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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Nov 01. 2023

25> 去思碑(거사비) /  거사비

漢詩工夫 (231031)

題路傍去思碑(제로거사비) / 길가의 거사비에 대해 짓다

- 李尙迪(이상적)


去思橫斂刻碑錢

거사횡렴각비전

●○●●●○◎

가신 분 기린다고 비석 새길 돈 마구 거두니


編戶流亡孰使然

편호류망숙사연

○●○○●●◎

백성들 떠돌고 도망가게 누가 그리 만들었나?


片石無言當路立

편석무언당로립

●●○○○●●

조각돌은 말없이 길가에 버티고 섰는데


新官何似舊官賢

신관하사구관현

○○○●●○◎

신관은 어찌 그리 구관 닮아 어질까.

이 시는 역관(譯官)으로 중국을 12차례 다녀온 추사 김정희의 제자 이상적(李尙迪)이 어느 때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길 가에 세워놓은 고을 수령의 선정비(善政碑)를 보고 그 폐단을 읊은 시로 보인다. 그의 저서 <은송당집(恩誦堂集>에는 題路傍去思碑(제로방거사비)로 기록되어 있다. 기구(起句)의 2번 자 사(思)가 평성(平聲)이라서 평기식(平起式) 칠언절구(七言絶句)이다. 압운(押韻)은 ◎표시가 된 전(錢), 연(然), 현(賢)이고 선운목(先韻目)이다. 절구의 기본형인 이사부동(二四不同)·이륙동(二六同)이 잘 지켜졌다. 기구(起句) 1번 거(去), 승구(承句) 1번 자인 편(編), 결구(結句) 3번 자 하(何) 자의 평측(平仄)을 변화시켰다. 어려운 시어(詩語)는 다음과 같다. 거사비(去思碑)는 지방 고을의 수령이 떠난 뒤에 백성들이 그의 공덕을 기려서 잊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세우는 비석이다. 송덕비(頌德碑), 선정비(善政碑), 영사불망비(永思不忘碑),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애휼비(愛恤碑), 유애비(遺愛碑), 추사타루비(追思墮淚碑), 기공비(紀功碑), 청덕비(淸德碑), 애민비(愛民碑), 혜민비(惠民碑) 등의 이름으로도 불린다. 따라서 지방관이 되어 백성들에게 얼마나 은택을 베풀었는가의 상징처럼 여겨졌으나, 실제는 관행처럼 굳어지거나 과시용으로 변질되어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상징으로 보일 수도 있다. 횡렴(橫斂)은 정당한 방법이 아닌 무법하게 조세를 거두는 행위이다. 각비전(刻碑錢)은 비석을 새기는 돈인데, 다른 말로 입비전(立碑錢)이라고도 한다. 편호(編戶)는 호적에 편제된 평민을 말한다. 류망(流亡)은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도는 것을 말한다. 편석(片石) 납작한 돌을 말한다.

지금도 지방의 유적지를 다녀 보면 이런 종류의 선정비(善政碑)나 공덕비(功德碑)를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요즘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이들 비석을 한 곳에 모아서 비림공원(碑林公園)을 꾸미고 있는 추세이기도 하다. 이런 행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선정비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전남 순천시 중앙로 95에 있는 보물로 지정된 팔마비(八馬碑)이다. 팔마비는 고려 충렬왕 시기인 1281년 당시 승평부사(昇平府使 : 지금의 순천)였던 최석(崔碩)의 청렴함을 기린 비석이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승평부에서는 관례로 이임하는 태수(太守)는 말 8 필, 쉬(倅 : 부사副使)는 7 필, 법조(法曹)는 6 필을 주었다고 한다. 최석은 8 필을 받지 않고 서울까지 타고 갈 한 마리면 족하다 하였다. 그리고 타고 온 말이 망아지를 낳자 이도 또한 같이 9마리를 돌려보낸 것이다. 그러자 승평 고을 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팔마비를 세우고, 그 후부터 증마(贈馬)의 폐단이 없어졌다고 한다. 고려 말에 세워진 원래 비석은 정유재란 당시에 훼손되었고, 1617년에 이수광(李睟光)이 부사로 와서 다시 건립한 것이 현존한다. 우리에겐 역사적으로 치욕스러운 송덕비도 있다. 고구려와 중국 위(魏) 나라의 전쟁에서 동천왕(東川王)이 패하고 도성이 함락되자 적장(敵將) 관구검(毌丘儉)이 세운 관구검기공비(毌丘儉紀功碑)가 길림성 집안(集安)에 있다. 국내에는 충남 부여에 당(唐) 나라의 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 서울에 삼전도비(三田渡碑)라고도 불리는 청태종공덕비(靑太宗功德碑)도 있다.

진실로 선정을 베푼 목민관(牧民官)을 잊지 않기 위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세운다는 취지가 후대로 내려갈수록 과시용이나 관행적 의미로 변질되었다. 특히 지방 유지인 향임(鄕任)과 아전이 주도하여 백성들에게 강제적으로 재물을 징수하는 착취수단으로 이용되어버렸다. 그래서 영조 시대에 어사 박문수의 장계(狀啓)로 거사비(去思碑)를 금지하였다. 정조 때에도 이 금령을 거듭 밝혀서 영조 20년(1744) 이후에 세운 사적(私的) 거사비는 모두 철거시키고, 민간에서 사사로이 비를 세우면 해당 고을의 관리를 엄벌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나라에서 금지령을 내려도 암암리에 건립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상적(李尙迪)의 이 시가 철종 12년(1861) 연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간에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러한 사례를 많이 보았으니까 이런 한탄의 감회가 나왔을 것이다. 지방마다 송덕비가 수십 개에서 수백 개에 이르는 경우도 많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안동 지방에는 이런 송덕비기 그리 흔하지 않다. 애민관(愛民官)이 없어서도 아니고, 고을 백성이 박절(迫切)해서도 아니다. 퇴계선생(退溪先生)이 유언으로 나라의 예장(禮葬)을 피하고, 비석을 작은 돌에 간략하게 세우라고 했기 때문이다.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 필자의 집안 할아버지로 퇴계선생의 제자인 매헌(梅軒) 휘(諱) 금보(琴輔) 공이 썼다. 퇴계문인이 주류를 이루던 고장이라 선생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나오지 않는 한 그런 형태의 비석을 세우는 것을 관례상 금기시했기 때문에 조선 중기 이후에 안동에는 선정비를 세우는 것이 드문 것이다. 하물며 안동김씨 세도가였던 안동부사 김수근(金洙根)의 추사타루비(秋思墮淚碑)를 안동에 못 세운 이유이기도 하다.

송덕비에 관한 해학시(諧謔詩)도 있다. 지방관 중에서 으뜸을 꼽으면, 감사는 평안감사이고 현감은 과천현감이었다. 왜 그랬을까? 요즘말로 이곳이 다른 곳에 비해서 꿀보직이기 때문이다. 주색잡기(酒色雜技)를 좋아하는 독자들은 예쁜 평양기생이 많아서 평안감사가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전혀 아니다. 평안도는 다른 도와 다르게 징수한 세금 중 일부를 평안감사가 독자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천은 남쪽에서 서울로 드나드는 관문이라서 사람과 물자의 교류가 많은 만큼 명사들과 교류로 승진에 유리하고, 재물을 모으기도 좋은 보직이었다. 이런 과천현감 자리에 있던 엉큼한 어떤 관리가 큰 재물을 모아 한양으로 영전되어 가게 되었다. 온갖 재물을 수레 가득 싣고 남태령 고개에 이르니 이방(吏房)이 그동안 선정에 대한 감사로 선정비를 세우니 몇 자 남기라고 했다. 비석에 가보니 석공이 벌써 “今日送此盜(금일송차도) / 오늘 이 도둑놈을 보내네.”라고 써 놓았다. 얼굴 두꺼운 이 자가 내색을 않고 붓을 잡아 “明日來他寇(명일래타구) / 내일 다른 도적놈이 올 건데”하고는 꽁무니를 뺐다. 그러자 숱한 탐관오리들에게 신물이 아전이 한 구(句) 덧붙여 “何賊至不盡(하적지부진) / 어찌 도둑놈들 끝없이 오는가.”라고 했다. 그때 남쪽으로 내려가던 과객(過客)이 허허 웃으며 “擧世皆爲盜(거세개위도) / 온 세상 모두가 도둑놈이다.”라고 결구(結句)를 지었다고 한다.

今日送此盜(금일송차도) / 오늘 이 도둑놈을 보내네.

明日來他寇(명일래타구) / 내일 다른 도적놈이 올 건데

何賊至不盡(하적지부진) / 어찌 도둑놈들 끝없이 오는가.

擧世皆爲盜(거세개위도) / 온 세상 모두가 도둑놈이다.

★ 이상적(李尙迪, 1804~1865) :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혜길(惠吉), 호는 우선(藕船). 한어 역관(漢語譯官)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연직(李延稷)이고, 김정희(金正喜)의 문인이다. 이상적은 1828년(순조 28) 춘당대(春塘臺)에서 개강할 때에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1845년(헌종 11)에는 임금으로부터 전답과 노비를 받았으며, 1847년(헌종 13)에 이르기까지 다섯 번이나 품계가 올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다. 1848년(헌종 14)에는 비서성(祕書省)에서 정조·순조·헌종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간행하는 데 참여했다. 그리고 계속해 『통문관지(通文館志)』·『동문휘고(同文彙考)』·『동문고략(同文考略)』 등을 간행하는 데에 참여했다. 1862년(철종 13) 1월에는 임금의 특명으로 영구히 지중추부사직을 받았으며, 다음 해 7월 충청남도 온양(溫陽)의 군수로 부임했다.

그는 역관의 신분으로 12번이나 중국을 여행했다. 당대의 저명한 중국문인과 친구관계를 맺었으며, 그러한 인연으로 청나라에서 명성을 얻게 되어 1848년(헌종 14)에는 중국에서 시문집을 간행했다. 그가 교유한 중국학자들의 면모에 대해서는 그들로부터 받은 편지글을 모아 귀국 후에 펴낸 『해린척소(海隣尺素)』에 잘 나타나 있다. 또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북경에 가지고 가서 청나라의 문사 16명의 제찬(題贊)을 받아온 일은 유명하다. 이상적은 시 이외에도 골동품이나 서화·금석(金石)에도 조예가 깊었다. 중국학자 유희해(劉喜海)가 조선의 금석문을 모아 편찬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부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상적의 저서로는 『은송당집』 24권이 있으며, 이 밖의 작품들은 청나라의 학자들로부터 받은 편지글을 모아 엮은 『해린척소』에 부분적으로 전하고 있다. 그의 문학 작품은 다양한 반면에 두각을 나타냈던 그의 능력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역관으로서 언어에 대한 탁월한 재능은 그의 작품에 그대로 드러나, 쓰인 시어가 섬세하고 화려하며 때로는 맑고 우아하다는 평을 얻었다. 「거중기몽(車中記夢)」이라는 작품으로 사대부들 사이에 명성을 얻었으며 헌종이 그의 시를 읊어 ‘은송(恩誦)’이란 별호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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