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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Oct 23. 2023

23> 松京道中(송경도중) / 송도로 가는 길에

漢詩工夫(한시공부)

松京道中(송경도중) / 송도로 가는 길에

- 金正喜(김정희) -


山山紫翠幾書堂

산산자취기서당

○○●●●○◎

온 산은 자줏빛 푸른빛이고 서당은 몇이나 있나


籬落句連碧澗長

리락구련벽간장

○●●○●●◎

울타리에 글귀 이어져 푸른 냇물처럼 길구나.


野笠卷風林雨散

야립권풍림우산

●●●○○●●

농부의 삿갓은 바람에 접히고 숲에는 비가 흩날리네


人蔘花發一村香

인삼화발일촌향

○○○●●○◎

인삼꽃 피어나니 한마을이 향기롭다.

이 시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1851년 66세 때 당시 권돈인의 진종(眞宗)의 예론(禮論)과 연관되어 북청(北靑)으로 귀양 갔다가 이듬해 해배(解配)되어 돌아올 시기에 개성을 지나가면서 쓴 시로 보인다. 기구(起句)의 2번 자 산(山)이 평성이라서 평기식(平起式) 칠언절구이다. 압운(押韻)은 ◎표시가 된 당(堂), 장(長), 향(香)이고 양운목(陽韻目)이다. 절구의 기본형인 이사부동(二四不同)·이륙동(二六同)이 잘 지켜졌고, 승구(承句) 1번과 3번 자인 리(籬), 구(句), 전구(轉句) 3번 자 권(卷), 결구(結句) 3번 자 화(花) 자의 평측(平仄)을 변화시켰다. 어려운 시어(詩語)는 많지 않고 평이한 시어로 시골의 정취를 잘 표현한 명구이다. 리락(籬落)은 울타리이다. 촌락(村落)이 마을인 것처럼. 구련(句連)은 글귀가 연결되었다기보다 글 읽는 소리가 이어진 것을 표현한 것이다. 왜냐하면 기구(起句)에 몇 개의 서당이 있다고 표현했기 때문에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로 보는 것이 좋다. 벽간(碧澗)은 푸른 계곡 물이다. 야립(野笠)은 들에 있는 삿갓이나 농부의 삿갓이다. 권(卷)은 말려 올라가는 모양이다.

추사 김정희는 정양용과 더불어 혹독한 유배 생활로 유명하다. 제주에서 9년의 위리안치(圍籬安置) 후에 또다시 북청으로 유배가 되었으니 인생의 쓴맛을 얼마나 느꼈을까. 제주에 유배된 지 3년째인 1842년 11월 13일에 남달리 금실이 좋았고, 귀양살이의 옷가지와 음식을 챙겨주던 아내 예안 이씨가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절해고도(絶海孤島) 제주도에서 한참 지나서 청천벽력과 같은 비보(悲報)를 듣고 억장이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비보를 접한 것이 아내가 죽은 지 한 달이 지난 12월 14일이었으며, 아내가 죽은지도 모르는 그는 아내가 죽던 날과 죽은 지 6일째 되는 날에도 사랑하는 아내에게 편지를 써서 아내의 병을 걱정하고 있었다. 비보를 듣고 쓴 시가 아래와 같다.

配所輓妻喪(배소만처상) / 유배지에서 아내의 상을 애도하다.

那將月老訟冥司(나장월로송명사) / 어떻게 하면 저승의 月老(월로)에게 애원하여

來世夫妻易地爲(내세부처역지위) / 다음 세상 당신은 남편 되고 나는 아내 되어

我死君生千里外(아사군생천리외) / 나 죽고 당신 천리 밖에 살아

使君知我此心悲(사군지아차심비) / 당신에게 이 슬픔 알게 했으면

★ 김정희(金正喜, 1786~1856) : 조선 말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서화가이다.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노격(老鬲)·담연재(覃硏齋)·승련노인(勝蓮老人) 등 500여 가지가 있으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부친 김노경(金魯敬)은 1805년에 문과에 급제한 이래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는 맏아버지 김노영의 양자로 들어가서 한양 생활을 하였고, 20세 이전에 스승 박제가로부터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북학 지식을 접하였고, 1809년 아버지를 따라 동지사의 일행으로 북경을 방문하여 학문의 폭을 넓혔다. 또한 예도(藝道) 방면에 학구적인 의욕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생애는 가환(家患)과 신우(身憂)의 점철로 일관하였다. 어려서는 집안이 왕실의 내척(內戚)으로서 그 위용이 대단하였으나 9세 때 양부의 원지정배(遠地定配)는 집안의 우환이 시작이 되었다. 본관은 34세 때 문과에 급제한 후 43세 내각검열대교(內閣檢閱待敎) 겸 시강원 보덕, 51세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 53세 형조참판 등 벼슬길의 영광도 있었지만, 1840년인 55세에는 윤상도(尹尙道)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 해에 동지부사로 임명되었으나 파직되고 제주도로 귀양을 떠나 대정현(大精縣)에 위리안치되어 9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이후 1848년인 63세에 귀양에서 돌아왔으나 1851년 다시 권돈인의 진종(眞宗)의 예론(禮論)과 연관되어 북청(北靑)으로 귀양 갔다가 2년후 67세의 노년이 되어 돌아왔고, 경기도 과천에서 생활하며 마지막 작품으로 봉은사의 <판전(版殿)>을 남기고 71세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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