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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Nov 03. 2023

24> 春閨詞(춘규사) / 봄날 규방의 시

漢詩工夫 (231101)

春閨詞(춘규사) / 봄날 규방의 시

金三宜堂(김삼의당)


人靜紗窓日色昏

인정사창일색혼

○●○○●●◎

사람 고요한 깁창에 날은 저무는데


落花滿地掩重門

낙화만지엄중문

●○●●●○◎

떨어진 꽃잎만 땅에 가득하고 겹문은 닫혔네.


欲知一夜相思苦

욕지일야상사고

●○●●○○●

하룻밤 내내 님 그리는 고통을 알고 싶거든


試把羅衾檢淚痕

시파라금검루흔

●●○○●●◎

비단이불 들쳐서 눈물 자국 보세요.

이 시는 조선 후기 여류 문인 삼의당(金三宜堂) 김씨 부인이 남편 담락당(湛樂堂) 하립(河砬, 1769~1830)이 과거 준비를 위해 별거하고 있을 때, 남편을 그리는 애틋한 사랑을 노래한 춘규사(春閨詞) 8 수(首) 중의 하나이다. 이 시는 기구(起句)의 2번 자 정(靜)이 측성(仄聲)이라서 측기식(仄起式) 칠언절구(七言絶句)이다. 압운(押韻)은 ◎표시가 된 혼(昏), 문(門), 흔(痕)이고 원운목(元韻目)이다. 절구의 기본형인 이사부동(二四不同)은 잘 지켜졌는데. 승구(承句)의 6번 자인 중(重)이 측성(仄聲)이라서 이륙동(二六同)에 어긋났다. 기구(起句) 1번 인(人), 승구(承句) 1번 자인 낙(落), 전구(轉句) 1번 자 욕(欲) 자의 평측(平仄)을 변화시켰다. 춘규사(春閨詞)라 봄날에 규방(閨房)의 정서를 담은 글로 보면 된다. 규방이라 함은 여인들의 공간이다. 사창(紗窓)은 깁 즉 비단으로 창을 바른 창문을 말한다. 엄(掩)은 가리거나 문을 닫는 것을 말한다. 중문(重門)은 홑문이 아니라 겹문이다. 重(중) 자는 늦곡식을 나타내는 뜻으로 쓰일 때는 동으로 읽고, 성조(聲調)는 평성(平聲)이다. 상사(相思)는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심해지면 상사병(相思病)이 되는 것이다. 시파(試把)는 시험 삼아 잡는 것이다. 나금(羅衾)은 비단 이불을 뜻하고, 누흔(淚痕)은 눈물 자국을 말한다.

남원의 같은 마을에서 생년월일이 같은 몰락한 양반가 출신인 담락당 하립과 결혼한 그녀는 혼인 첫날밤부터 남편과 화답시를 쓰는 등 일상생활의 애환(哀歡)을 남편과 꾸준히 시문으로 화답(和答)하던 시우(詩友) 관계이기도 했다. 연산군 대(代)의 학자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인 삼의당은 세종 시대 영의정 하연(河演)의 후손인 담락당 하립과 결혼한 것이다. 몰락한 시골 양반으로서는 가문을 일으켜 세우려면 문과의 급제가 필수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글을 배워 문재가 출중하였고, 남편과 신혼 초부터 화답시를 수창(酬唱)하면서 시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래서 남편과 별거도 감수하면서 남편의 입신양명을 위해 그리움도 입술을 깨물면서 참고 참는 인고의 세월을 시로 노래한 것이다. 위 시에서 봄날이 돌아와서 꽃들이 활짝 폈다가 지고 있는데도 멀리 있는 남편은 인적도 없고, 독수공방 외로운 눈물이 비단 금침(衾枕)을 적시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그녀의 문학을 형성시킨 배경은 시집오기 전에 습득한 남다른 문학적 소양과 남편의 이해, 그리고 그녀가 살았던 남원과 진안의 아름다운 풍경을 들 수 있겠다. 그녀의 시는 특히 자신의 인생행로를 솔직 담백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자서전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녀의 글들을 보면, 몰락한 가문의 입지를 되찾고 가문의 부흥과 시부모의 영달(榮達)을 위해 남편의 과거시험 뒷바라지는 물론 남편이 한 눈 팔지 않고 공부에만 몰두하도록 독려하는데 전력하였다. 그래서 남편이 집을 떠나 산사(山寺)와 서울로 유학한 약 십여 년간 부부는 생이별을 하는 동안 궁핍한 생활을 꾸려나가면서도 남편의 급제를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당시 향촌사족(鄕村士族)의 여인으로서 삼의당은 이러한 제반 악조건을 극복하면서 가슴속에 담아놓은 깊은 정한(情恨)과 사연들을 꾸준히 한시(漢詩)를 통해 정화(淨化·昇化)시켰다.

★ 김삼이당(金三宜堂, 1769~1823)은 전라북도 남원의 서봉방(捿鳳坊 : 현 교룡산 서남 기슭)에서 몰락한 사족의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소학』을 읽고 문자를 배워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했다고 한다. 스스로 글공부에 노력하여 여자로서의 부덕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상당한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1786년(정조 10) 18세가 되던 해에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동네에서 출생한 담락당 하립과 결혼하였다. 본가와 시가가 모두 몰락한 양반 가문이었기 때문에 김삼의당은 남편의 과거 급제를 평생소원으로 삼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나 가세가 더욱 빈한(貧寒)해지자 생활고를 면하기 위해서 1801년(순조 1) 32세에 진안군 마령면 방화리로 이주하여 죽을 때까지 진안에 살았다. 당호 삼의당(三宜堂)은 『시경』 도요시(桃夭詩)에 나오는 구절을 활용하여 신혼 초야(初夜)에 남편이 창화(唱和)한 시의 결구(結句) ‘의실의가재지자(宜室宜家在之子)’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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