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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천고제일재녀(千古第一才女) - 이청조

★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 (231111)

by 금삿갓

이청조(李淸照 : 1084∼1155)의 호는 이안거사(易安居士) 또는 수옥(漱玉)이다. 산동성 제주(齊州 : 지금의 제남) 장구(章丘) 출신이다. 그녀의 아버지 이격비(李格非)는 소동파(蘇東坡 : 소식)의 제자로, 진사 급제하여 후사학사(後四學士)를 지냈으며 성품이 강직했다. 그녀는 18세 되던 해인 1101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이었던 조정지(趙挺之)의 아들 금석문(金石文) 연구가인 조명성과 혼인했다. 그들은 연애도 할 사이 없이 결혼부터 해 부부가 되었다. 결혼을 하고 연애는 시작 됐다. 그들의 보금자리는 수도 개봉의 태학(太學) 근처에 꾸렸다. 조명성이 아직 학생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사이가 좋았지만 시아버지 조정지는 권력욕이 크고 술수를 잘 부려서 소동파와 자기의 사돈인 이격비를 탄핵하기도 했다. 그녀가 쓴 <금석록후서(金石錄後序)>에는 남편과 보낸 시절에 관한 추억들이 기록되어 있다. 신혼 시절 아직 태학생(太學生)으로 공부하고 있던 남편이 집에 돌아올 때면 의복을 잡히더라도 비문(碑文) 탁본(拓本)을 사 왔다. 부부가 함께 그 비문을 감상했고, 때로는 고대의 서화나 기물 같은 금석예술품을 수집하는 데 심취했다고 한다. 이청조는 실의에 빠진 남편을 도와 10년 넘도록 금석학 연구에 몰두했고, 그 결과 『금석록(金石錄)』을 완성했다. 신혼 시절에 고전의 구절이 어느 책의 어느 쪽, 심지어 몇째 줄에 기록되었는지를 맞히는 게임도 했단다. 맞힌 쪽이 통쾌하게 웃다가 차를 쏟기도 했을 정도로 두 사람은 뜻이 잘 맞는 부부였다. 동갑내기 부부는 밤마다 꿀맛이다. 당시 이청조는 이미 시를 잘 짓는 사인(詞人)으로 문명을 날리고 있었다. 조명성은 태학에 가서도 이청조(李淸照) 생각에 수업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밤만 되면 “여보 당신도 나와 같이 태학에 가면 안 될까?”라고 어린아이 같이 조른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청조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빗방울이 후드득 후두둑 떨어진다. 조명성도 뒤따라 나와 아내의 허리를 감싸 안는다. “비가 오는데 어딜 가려고? 어서 들어가자!”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더니 세차게 쏟아진다. 조명성이 자기를 껴안고 침대로 이끌자, “당신은 결혼을 이거 하려고 한 사람 같아? 매일 이러다가 공부는 언제 하려고!” 이청조는 조명성에게 몸을 맡기면서도 마음은 내키지 않은 듯 두 눈을 지그시 감는다. 촛불에 비친 그녀의 나신은 황홀하다. 사내는 허둥지둥 즐기고 내려온다. 여인은 그래도 아무 말 없이 사내를 감싸 안는다. 사실 이청조는 조명성과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 이격비(李格非)를 빼닮은 그녀는 평생을 고고하고 아름답게 살고 싶었으나 고관이었던 조명성의 아버지 조정지가 청혼을 해서 전격적으로 결혼을 했다.

당시 이청조의 아버지 이격비는 송(宋)의 관리인 동시에 경학에도 능하여 《낙양명원기(洛陽名園記)》의 저술한 문인이었다. 어머니 역시 고관대작의 무남독녀로서 격조가 높은 가문이다. 그래서 가학과 독학으로 벌써 사(詞)의 명인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을 때였다. 조명성의 가문도 흠잡을 때 없으나 이청조 가문의 문명엔 못 미쳤다. 그런데 그들이 결혼한 이면에 사연이 있었다. 어느 날 조명성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본 책에 “언(言)은 사(司)를 만나고, 안(安)은 갓이 벗겨지고, 지(芝)와 부(芙)는 풀이 죽었다”는 내용이다. 이 꿈 얘기를 아버지에게 들여주자, 조정지는 그것을 파자(破字)로 해석했다. 언(言)과 사(司)가 만나면 사(詞)가 되고, 안(安)의 갓이 벗겨지면 여(女)가 된다. 또 지(芝)와 부(芙)에서 초두머리인 풀이 죽으면 각각 지(之)와 부(夫)가 남는다. 그래서 사녀지부(詞女之夫)라는 문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꿈 이야기를 근거로 당시 유명한 사녀(詞女)인 이청조에게 서둘러 청혼을 한 것이다. 수입이 없는 학생과 시인의 신혼살림은 결혼 패물을 팔아 끼니를 해결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행복했다. 휴일이면 그들은 도시락을 싸 가지고 개봉 이웃의 명소를 찾아 신혼을 최대한 즐겼다. 그들은 패물과 고급 옷까지 팔아서 서화와 골동품을 수집하여 같이 보면서 즐겼다. 그러나 그들에게 달콤한 나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청조 부친인 이격비가 채경(蔡京, 1047∼1126)과 황제 휘종(徽宗 1100∼1125)에게 충성 경쟁에서 밀려 첩첩산골의 유배 길에서 절명(絶命) 한 것이다. 비극은 혼자 오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이청조는 허니문 베이비를 가졌으나 7개월 만에 유산했다. 설상가상으로 시아버지 마저 갑자기 돌아가셨다.

연거푸 일어나는 불행에 이청조는 마음 둘 곳이 없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비파를 안고 처량하게 노래를 불렀다. 방 안에서 노랫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져 더욱 심금을 울렸다. 조명성이 가만히 듣고 있자, “서방님 이게 무슨 곡인지 아세요? 양귀비(楊貴妃 719∼756)가 당 현종(唐玄宗 685∼762)을 위해 직접 부른 《양주곡(梁州曲)》인데 어떠세요? 울적한데 술이나 한잔 할까요?” 부부는 얼른 대국주(大菊酒)를 한잔씩 마시니 국화꽃 빛깔의 얼굴로 물들었다. 해도 어스름 넘어가자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덩어리가 되었다. “내 죄가 크오. 내가 그놈의 파자몽(破字夢)을 꾸지 않았던들 당신은 더 좋은 사내를 만나 남부럽지 않게 좋은 글을 지으면서 활동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신을 대할 면목이 없오. 그러나 나는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했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오.” “소첩도 마찬가지예요. 결코 후회되지 않아요.” 그러면서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한 수 읊었다.

생당작인걸(生當作人傑) / 살아서는 당연히 사람 중 호걸이었고

사역위귀웅(死亦爲鬼雄) / 죽어서도 역시 귀신들 중 영웅이라네.

지금사항우(至今思項羽) / 지금도 항우를 그리워함은

불긍과강동(不肯過江東) / 오강 건너 동으로 안 갔음이야.

이청조의 《하일절구(夏日絶句)》이다. 유방(劉邦 BC247∼BC195)에게 패하여 몰리다가 마지막 절체절명의 순간에 항우(項羽 BC232∼BC202)는 비겁하게 도망가지 않고 장렬히 최후를 마친 당당한 그의 대장부다움을 이청조가 흠모했던 것이다. 강을 건너 도망가서 후일을 도모할 수도 있으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나이 중 사나이를 흠모한 절창(絶唱)이다. 이청조는 여류사인(女流詞人)이지만 용모만 여자일 뿐 행동거지나 품은 뜻은 대장부 같았다. 이 같은 품성이 그의 시에 언뜻언뜻 녹아있는 것이다.

내가 사내라면 조정에 나아가 큰 뜻을 펼치고 아버지의 원수라도 갚고 싶다는 속내일 것이다. 한숨을 쉰 이청조의 손이 조명성의 사타구니를 더듬고 있다. 그녀의 입에선 대국주 향이 폴폴 풍겨 나왔다. 조명성의 물건은 어느새 시위를 잔뜩 당긴 화살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어머 당신 준비가 다 됐네요.” 조명성은 이청조의 전에 없던 행동이 마음에 몹시 걸렸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출사해 생활을 안정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이고, 마음에 드는 벼슬자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태학을 수석으로 나와서 거기에 맞는 벼슬만을 찾았으니 아직 배가 덜 고픈 것으로 고생을 더 해봐야 한다. 그러나 아내 이청조가 너무 측은해서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여보 나 내일 개봉에 다녀오리다.” 탱탱하게 일어나 있던 조명성의 그것이 놀란 자라목 모양 바짝 쪼그라들었다. “왜 갑자기 이래요?” 이청조의 입이 거침없이 다가간다. 그러나 조명성의 심벌은 다시 일어서지 않는다. 스트레스가 너무 큰 탓이리라. 다음날부터 부지런히 쫓아다닌 덕분에 개봉 어느 관서에 음직(蔭職)으로 출사 하기로 했다. 그런데 출근 당일에 문제가 생겼다. 태학 수석 졸업자인 조명성의 이름보다 사(詞)의 명수 이청조의 남편으로 더 알려져 이런저런 환영식을 받다가 너무 과음을 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래저래 벼슬자리를 연연하다가 남송의 말기에 어수선한 조정과 국가 상황으로 부부 생활도 안정되지는 못했다. 1127년에 남송이 망하고 1129년 조명성은 호주지부(湖州知府)로 임명되어 가던 중 건강(建康)에서 열병으로 죽었다. 떠나기 전에 긴급한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는 이청조의 질문에 조명성은 “백성들을 따라 도망가라고 말하고 있다. 이어서 어쩔 수 없는 긴급한 상황이 생기면 보따리와 짐들을 버리고, 그래도 안 되면 책들을 버리고, 그래도 안 되면 골동품들도 버려라. 하지만 조상들의 위패는 반드시 챙겨주길 바란다.”라고 말하며 떠났다고 적고 있다. 조명성이 떠난 지 한 달쯤 지난 후, 편지 한 통이 도착했는데, 조명성이 말에서 떨어지고 무더운 날씨에 병에 걸렸다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를 받고 바로 조명성에게 달려가지만 그는 8월 18일 사망하고, 두 사람의 28년의 결혼생활은 이렇게 끝나게 되었다. 이청조는 졸지에 과부가 되었다. 조명성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장례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청조에게 청혼이 쇄도한다. 남편이 있을 때도 한량들은 군침을 흘렸는데 과부가 되자 눈독을 들였던 사내들은 거칠 것이 없는 것이다. 한다 하는 명문가의 자제들이 껄떡거리며 덤벼들자 닫혀있던 이청조 마음도 봄 안개가 걷히듯이 조금씩 걷혀갔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 같다고 했고, 서방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고 했다. 자식 없이 서방을 일찍 앞세우고 나니 온 집안이 썰렁하다. 있는 것이 그동안 남편이랑 수집한 서화와 골동품이 전부였다. 이들에게 사랑을 쏟을 수는 있어도 이들로부터 가슴 따뜻한 사랑의 밀어를 들을 수는 없었다. 이때 끈질기게 청혼을 한 사내가 있었으니 바로 우승무랑(右丞武郞)인 장여주(張汝柱)이다.

북송의 멸망과 남편의 사후에 이청조는 몇 년 동안 금나라 군대의 추격과 도적들이 횡행하는 난세 속에서 피난을 계속하다가 서기 1132년에야 항저우 당시 이름은 임안부(臨安府)로 정착했다. 막 항주에 도착했을 때 이청조는 노독(路毒)으로 병을 앓고 있었다. 이때 두 번째 남편 장여주가 호방하면서 세심하며 친절한 신사적 풍모로 다가온 것이다. 이청조의 이복동생도 미리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주도면밀한 면도 있었다. 학문을 좋아하던 첫 남편 조명성과 다복한 결혼 생활을 하였지만 조명성이 죽었기에 병든 여성 신분으로 남편이 남긴 각종 골동품 서화 등을 건사하면서 살아가기가 벅찼다. 그런 상황에서 친절한 호감을 갖고 접근하는 장여주가 마음에 쏙 들어 감동한 이청조는 1132년 5월 49세에 그와 결혼했다. 이청조로서는 썩 내키지 않는 재혼이라서 그녀의 주장으로 혼례식은 간단히 치러졌다. 올 겨울만 지나면 지천명(知天命)인데 주위의 눈도 있어 몇 달을 주저하다 결정한 것이다. 자식이 없는 청조로서는 여러 생각 끝에 장여주의 끈질긴 청혼에 끌려가다시피 재혼을 했다. 결혼 첫날밤 사내는 방으로 들어오자 서두른다. 여자는 사내에 대해 이름 석자 외엔 별로 아는 것이 없는데, 며칠 굶은 맹수가 토끼를 본 듯 허겁지겁 달려든다. “잠깐만요. 전 아직 화장도 안 지웠어요.” 청조가 쫓기듯 욕탕으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그녀는 나이답지 않게 여자 분위기를 풍긴다. 발그스름하게 상기된 탱탱한 가슴에 적당히 솟은 불두덩은 아직도 사내들이 탐낼 여체다. “당신 정말 아름답다.” 장여주는 잠시를 기다리지 못하고 욕탕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머! 이러시면 안 돼요. 빨리 나가세요.” “뭘 그러우 이제 우린 부부가 됐는데.” 사내는 잠시도 더는 못 참겠는지 이청조를 번쩍 들어 안고 침대로 향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청조도 오랜만에 남자 품에 안겨서인지 마음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사내 손이 닿자 두 다리가 저절로 벌어졌다. 청조 자신도 놀라고 있다. 마음의 문을 꼭꼭 닫았다 생각했는데 몸부터 열리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역시 사(詞)의 명수이기도 하지만 사랑에도 양귀비를 뺨칠 정도네. 사실 내가 당신이 조명성(趙明誠)과 결혼한다는 소문을 듣고 얼마나 절망했는지 알아? 일주일이나 식음을 전폐했었어.” 이청조는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랬어요?” 이청조의 두 손이 장여주의 등으로 가 몸을 더욱 밀착시킨다. “그럼, 내가 당신의 《취화음(醉花陰)》을 읊어볼게.” 사내는 여인의 계곡 사이를 어정거리던 물건을 거두어 침상 아래로 내려가 벌거벗은 채 앉았다.

薄霧濃雲愁永晝(박무농운수영주) / 안개 옅고 구름 짙으니 근심에 낮이 길어

瑞腦消金獣(서뇌소금수) / 서뇌향이 쇠 향로에서 사그라지고,

佳節又重陽(가절우중양) / 계절은 좋아 또 중양절인데,

玉枕紗廚(옥침사주) / 옥베개에 비단 장막

半夜涼初透(반야량초투) / 초저녁 찬 기운이 처음 스며드네.

東籬把酒黄昏後(동리파주황혼후) / 동쪽 울타리에서 술잔 들고 황혼이 지나니

有暗香盈袖(유남향영수) / 은근한 향기 소매에 차네.

莫道不消魂(막도불소혼) / 정신이 아득하지 않다 말하지 마라.

簾捲西風(렴권서풍) / 주렴을 걷으면 서풍이 불어

人比黄花痩(인비황화수) / 사람이 노란 국화꽃 보다 시드네.

물 흐르듯 막힘 없이 암송했다. 장여주는 이 시간을 위해 며칠 전부터 수십 번 외웠다. 송나라 제일의 시인을 아내로 맞는데, 그의 시 한 편도 외지 못한다면 체면이 안 설 것 같아 수없이 연습한 것이다. 그런데 그 작전이 척척 맞아떨어진다. “그때부터 그렇게 절 사모했어요?” 이청조는 벌거숭인 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사내 품에 안긴다. 장여주는 회심의 미소를 삼키며 그녀를 안고 다시 침대로 간다. 이청조는 어느새 마음도 몸과 같이 활짝 열렸다.

조명성과는 신혼 때부터 비슷한 나이로 풋풋한 육체들이 한 덩어리가 되면 들소모양 거칠 것이 없어 좋았다면 장여주는 연령의 차이에서 오는 안정감이 있었다. 세파에 시달리다가 이런 안정감을 느끼니 닫혔던 여인의 마음이 한꺼번에 열린 것이다. 장여주는 비록 나이는 10여 년 위였으나, 그래도 체격은 탄탄해 이청조가 어머니 품같이 폭 쌓였다. 여인은 그것이 좋았다. 여자는 여자였다. “저는 당신한테 특별히 바라는 것 없어요. 지금 같은 마음으로 소첩을 지켜주시면 돼요. 소첩도 시인이전에 여자예요. 저는 후한 말기 학자 채옹(蔡邕 132∼192)의 딸 채염(蔡琰 또는 蔡文姬 162∼239) 같이 되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채염(蔡琰)은 당시 뛰어난 여류문인으로 남편 위중도(衛仲道)가 죽자, 나중에 흉노에 포로로 잡혀가서 좌현왕(左賢王)의 여자가 되어 두 아들을 낳았다. 12년 후에 조조(曹操)가 북방을 무찌르고 그녀를 돈으로 사서 데려와 동사(董祀)에 다시 시집을 보내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 된 것이다. 이청조는 사내 물건이 깊숙이 들어가자 엉덩이를 조금 빼면서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거침없이 털어놨다. 당당한 태도다. 장여주는 서둘러 쾌락을 즐기고 이청조에게서 떨어져 나온다. “알았소. 내 당신의 재능이 활짝 꽃 피워지도록 적극 외조(外助)를 하리다. 조명성만은 못해도 말이요.” 이청조는 전 남편의 이름이 나오자 갑자기 몸이 굳어졌다. 살아 있는 사람도 아닌데 죄 될 것이 없으나 남편을 두고 간통을 하다 들킨 기분인 것이다. “그런 말이 아니라 소첩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이청조는 등을 보이고 돌아누우려는 사내를 끌어안는다. “내가 뭐라 했소?” 장여주는 다시 두 팔에 힘을 넣어 그녀를 품는다. 사실 사내는 이청조가 탐나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각종 문화재와 진귀한 보물에 눈독이 들어 있는 것이다.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더욱 여인을 끌어안는다. “내 약속하리다. 당신의 시심이 이 나라 전체까지 넘치도록 내 힘을 아끼지 않으리오.” 감미로운 사랑의 밀어는 동창(東窓)에 여명의 빛이 들어올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는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볼일이 있다면 나가버린다.

이청조는 오랜만에 사내랑 오래도록 몸을 섞었더니 온 전신이 쑤신다. 전 남편이 주마등처럼 스쳐나가 마음도 편치 않는데 낮에도 그와 같이 있을 것을 은근히 걱정했는데, 잘됐다고 생각하고 다시 잠을 청한다. 그러나 잠도 오지 않고 시가 한 수 생각났다. 마치 그녀의 가련한 처지를 생각하며 외로운 기러기 즉 《고안아(孤雁兒)》을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읊어 보았다.

小風疏雨蕭蕭地(소풍소우소소지) / 약한 바람에 가는 비가 쓸쓸히 땅에 내리고

又催下千行淚(우최하천행루) / 또 천 갈래의 눈물을 떨구길 재촉하네.

吹簫人去玉樓空(취소인거옥루공) / 피리 불던 님 떠나고 옥루만 공허하니

腸斷與誰同倚(장단여수동의) / 애간장이 끓어지고, 누구를 의지할까.

一枝折得人間天上(일지절득인간천상) / 꽃 한 가지 꺾어 이 세상 저세상에

沒個人堪寄(몰개인감기) / 줄 사람 하나도 없네.

첫날밤을 거짓 밀어로 속삭이며 적당히 때운 뒤 날이 밝자 급한 일이 있다면서 집을 떠나간 후 며칠 만에 나타난 장여주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무슨 사업을 한다며 매일 밤 사람들은 초청해 술자리다 연회를 열었다. 시심을 천하에 떨치게 외조한다던 첫날밤에 한 말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밤마다 몰려오는 사람들은 청루나 기웃거리는 한량들이거나 고물상들이었다. 청조가 가지고 있는 골동품 등 각종 문화재와 보물들을 빼내 팔려는 수작이다. 손님 접대를 위한 술상을 들고 사랑 방문 앞으로 다가가다가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들은 장여주로부터 골동품을 사겠다고 예약을 하였고, 장여주는 선금으로 받은 그 돈으로 며칠간 청루에서 모두 써버린 후에 집에 들어온 것이다. 지금 그들이 장여주를 상대로 빨리 골동품을 보여주던가 내놓으라고 채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청조는 기가 막혀 그만 술상을 떨어뜨릴뻔했다. 장여주가 이청조와 그토록 집요하게 결혼을 하자고 한 속셈이 송두리 채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청조는 내색을 않고 술상을 들고 들어갔다. “아! 내 내자(內子) 요. 나 같은 사람에겐 버거운 여인인데 내가 복이 터졌소. 당신 들어온 김에 멋진 시나 한 수 낭송해 주면 어떻겠소?” 청조는 술상을 내려놓고, 자기가 남편의 속내를 읽고 있는 것을 장여주가 모르게 하고 싶었다. 장여주의 속내를 안 이상 눈치채지 않게 하루라도 빨리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굳혔다. 그리고 골동품 등 문화재와 각종 보물들을 시동생 조명충의 집에 보관시켜 둔 것이 다행스러웠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녀는 장여주 앞에 무릎을 꿇고 당나라의 여류시인 설도(薛濤 767∼832)의 《해당계(海棠溪)》를 청아한 목소리로 읊어 내려갔다.

春敎風景駐仙霞(춘교풍경주선하) / 봄 풍경은 선녀와 노을을 머물게 하고

水面魚身總帶花(수면어신총대화) / 수면의 물고기도 온통 꽃빛이 드리웠네.

人世不思靈卉異(인세불사영훼이) / 세상 사람들 꽃의 오묘함은 모르고

競將紅纈染輕沙(경장홍힐염경사) / 모래밭에 붉은 비단옷 입고 나와 꽃과 견주네.

장여주는 첫날밤에 살을 섞기는 했어도 몸 전체에서 풍겨 나오는 그녀의 단아하고 고품격 한 태도에 말이 막힌다. 역시 이청조 시인은 송나라 최고 시인답다고 모두 입에 침을 튀기며 칭찬을 한다. 장여주는 이 자리에서 분위기를 잡아 구두로라도 이청조에게 동업을 하겠다고 약속을 받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청조가 그만 나가겠다고 하자, 그녀를 계속 붙들어 앉혀 분위기를 연장시킬 용기도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함께 다시 청루에 가서 2차를 할 작정이이다.

내실로 돌아 온 이청조는 오늘밤 베개 밑 송사로 짧지만 이런 재혼 생활을 끝내려 작심한다. 목욕재계하고 사내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장여주는 동창이 틀 때까지 귀가하지 않았다. 이청조는 마지막 밤으로 생각하고 목욕재계까지 하고 기다렸으나 남편이 귀가하지 않자 쪽지를 남기고 전 동생 이항(李沆)의 집으로 갔다. 장여주는 그 이튿날도 오후 늦게 집에 도착했다. 내실에는 이청조는 보이지 않고 그녀가 남긴 쪽지를 본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방문을 박차고 나와 이항의 집을 향해 달린다. 해가 서산에 걸릴 즈음 장여주는 이항의 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집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이청조는 먼저 도착하여 그래도 믿을 곳은 친정밖에 없다는 판단으로 서화 등 골동품을 다섯 수레에 나눠 싣고 떠난 것이다. 장여주는 간발의 차이로 이청조 일행을 놓쳤다. 이청조는 아버지 묘소 앞에서 시묘살이를 했던 오두막에다 서화 등 골동품을 숨겨 놓고 집으로 왔다.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장여주에게 이청조가 다시 돌아오자 눈치를 슬슬 보면서도 속으로 좋아했다. 그런데, “여보 우리 더 이상은 부부생활이 안 되겠어요. 이혼해요.” 이청조가 단도직입적으로 이혼을 하자 했다. 장여주는 저녁을 먹고 욕심을 채우려는 순간이었다. 장여주는 펄펄 뛰면서 반대하며 골동품 등을 모두 넘겨주면 이혼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폭력까지 행사하면서 개망나니로 변한 것이다. 이청조가 골동품도 지키고 이혼도 하려면 장여주를 관가에 고발하여 감옥에 쳐 넣는 방법 밖에 없었다. 당시 법률에 따르면 부인이나 가족이 가장(家長)을 고발하는 것은 엄격히 제한하고 있어서, 고발 당사자도 감옥에 최소한 2년 가야 했다. 이청조는 곰곰이 그 방안을 생각해서 드디어 그를 고발하게 된 것이다.

이청조가 장여주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고발한 죄목은 “망증거수입관(妄增擧數⼊官)이었다. 이건 무슨 죄목일까? 장여주는 거짓으로 서류를 위조해 자신의 과거 낙방 횟수를 몰래 늘려서 관직에 나아가게 된 것이다. 당시 송나라의 관원 선발제도 즉 과거제는 지방의 예비시험인 해시(解試) 또는 향시(鄕試), 이들 합격자를 대상으로 예부에서 주관하는 본시험인 성시(省試) 또는 회시(會試)를 본다. 마지막으로 최종 합격자는 황제가 직접 진행하는 전시(殿試)가 있는 것이다. 지방의 주현(州縣) 관리들이 출제하는 해시(解試)에 합격하면 거인(擧⼈)이라 불렀다. 그런 다음 상경하여 중서성으로 가서 예부 관리가 주재하는 성시(省試)에 합격하면 공사(貢⼠)라 하였다. 공사들은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전시(殿試)에 합격해야 진사(進士)의 신분이 되어 관리에 등용되는 것이다. 송나라 당시에 성시(省試)의 탈락자가 많아서 불평불만이 폭주하여 일부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래서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낙방한 수험생들에게 벼슬할 수 있도록 작은 여지를 주었다. 예를 들어 북송 중엽에는 40세 이상 수험생이 9회 이상 성시에 떨어지거나, 50세 이상 수험생이 6회 이상 성시에 낙방한 자 중에 신청을 받아 특별히 전시(殿試)에 응시할 기회를 주고 시험도 쉽게 하여 소수의 인원들을 구제해 주는 제도가 있었다. 장여주가 이런 제도의 약점을 이용, 낙방 회수를 조작하여 관직에 진출한 사실을 알게 된 이청조가 그를 고소한 것이다. 장여주는 삭탈관직을 당하고 멀리 유배를 갔지만 이청조도 무사하지 못했다. 당시의 법률로 체포되어 감옥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이때 남편과 같이 알고 있었던 먼 친척 되는 기숭례(綦崇礼)라는 관리의 도움으로 9일 만에 석방되었다.

이혼 후 이청조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이청조는 혼자 외로운 시간을 보낼수록, 남편 조명성과 함께 보낸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틈틈이 더욱 성숙한 그의 시세계를 표출하고, 아직 남아있는 문물들을 정리하고 발문을 작성하였다. 이는 남편 조명성의 가장 큰 취미였고, 생애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간을 통해서 아름다웠던 과거를 떠올리며 외로움을 이겨냈고, 남편에 대한 사랑을 이어갔던 것이다. 조명성은 문물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그 목록들을 정리하여 <금석록>을 저술하였는데, 이청조는 이 책에 ‘서(序)’를 달아 <금석록후서>를 작성하였다. 이 작품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데, 두 사람의 사랑과 결혼생활에 대한 상세한 서술로 당시의 구체적인 생활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금석록>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 마지막으로 북송의 멸망, 금나라의 침략, 남송 조정의 무능함, 그리고 ‘정강(靖康)의 변(變)’ 이후에 문물을 지켜내기 위한 갖은 노력과 고통이 매우 상세히 기재되어 있어 당시의 비참한 상황에도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파악할 수 있다. 전설적인 여류시인인 반첩호(班婕好)와 채염(蔡琰) 그리고 이청조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여류시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숨막히는 삶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그녀는 천고제일재녀(千古第一才女)이자 일대사녀(一代詞女)로서 1156년 나이 72세로 세상을 떠났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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