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을 걷다 보면 길 옆으로 끝 모르게 넓은 평원을 거의 매일 본다. 그 넓은 평야에 농작물을 심은 곳도 있고, 그냥 잡초지로 관리하는 곳도 많다. 조선 과객 금삿갓이 이 길을 걸을 당시가 7월 중순에서 8월 중순까지인데, 눈에 보이는 농작물은 주로 포도, 밀, 옥수수, 해바라기, 올리브, 감자 등이었다. 그 외는 거의 황무지 비슷한 잡초지였다. 그런데 기온이 높고 건조한 이곳의 날씨에 어떻게 농작물이 자라고 결실을 맺을까 궁금했다. 강도 별로 보이지 않고 물이 공급될 만한 시설도 없는데, 어떤 농장은 스프링 쿨러를 가동하기도 했다. 며칠을 걷다 보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생명의 젖줄인 수로가 순례길 옆으로 나타났다. 얼마만큼 떨어진 어느 강에서 물이 공급되는지는 몰라도 시멘트로 된 수로에 농업용수가 넘실거리면 흐르는 것이다. 과거 30여 년 전에 로마에 갔을 때 로마시대의 수로와 지하 물저장고를 보고 천년 전에 이런 관개시설을 만든 서양 사람들의 기술이 경이로웠는데, 그러한 시설이 지금 스페인에서 현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강은 보이지 않는데 농업용수는 잘 공급되고 있었다. 어릴 때 어른들이 논물 보고 오라는 심부름을 시키면 삽자루 하나 들고 들녘으로 나가서 논과 논도랑을 살펴보고 물꼬 즉 수문(水門)을 조절했던 기억이 난다. 물이 너무 많이 차거나 너무 마르면 벼가 잘 자라지 못하므로 적당한 수준의 물높이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논물 보는 것이다. 어리석게 논의 물만 보고 오는 것이 아니다.
스페인의 국토면적이 남한의 5배 이상이고, 경작면적의 우리나라의 13배 정도 된다고 한다. 곡물 생산의 자급률은 70% 정도이지만 다른 과일이나 채소, 축산물 등은 자급률이 100%를 넘어서 주요 수출 품목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곡물 생산량이 년간 450톤인데, 스페인은 밀(810만 톤), 보리(1천만 톤), 옥수수(400만 톤)가 많고 귀리(130만 톤), 쌀(78만 톤), 해바라기(95만 톤)도 다음순이다. 올리브(100만 톤), 양파(1,200만 톤), 수박(1,200만 톤), 오렌지(330만 톤), 사탕무(2,500만 톤), 딸기(27만 톤) 등 생산량이 매우 많다. 이러한 농업 대국이니까 저러한 관개시설이 필요하리라. 들판에 농사일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어쩌다가 건초를 모으는 농기계가 한 두대 움직이는 것과 커다란 스프링 쿨러 기계가 자동으로 물을 뿌리는 장면 정도이다.
저 농부 청년이 자기 옥수수 농장에 물을 대기 위하여 수로에 가로막을 치고 널빤지를 빗겨 세우고 있었다. 자기네 농장의 관정 쪽의 물꼬 즉 수문을 열고, 저렇게 널빤지를 빗겨 세우면 장애물 없이 흐르던 물이 장애물을 만나 약간 역류를 하면서 옆 쪽의 농장 물꼬로 물이 들어가는 구조였다. 스페인의 영농은 대부분 기계화되어서 일일이 사람 손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간혹 산악 지대에 옛날 방식의 기계화되지 않은 농장들이 보이기도 했으나 규모가 작거나 일손의 부족 때문인지 아예 폐농(廢農)의 수준으로 보였다. 이렇게 시멘트로 된 수로는 우리네 논두렁 농수로보다는 훨씬 정감이 덜 간다. 우리 수로에서는 미꾸라지나 붕어라도 잡을 수 있는데 이곳은 그런 것이 전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