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을 나타내는 수단에는 얼굴의 표정이나 몸의 제스처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효율적인 것이 말하기와 쓰기일 것이다. 문명의 이기가 발명되기 이전 옛날에는 말은 일회성으로 입 밖에 나오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글은 기록성으로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여 전달되고 보존된다. 물론 요즘이야 과학의 도움으로 말의 기록과 전달도 가능하니까 별문제이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길 가에 각종 낙서나 기록을 무수히 볼 수 있다. 자기가 여기를 지나갔다는 기록, 이곳에 왔었다는 기록이 주를 이루고, 더러는 낙서에 가까운 것들도 많다.
길 옆에서 자라는 사시나무의 줄기에 자기의 이름이나 자기의 생각을 표현한 것들이 많이 보인다. 나무가 세월이 흘러 자라면서 그 흔적도 점차 쇠퇴해지겠지만, 아무런 죄가 없는 나무에 생채기를 내서 자기를 표현한 것이 마냥 안타깝다. 선사시대에도 인간들이 자기의 생각을 표현한 유적들이 많다. 문자가 제대로 고안되지 않은 시기라서 그림이나 도형으로 생각과 의사를 표현했다. 그러던 것이 문자가 발명되고부터는 그 문자는 엄청난 권력의 카르텔이 되었다. 그 시대의 글쓰기는 보편적이지 않았고, 오로지 상층계급의 사람들과 작가나 학자 등의 전유물이었을 것이다. 글자를 공유하는 것은 신분을 공유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기록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태어나는지도 모른다. 글자를 모르는 원시인이 동굴에 벽화를 그린다거나, 여러 가지 도형으로 생각을 표현한 유적을 볼 때, 기록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고 인간만이 가진 능력일 것이다.
그래서 산티아고 순례길 옆의 가로수나 조형물의 벽면에 마구 낙서하거나 생채기를 내서 써놓은 것들을 보면 현생 인류는 라틴어로 말해서 <호모 스크리벤스(Homo Scribens)> 즉 "기록하는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기록한다고 해서 남이 불러 주는 것을 받아쓰거나 남의 것을 베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을 쓰는 인간이다. 자기의 생각이나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 기록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이런 단편적인 쓰기나 기록은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나 공감을 이룰 수가 없다. 길가의 나무나 벽면이나 담벼락에 자기 이름을 기록하거나 자기 생각을 기록해서 얼마 큼의 의사를 소통할 수 있겠는가. 괜히 뒤에 와서 보는 사람의 눈살만 찌푸리게 만드는 것이다. 기록과 낙서는 수준이나 격(格)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록이 아니라 떨어진 글자인 낙서(落書)인 것이다. 격이 떨어지고, 수준이 땅에 떨어진 글인 것이다. 낙서라는 용어는 원래 문서에 있어야 할 글자가 빠진 것을 뜻했고, 필자가 아는 바로는 일본의 "라쿠쇼(落書)"가 오래된 기원이 아닐까 한다. 14세기 시절부터 이 용어를 썼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그라피티(Graffitti)라고 해서 스프레이 같은 것으로 공공기물에 마구 낙서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도 하나의 전위 예술로 취급되는 경향이 일정 부분 있어서 우리네 시각으로는 영 마땅하지가 않다. 기록도 좋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도 좀 신경 써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