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객들은 피레네의 오아시스인 푸드트럭에서 음료나 간식을 사서 새로운 힘을 충전하여 길을 재촉한다. 여기서 3km 정도를 더 올라가면 벤따르띠아 언덕(Collado de Bentartea) 언덕에 도달한다. 언덕이라 이름이 붙어서 그렇지만 우리나라처럼 깎아지른 절벽이나 우뚝 솟은 그런 언덕의 개념이 아니라 그냥 밋밋하지만 다른 지역보다 높은 곳이다. 근처에 허름한 피난처도 세워져있다.
중간중간에 돌무더기와 읽을 수 없는 프랑스어 간판이 붙은 조형물들이 있지만 스쳐 지나가는 조선의 과객(過客)으로서는 무슨 뜻인지 관심도 없고, 해독하려고 스마트폰을 켜는 것도 귀찮다. 좀 더 올라가면 그 유명한 롤랑의 샘이 나온다. 샘이라고 하면 웅덩이를 파던가 자연 발생적으로 웅덩이 모양을 이룬 곳일진대, 옛날에는 그랬는지 모르지만 조선 길손의 눈엔 그저 수도꼭지다.
롤랑의 샘은 중세 기사인 롤랑의 전설로 시작된다. 말하자면 프랑스 최고의 서사시로 프랑스 국민들이 그리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와 비견한다고 생각하는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에서 기인한다.롤랑의 노래에 깃들어 있는 프랑스인들의 무용담을 살펴보자.
778년 8월에 프랑스와 스페인을 지배하던 아랍 사이에 일어났던 롱스보 전투를 극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롱스보는 이 지역의 프랑스 발음이고 스페인어로는 론세스바예스다. 7년간 에스파냐를 점령 중인 프랑스 왕 샤를마뉴와 그의 대군은 에스파냐의 마지막 성만 남겨놓고 있었다. 그 성은 사라고사에 있고, 이교도인 마르실 왕이 지킨다. 마르실 왕은 사신을 보내며 화의를 청하지만 샤를마뉴의 조카인 롤랑은 화의를 반대하지만, 화의에 찬성하는 의부(義父) 가늘롱을 마르실 왕에게 보내는 특사로 추천한다. 전쟁 중 특사는 죽을 확률이 높은데, 자신을 특사로 추천한 것에 분노한 가늘롱은 마르실 왕에게 가서는 롤랑을 죽일 계획을 모의한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에스파냐의 절반을 영지로 주겠다는 샤를왕의 말을 마르실 왕에게 전하고, 또한 가늘롱은 롤랑을 죽일 방법을 제안하자 마르실 왕은 많은 선물로 그에게 화답한다. 마르실 왕은 조공과 더불어 20명의 볼모까지 보내면서 샤를의 환심을 사고, 가늘롱은 샤를에게 거짓 보고까지 올린다. 샤를마뉴와 프랑스군은 안심한 상태에서 조국인 프랑스로 떠난다. 샤를왕은 돌아가는 길에 흉악한 꿈을 꾼다. 샤를은 가늘롱이 후위 부대 장수로 롤랑을 천거하자 뭔가 께름칙한 느낌을 받지만 그렇게 하도록 허락한다. 퇴각 시에 12기사와 더불어 2만 명의 병사와 함께 후위를 맡게된 롤랑은 곧 마르실 왕의 40만 군대와 맞닥뜨릴 운명에 처하게 된다. 사라센 갑옷으로무장한 군사들이 롤랑의 군대에 접근하자, 어마어마한 적군의 숫자에 놀란 롤랑의 친구 올리비에는 그에게 어서 상아 나팔을 불어서 샤를 왕이 이끄는 본대의 도움을 받자고 했지만 롤랑은 단칼에 거절한다. 결국 대주교인 튀르팽의 축복기도를 받고, 죄 사함을 얻은 프랑스 기사들은 죽음의 전투를 시작한다.
용맹한 프랑스군은 롱스보 전투 초반을 장악하지만 수적 열세를 이기지는 못한다. 마르실 왕이 이끄는 대군의 본대가 나타나자 마침내 롤랑은 상아 나팔을 불어 위급함을 샤를 황제에게 알린다. 나팔 소리를 들은 샤를 왕은 롤랑 군대의 위험을 즉시 알아차리지만 가늘롱이 개의치 말라는 조언을 한다. 샤를마뉴는 가늘롱의 말을 무시하고 롤랑을 위해 발걸음을 돌린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롤랑과 프랑스군이지만 중과부적으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
롤랑의 친구인 올리비에가 먼저 전사하고 뒤이어 대주교 튀르팽도 죽으며, 롤랑 역시 하느님께 죄 사함을 구하며 그의 영혼을 하느님께 바친다. 롤랑은 죽는 순간 성 베드로의 치아가 포함된 자신의 칼 두란다르트를 파괴하기 위해서 커다란 바위에 내리쳤는데 바위만 갈라지고 칼은 멀쩡했다고 한다. 롱스보에 도착한 샤를마뉴는 참혹한 현장을 맞이하며 통탄을 금할 수가 없다. 롱스보에서 모든 프랑스군이 죽은 것이다! 샤를 대군이 온다는 소식에 이교도들은 도망치지만 샤를은 그들을 쫓으며, 해를 멈추어 달라는 기도를 올리고, 하늘의 해는 샤를의 기도대로 얼마간 멈추게 된다. 정말일까?
샤를마뉴 군대의 사라센군 도륙이 시작되자 마르실 왕은 사라고사로 내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르실 왕에게도 그들을 도울 이가 있었으니, 아라비아에서 대군을 끌고 오는 이교도 황제급 인물인 아미르 발리강이다. 롱스보 전사들의 영결식을 치르는 샤를은 특히 롤랑의 시신 앞에서 절규한다. 이제 샤를과 발리강의 대대적인 전투가 남았다. 사라센의 '프레시와즈'와 프랑스군의 '몽주아'의 함성이 온 대지에 울려 퍼진다.
그야말로 대접전이다. 격렬하고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샤를과 발리강이 맞선다. 피 튀기는 싸움 끝에 샤를이 발리강의 머리통을 쪼개버린다. 이교도들은 도주하고 프랑스군은 사라고사까지 점령한다. 처절한 패전 소식에 부상이 있던 마르실 왕은 세상을 떠난다. 전향하는 십만이 넘는 이교도들은 천주교의 세례를 받는다. 그제야 샤를마뉴는 왕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롤랑에게 복수를 했을 뿐 자신은 절대로 반역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가늘롱의 재판이 시작된다. 피나벨이라는 인물이 가늘롱은 변호하고, 티에리라는 인물이 반역을 주장한다. 결국 둘은 결투 재판을 벌이게 되어 둘 다 무장한 채 군마에 올라 서로를 향해 창과 칼을 겨눈다. 티에리가 승리하자 가늘롱의 반역은 성립된다. 가늘롱의 편에 서서 함께 보증을 섰던 30명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가늘롱은 거열형으로 사지가 찢겨 죽는다. 마르실 왕의 왕비인 브라미몽드는 개종하여 세례를 받고 쥘리엔이 된다.
이런 전설을 안고 있는 롤랑의 샘은 현대에 와서는 순례객들의 타는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는 순례길의 고마운 샘물이다. 해발 1,378m에 있으니 고마울 수 밖에. 산티아고까지 765km 남았다는 안내 표지석도 보인다. 스페인 국경석 표지석도 있다. 다 허무러 진 대피소도 있지만 요즘은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