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과객(過客) 금삿갓이 길을 나선 지 제법 시간이 흘렀다. 물집 잡히고 멍들고 했던 발과 발가락들도 이젠 체념을 했는지, 주인을 원망하며 운명으로 받아들이는지 전보다는 아우성이 덜하다. 이제 이곳 서반아(西班牙)의 풍물과 생활에 조금씩 적응을 해 가고 있다. 하긴 밤이면 밤마다 서양의 이쁜 여인이나 뚱보 아줌마들과 늘 한 방에서 같이 먹고, 씻고, 같이 싸고, 같이 자고 하니 조선 과객으로서 영 몸 둘 곳, 눈 둘 곳을 찾기 어려운 건 매 한 가지다.
<금삿갓 한 잔 마시다>
조선에 김삿갓이나 매월당 김시습 선배 같이 세상의 뜻을 버리고 떠도는 과객이 있다면, 서양에는 몇백 년 전부터 이곳 산티아고를 찾는 순례자들이 있었다 신부(神父)나 수도사뿐만 아니라 신자는 말할 것도 없고, 가톨릭이 국교이고, 교황의 끗발이 젤 세니까 왕들도 순례길을 찾곤 했다. 조선 과객 금삿갓이 국내의 올레길과 동해 해파랑길을 걸었으니, 당연히 이천리의 이 길도 걷는 게 팔자에 맞는 것이다.
이곳 서반아에는 막걸리가 없으니 당근 주막이 없고, 대신 포도주가 지천이다. 세계 제3위 와인 생산국답게 싸고 다양한 와인이 상점에 가면 즐비하다. 순례객이 묵는 알베르게의 저녁 메뉴에는 필수 품목으로 무료(식사에 포함) 와인 한 병이 제공된다. 이곳 숙소의 저녁 값이 조선 과객의 주머니 걱정을 덜어줄 정도로 저렴하다. 1인당 대개 12~15유로 정도이다. 거기에 2~3인당 포도주 한 병을 주니까 조선 과객 금삿갓은 기분이 더없이 좋다. 같은 테이블에 서양 여자들이 앉아서 걷기 힘든다고 와인을 안 마시면 혼자 한 병을 독차지할 때가 많다. 막걸리 한 잔이 아쉬웠을 때도 많았던 김삿갓 선배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서양 순례객들은 등산 스틱이나 길에서 파는 막대기 지팡이를 짚고 다니지만 조선 과객 금삿갓은 원래 등산 스틱 무용론자이다. 그래서 안주 삼아 지팡이 대신 바게트 빵을 대신 꽂고 다닌다. 좀 서양틱하지 않는가? 삿갓 대신 맥고모자(밀짚모자를 필자의 시골에서는 이렇게 불렀다)를 쓰고 해를 가린다. 헤진 삿갓을 쓰고 하늘을 가린 김삿갓 선배와는 다른 패션이다. 이러니 조선과객 금삿갓이 포도주의 주흥이 도도하여 한시(漢詩) 한 수를 지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