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하(Rioja) 주의 그라뇽(Granon)을 떠나와서 이제 부르고스(Burgos) 주의 첫 번째 마을인 레데시아 델 까미노(Redecilla del Camino)에 도달하였다. 약 4Km의 거리이다. 이 마을도 까미노 순례길로 인해 발달한 전형적인 마을이며, 마을 중심 마요르 거리에는 마을의 문장이 장식된 시골풍 벽돌집들이 늘어서 있다. 마을의 주 성당인 카미노 성모성당(Iglesia de Nuestra Senora del Camino)에는 스페인 로마네스크 미술의 보물이라고 불리는 세례반이 있다. 과거부터 이곳은 중세 프랑크 왕국의 중요한 점령지여서 많은 순례객들로 항상 붐볐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이 마을에는 순례자를 위한 병원이 두 개나 있었다. 부르고스 지방의 산티아고 길에 대한 안내 간판이 길 옆에 서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거대한 안내 간판이 서있다. 밑 부분에 누군가 마구 낙서를 하여서 지저분하다. 안내판을 보니 부르고스(Burgos)가 얼마 남지 않았고, 한참을 더 가면 레온(Leon)이 나오고, 그 끝에 산티아고가 작은 글씨로 표시되어 있었다. 커다란 간판이 허허벌판에 서 있으니 좋은 은폐(隱蔽)와 엄폐물(奄蔽物)의 구실을 한다. 넓은 벌판에 화장실이 당연히 없으니 용무가 급한 사람들이 이 간판을 이용하여 실례를 많이 한 것 같다. 남성 순례객이야 길가에 어디라도 돌아서서 용변을 볼 수 있지만 여성 순례객들은 치마를 입은 것도 아니고 바지 차림이다 보니 드넓은 벌판이 곤욕스러운 장소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런 은폐물이 나타나면 여지없이 그곳이 임시 화장실이 되곤 한다. 이 입간판 뒤쪽도 거의 임시 화장실 수준이다. 순례길 뒤쪽으로 다른 순례객들이 따라오지 않으면 얼른 이런 곳을 이용해서 볼 일을 보는 것이다. 간판 뒤쪽으로 군데군데 먼저 해결하고 간 순례객들의 잔해물들이 보이고, 널브러진 휴지들이 바람에 나뒹굴고 있었다. 누구를 나무라거나 탓할 수 없는 자연적인 생리현상이니 하느님도 눈 감아 주시리라.
이 마을에 있는 까미노의 성모 성당 (Iglesia de Nuestra Senora del Camino)이다. 11세기에 만들어진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으로, 17~18세기에 재건축되어 로코코 양식의 제단화와 가구 그리고 아름다운 세례반이 있다. 이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세례반은 11세기 작품으로, 비잔틴, 모사라베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여섯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기단부와 세례반 둘레에는 도시 모양이 장식이 되어 있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도시인 천상의 예루살렘이 요새 같은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도시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스페인 로마네스크 미술 중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다. 반원형 탑과 삼각형으로 튀어나온 휘장으로 덮여있는 전망대 등도 천상의 예루살렘을 표현한 것이란다.
12세기의 세례반을 형상화한 조형물이다. 레데시아(Redecilla)는 스페인어로 그물이나 그물모양의 직물을 말한다. 이 마을의 이름이 카미노 길의 그물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