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팔도 잔디를 아시나요?

금동수의 세상 읽기(201125)

by 금삿갓

팔도 잔디를 아시나요? 김소월의 시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가에 금잔디.....>가 아니다. 골프선수 닉 팔도(Nick Faldo)가 개발한 잔디도 아니고, 골프장에 많이 식재하는 벤트 그래스(Bent Grass)도 아니다. 꿈과 희망의 잔디이지 잔디의 상표명이 아니다.

1974년 4월부터 KBS-TV에서 <꽃피는 팔도강산>이라는 드라마를 1년 6개월간 방송했다. 당시로는 최장수,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고 최고의 화제(話題) 거리였다고 생각한다. 못 살고 힘든 우리의 현실을 떨치고, 조국 근대화의 기치(旗幟) 아래 각 지역, 각 분야의 발전 현장에서 꿈과 사랑과 희망을 부풀게 만든 대단한 드라마였다. 요즘으로 치면 관제(官製) 오더(Order) 방송에 국정 홍보 드라마였는데 윤혁민 작가가 극본(劇本)을, 김수동 선배가 연출(演出)을 맡아서 크게 성공하였다. 출연진도 초호화판이었고, 기본 얼개(Synopsis)도 상식을 뛰어넘었다. 김희갑·황정순 노부부가 딸만 칠공주(七公主)인데, 딸 부부가 각 분야에서 근대화의 일익을 담당하는 현장을 찾는 에피소드(Episode)였다.

그 시절 또 하나의 조국 근대화의 부푼 꿈이 영글어 가는 곳이 있었다. 경남 마산의 양덕동이다. 바로 한일합섬 공장 내에서 개교한 한일여자실업학교였다. 한일합섬은 창업주 김한수(金翰壽) 회장이 부산에서 사업을 시작하여 성공하자 1964년에 마산에서 창립한 국내 최고, 최대의 섬유회사였다. 당시 회사의 직원이 2만 명 넘었는데, 대부분 여종업원이고 학벌이 초졸(初卒)이나 중졸 이하였다. 학교는커녕 먹고살기도 힘든 시기였기에 아들만 학교에 보내고 딸들은 농사를 도우거나 공장으로 돈 벌러 가는 것이 대세(大勢)였다. 필자의 시골 마을에서도 그렇게 마산으로, 부산·대구로 딸들은 흩어졌다. 명절이면 바리바리 식구들 선물을 싸들고 왔다가 여동생이나 친구들을 데리고 가면 우수(優秀) 사원 대접을 받던 시절이다.

1974년 김한수 회장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산업현장에 들어온 어린 여종업원들에게 배움의 길을 다시 열어 주려고 회사 내에 산업체 부설(附設) 한일여자실업고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교문에 “어떤 시련(試鍊)과 곤궁(困窮)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소녀(少女) 이외에는 이 교문을 들어올 수 없다.”라고 현판을 붙였다. 여종업원들은 낮에는 산업일꾼으로, 밤에는 향학열(向學熱)에 불타는 학생으로 그야말로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형설지공(螢雪之功)을 쌓았다. 이 학교의 개국 기념으로 전국에서 모인 종업원이며 학생들이 각자 자기 고향에서 캐온 잔디를 모아 운동장과 교정에 심었다. 이것이 바로 꿈과 소망과 눈물의 팔도 잔디인 것이다. 일본을 통일하고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통일 위업을 뽐낼 오사카성(大阪城)을 꾸미려고 전국의 다이묘(大名)들에게 돌을 가져오게 하였다. 팔도 잔디는 힘을 바탕으로 한 이런 조공(朝貢)과는 차원이 다른 소중한 꿈인 것이다. 신경숙 소설가의 <외딴방엔>을 읽으면 그 시절의 아픔과 슬픈 꿈을 느낄 수 있다.

한일합섬은 당시 꿈의 섬유라고 불리던 아크릴사(絲) 섬유로 크게 성공하여, 김해, 서울 구로, 대구, 수원 등지에도 공장을 확장하여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1973년에 국내 최초로 수출 1억 불을 달성하였고, 그 후 4억 불도 최초로 달성했다. 파죽지세로 성장하자 기업을 확장하여 금융(부국증권), 석유화학(동서 석화) 분야에 진출하였다. 1982년 창업주 김한수 회장 사후에 장남 김중원 회장이 맡아서 사세를 더욱 확장시켰다. 국제그룹이 망하자 그것을 인수하고, 국영기업인 진해화학(비료), 우성건설까지 인수하여 그 당시 재계 서열 10위의 재벌(財閥)을 형성했다. 그러나 섬유산업의 몰락과 외환위기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가 대부분 공중분해되고 남은 기업이 동양그룹으로 갔다가 현재 유진그룹에 인수되었다. 한일합섬이 지금은 항균(抗菌) 기능성 원사(原絲) 개발과 코로나 관련 부직포(不織布) 생산 등으로 고부가가치를 지향하고 있단다.

11월 초에 한일합섬 김중원 전회장(前會長)이 먼 미국 땅에서 세상을 등지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현지에서 조용하게 가족장(家族葬)을 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대학 때 기업 탐방으로 한일합섬 본사와 공장, 학교 등을 둘러보았다. 그 당시 규모와 설비가 놀라웠는데, 기술과 세상의 변화에 따라잡지 못하면 기업의 수명이나 인간의 건강이나 지속시키기가 어렵다. 그래도 어떤 이유이든 기업은 계속기업(Going-Concern)으로 살아남도록 해야 한다. 기업이 기업주 혼자만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주, 종업원, 소비자, 거래처, 금융기관, 정부, 지역사회 등등 무수한 이해관계자(Stakeholder)들이 존재하고, 이들은 기업의 존망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한일합섬이 망하자 당시 7대 도시였던 마산시의 인구와 경제가 큰 타격을 보았다. 나라를 팔거나 망하게 한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기업을 몰락(沒落)시킨 경영자도 그 책임이 크다고 하겠다.

기업 탐방 40여 년 후 경남의 방송 책임자로 창원(옛 마산)에 가니, 그 기업 자리엔 고층 아파트만 즐비(櫛比)했다. 다행히 한일여고는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꿈과 희망의 팔도 잔디도 보이지 않았다. 기업과 기업주도 가고 팔도 잔디도 없어졌지만 그 당시 꿈을 안고 노력한 5만여 명의 동문들은 이 시대 어느 곳에서 가족과 후세를 위해 당당한 어머니로서, 사회의 어른으로서 그 꿈과 희망을 계속 키워나가고 있을 것이다. 비록 양덕동의 푸른 팔도 잔디가 보이지 않아도 전국 각지에서 가슴에 새싹을 틔우는 더 억세고 질긴 팔도 잔디 씨앗으로 간직되길 빈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7> 장관들의 근무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