열전(漢城判尹列傳) : 2010년 려경출판사>에 따르면 조선시대 한성의 수장은 태조 4년(1395) 6월 13일에 임명된 초대 성석린(成石璘)부터 마지막 한성부윤 장헌식(1907.7월 ~ 1910.8월)까지 515년간 1,930대에 1,133명이 거쳐 갔다고 한다. 가장 최근의 연구는 서울역사편찬원(원장 김우철)이 2017년 11월에 출판한 <조선시대 한성판윤 연구>와 <일제강점기 경성부윤과 경성부회 연구>이다. 이 연구서의 부록으로 펴낸 <한성판윤 선생안>이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전수 조사하여 역대 수장을 정리했는데, 박원순 시장까지 2,070대에 해당한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의 경성부윤은 총 18명이다. 역대 서울의 수장 명단에 대한 왕조실록 등 역사 기록이 일목요연하지 않아서 역임한 사람의 수나 대수(代數)가 연구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난다.

조선시대 한성판윤은 막중한 자리였지만 임금의 입장에서는 거의 파리도 아닌 하루살이 목숨인 경우도 많았다. 필자가 어림 대중으로 조사한 바에 의해도 임명 당일에 바로 교체한 사례가 선조(宣祖) 때 송순(宋純), 고종 때 임응준(任應準), 민종묵(閔種默), 민경호(閔京鎬) 등이다. 고종 때 이승오(李承五), 한성근(韓聖根), 변원규(卞元圭) 등은 하루 만에 교체되었는데, 특히 변원규는 고종 때 한성판윤을 두 번이나 하루 만에 교체되고, 3일, 8일, 16일 만에 교체되는 등 5차례 임명되었지만 총 근무일수가 29일 밖에 안 된다. 고종 때의 정치나 인사 행정이 얼마나 문란(紊亂)했는지 기가 찰 노릇이다. 고종은 재위 44년간 한성부윤을 385명을 교체했다. 최악의 경우는 고종 27년 1890년에는 한 해에 29명을 갈아 치웠다. 더구나 1890년 2월 28일에는 하루에 5명의 한성판윤을 교체시켰다. 이명응(李明應), 장석용(張錫龍), 이승오(李承五), 김구현(金九鉉), 조경하(趙敬夏) 순으로 교체했는데, 아마 승정원에서 임명 교지(敎旨) 쓰느라 엄청 바빴을 것이다. 최장수 판윤은 세조 때 이석형(李石亨)으로 2번에 걸쳐 총 6년 2개월가량 재직했다. 숙종(肅宗) 때 이언강(李彦綱)은 한 번도 어려운 판윤을 10여 차례나 역임했고, 이가우(李嘉愚)는 헌종·철종에 걸쳐 9회, 이완(李浣)은 현종 때 8회를 역임했다. 고종 때 제중원(濟衆院)에서 알렌(Horace Allen)에게 영어를 배운 통역관 출신 이채연(李采淵)도 한성관찰사 포함 6회를 역임하면서 1898년 한 해에 3번 임명되었다. 함경도 접경지역에서 천민(賤民)으로 살면서 귀동냥으로 러시아어를 익힌 김홍륙(金鴻陸)도 고종(高宗)의 총애를 받아서 1898년에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다. 그는 공직에서 많은 비리를 저지르고 최후에는 고종을 커피로 독살하려다가 발각되어 사형되었다.

역사적 자료에 따라 분석하면 조선시대 서울 수장의 평균 재임기간이 5개월가량이다. 일제강점기는 평균 24개월 정도, 광복 후 관선(官選) 시장은 22개월, 민선(民選) 시장은 36개월로 나타난다. 서울의 수장 직위에 대한 무게감이나 정치적 위상에 비하여 매우 단명(短命)하다. 민선시장으로 전환된 후에는 정치적 위상이 빅 투(Big Two)로 인식되며 선거 때마다 최고의 관심사이다. 정치권에서는 서울시장의 선거 향배(向背)가 다음 대선(大選)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조순 시장부터 현재까지 시장에 당선된 사람과 곧바로 이어진 대선에 당선된 사람의 당(黨)을 아래 표와 같이 비교해 보았다. 지금까지의 선거 결과를 보면 서울시장의 소속정당이 바로 다음 대선에서의 승률은 50%로 나타난다. 조순 시장이 사퇴하지 않고 임기를 채웠다고 가정해도 60%의 승리이다. 서울시장의 선거 결과가 대선에 미치는 영향이 전폭적(全幅的)이거나 절대적이지 않은 것 같다.

그럼,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집권여당 대통령의 재임년차, 지지율과 서울시장 선거 결과를 정리해 보았다.

역대 대통령들이 집권 4년차가 넘어가거나, 국정 지지율이 40% 미만으로 떨어진 경우에는 모두 야당의 서울시장 후보가 당선되었다. 특이한 경우는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3년차에 지지율이 폭락해서,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2년차에 지지율이 50%였는데도 야당 시장후보가 당선되었다. 선거와 정치는 생물(生物)이라고 하듯이 이러한 요인이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는 정확히 밝히기 어렵다. 후보자의 역량과 바람, 시대 상황 등 다양한 요인이 작용하니까.

서울시장이 빅 투로서의 위상에 힘입어 정치적 성공 가도(街道)를 달리게 해 줄까? 그 사례는 이명박 시장이 유일하게 대선에서 승리한 것뿐이다. 조순, 고건, 오세훈은 대권의 꿈을 꾸었지만 좌절되었고, 박원순은 성희롱으로 비명횡사(非命橫死)하여 인생의 막을 내렸다. 선거 패배자에게도 몰락이나 긴 어둠의 역경(逆境)을 제공하는 것 같다. 정원식·박찬종·최병렬·강금실·한명숙·정몽준·김문수 등이 선거 패배 후에 곧바로 정치를 접거나 급속히 영향력이 떨어져서 잊혀졌다. 김민석은 오랜 기간 찬바람을 맞다가 겨우 재기했고, 나경원·안철수도 재수(再修)로 도전하는데 귀추(歸趨)가 주목된다.

공교롭게도 서울·부산의 보궐선거가 모두 전임자의 성희롱(性戲弄) 관련으로 치러지는 선거이다. 평소 그렇게 인권과 성평등을 외치고, 성인지감수성(Gender Sensitivity)에 대하여 주장하던 집권 여당이 이 문제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정중하게 시민과 국민들에게 사과하는 것을 못 본 것 같다. 스스로의 잘못으로 보궐선거의 원인을 제공하면 후보를 내지 않겠다는 약속도 헌 신발짝 버리듯 했다. 보도에 의하면 이번 보궐선거는 전국 19개 선거구에서 치러지며 총비용은 932억 원이다. 여당의 귀책사유(歸責事由)로 인한 것이 전체의 92%인 13개 지역구에 비용이 858.7억 원이고, 국민의힘당이 4개 지역구에 26.8억 원이다. 나머지는 대상자의 사망 등에 기인(起因) 한 것이다. 서울시민이 고스란히 부담해야 하는 것이 570.9억 원이다. 이 예산이면 서울시 아동급식을 1년 3개월을 더 할 수 있다. 이 비용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선거 직접비용만 이렇다. 선거 간접비를 감안하면 천문학적 예산이 소요된다. 여야를 막론하고 선거용 선심(善心) 정책으로 쏟아부을 예산은 계산할 수도 없다. 추가적인 긴급재난 지원금에 가덕도 신공항, 한일해저 터널 등 불요불급(不要不急)한 사업을 위해 국가채무를 마구 집행할 태세다. 나라가 망하지 않도록 유권자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심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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