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수의 세상 읽기(211011)
여야의 대선(大選) 열기가 조금씩 고조(高調)되어 가는 시기이다. 이런 시기에는 으레 회자(膾炙)되는 말이 공직자의 선거 개입 시비(是非)이다. 여기서 공직자란 위로는 대통령에서 아래로는 하급 공무원까지 해당되고, 공무원이 아니더라도 정치행위가 제한되는 내부 규정을 갖은 각종 기관이나 단체 종사원도 해당될 수 있다. 그중 가장 위중(威重)한 직위가 대통령을 포함한 고위 공직자, 특히 권력기관인 검찰, 경찰, 국정원 등과 선거업무를 맡은 선관위(選管委)를 들 수 있겠다. 청와대의 선거개입 사례로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해서 탄핵소추(彈劾訴追)를 당했고, 2018년 지방선거에서 울산시장 선거에 청와대 비서관들과 울산경찰청장 등이 개입한 의혹으로 현재 재판 중이다.
국정원의 선거개입 시비는 좀 더 자주 발생했다. 노태우 정부시절 안기부(安企部)는 여당의 김영삼 후보에 대한 내사(內査) 시비나 야당 홍사덕에 대한 비방(誹謗) 선전물 유포 혐의로 질타(叱咤) 당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안기부의 보안정보국 폐지와 정치관여죄 신설에도 불구하고 김덕과 권영해 부장이 선거개입 혐의로 낙마(落馬)하거나 유죄를 받았다. 김대중 정부는 국정원(國情院)으로 변경하였으나 임동원, 신건 원장이 불법 도감청(盜監聽)으로 유죄를 받았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김만복 원장이 선거관련 자료 유출로 낙마했다. 이명박 정부의 원세훈 원장은 댓글 사건으로 유죄를 받았고,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장은 선거개입이 아닌 특활비(特活費) 문제로 유죄를 받았다. 문재인 정부의 초대 서훈 원장은 여당의 선거기획기구인 민주연구원장 양정철을 만나서 구설(口舌)에 오르고, 지금의 박지원 원장도 이른바 <조성은 제보 사주> 관련 혐의(嫌疑)로 입건된 상태이다.
검찰의 대선 개입 문제는 다른 여타(餘他) 기관과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이다. 청와대나 국정원 등의 선거 개입 행위는 적극적 선제적(先制的) 근본적인 것이다. 즉 선제적으로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누구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도록 적극 개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업무 특성상 선제적이기 보다 고소 고발이 들어왔을 때 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로 선거에 개입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검찰이 개입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김대중 비자금(秘資金)>에 대한 수사 유보(留保) 행위이다. 이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1997년 10월 7일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이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365개의 가차명(假借名) 계좌로 비자금을 670억원 조성·관리했다고 폭로했다. 신한국당은 김대중 후보를 조세포탈 및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당시 여론 조사 결과는 김대중 지지율이 34.6%로 1위, 2위는 이인제 23.1%, 3위는 이회창 13.2% 순으로 나왔고, 비자금 폭로로 지지율 변동이 없었다. 도리어 폭로한 여당 후보의 지지율이 약간 떨어지는 추세를 보였다. 마치 지금 상황에서 <대장동 비리> 의혹(疑惑)에도 불구하고 이재명 지지율이 떨어지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고발장을 접수한 검찰은 이 사건을 대검 중수부(中搜部)에 사건번호 <97형110147>를 붙여 배당했다. 이로서 이 사건은 법적으로 정식 형사입건(刑事立件)이 된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중수부 2과장 김인호 부장검사가 주임을 맡았다. 중수부장은 박순용으로 수사라인이 대형 비리사건을 다룬 경험들이 많은 특수수사 전문이라서 총력체제를 갖추었다. 검찰은 10월 20일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대중 비자금> 사건에 대한 검찰의 공식 수사가 선거전에 종결 가능하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실제 고발 내용이 계좌와 수표 추적(追跡)까지 상당 정도 이루어져 기본적인 사실 확인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다만 이 자금이 김대중 후보의 것인지, 법률적으로 어떤 혐의(嫌疑)를 적용할지에 대하여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다고 했다. 수사가 정치권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현실을 고려하지만 결론을 대선 이후로 미루지 않을 방침을 사실상 밝혔다.
그러나 10월21일 낮11시 김태정 검찰총장은 긴급기자회견을 소집 <김대중 비자금>에 대한 검찰수사를 대선이 끝날 때까지 유보(留保)한다고 발표했다. 그 이유는 과거의 정치자금은 여야 정치권 대부분이 자유로울 수 없다고 판단되는데, 이 사건을 수사하면 대선을 불과 2개월 앞둔 시점에서 극심한 국론분열(國論分裂), 경제에 미칠 악영향, 국가전체의 대혼란이 우려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검찰 내부에서는 수사권 포기(抛棄)라는 반론과 정치적 독립의 계기(契機)라는 엇갈리는 평가가 나왔다.
급전직하(急轉直下) 정국의 방향을 틀어 놓는 검찰의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선택이었다. 수사 실무 팀까지 꾸려놓고, 중수부장이 수사착수를 공언(公言)한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때에 이루어진 전격적(電擊的)인 발표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여당인 신한국당은 검찰의 손바닥 뒤집기를 공격하고,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는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라고 환영했다. 검찰의 독단적인 결정이라고 했으나 아무도 이를 액면(額面) 그대로 믿을 사람은 없었다. 일설에는 검찰총장과 대통령 단둘이 청와대에서 만났으며 YS가 총장의 손을 잡고 기도를 드렸다고도 했다. 김태정 전 총장은 훗날 “YS가 ‘선거 때 상대 후보의 약점을 들춰내 비난한 사람치고 당선된 사람이 없다.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비자금>을 수사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며 수사 중단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선거 결과 DJ가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김태정은 DJ정권의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김대중 비자금>이나 다른 당의 비자금 수사는 유야무야(有耶無耶) 흐지부지 끝나고 세인(世人)의 뇌리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김대중(측근) 비자금>의 존재를 주장하는 인사나 보도들이 나오는 것을 볼 때, 그 당시 명확하게 수사를 종결하지 않은 검찰의 실책(失策)이 너무나 커 보인다. 김태정은 부인의 옷 로비 사건으로 취임 2주 만에 불명예 퇴진하고 최초의 특검(特檢)까지 구성되었다. 정치권 비자금에 대한 특검이 구성되어야 하는데 엉뚱한 특검이었다. 만약 <김대중 비자금> 사건을 예정대로 수사를 했더라면 그해 대선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검찰이 수사권을 남용(濫用)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수사권을 포기(抛棄)하는 것도 큰 문제이다.
제16대 대선의 <병풍사건(兵風事件)>은 2002년 5월 21일 오마이뉴스가 김대업의 말을 인용, “이회창 측이 아들의 병역비리 은폐(隱蔽)를 위한 대책회의를 가졌다”고 보도한 데서 시작됐다. 이후 김씨는 7월 31일 기자회견을 갖고 직접 이회창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을 제기했고, 이를 받아 당시 여당 등이 병역비리를 집중 공격하여 정치 쟁점화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회창의 지지율이 단숨에 11% 포인트 가량 급락(急落)하며 대권가도(大權街道)가 흔들렸다. 검찰은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신속하게 2002년 8월 초에 서울지검 특수1부에 해당 병역비리 수사팀을 구성했다. 최근 동아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수사팀은 수사 착수 한 달 반 만에 수사를 마무리 지었다고 한다. 아들의 병역 비리 혐의는 무혐의(無嫌疑)이고 놀랍게도 김대업의 날조극(捏造劇)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김씨가 제시한 핵심 물증, 즉 이회창의 부인 한인옥으로부터 아들 병역 면제 청탁과 함께 1,000만 원을 받았다는 병무청 직원의 진술이 녹음된 테이프의 공장(工場) 출시(出市) 시기(時期)가 녹취(錄取)가 이뤄졌다는 시점보다 훨씬 뒤였단다. 이를 포함해 김씨의 주장들은 대부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수사팀장인 김경수 부부장검사는 수사 결과 발표를 건의했는데, 박영관 특수1부장은 “미진하다. 아직 더 할 게 많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김학재 대검 차장도 발표를 반대했단다.
검찰은 수사를 사실상 끝내고도 뭉그적거리며 대선(大選)이 두 달도 안 남은 10월 25일에 이르러서야 발표하도록 했다. 더구나 공식적 브리핑 룸은 사용도 안 되고, 카메라 동원도 못하게 했단다. 대선 판을 뒤흔들고 나라를 혼란시킨 사건의 수사 결과를 서울지검 3차장 사무실에서 티타임(Tea Time) 형식으로 발표토록 한 것이다. 당시 김학재 차장, 박영관 부장은 목포고 출신으로 김대중 정권의 검찰 파워맨으로 불렸으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김대업의 조작극(造作劇)이라는 사실이 백일하(白日下)에 드러났지만, 대선은 코앞이고 조작극으로 이회창은 이미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된 뒤였다. 발표 자체도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이 무혐의라는 사실만이고, 김대업은 대선이 끝난 후인 2003년 1월에야 무고(誣告), 수사관 사칭, 명예훼손 등 혐의로 구속됐다. 수사결과를 발표해도 여당과 좌파진영이 주장하는 보수정당의 압력에 굴복한 정치검찰, 기득권 수구 세력의 야합(野合)이라는 프레임을 깨부수기엔 역부족이었다. 2004년 2월 대법원은 김씨에 대해 징역 1년 10개월 유죄를 확정했고, 2005년에는 김대업에 5,000만원, 오마이뉴스에 9,000만원, 일요시사에 2,000만원을 배상 판결했다. 법원은 2004년 판결문에서 이회창의 지지율이 김대업의 폭로로 11% 빠졌다고 적시(摘示)했다. 대선 결과 이회창은 노무현에게 2.3% 포인트 뒤져서 낙선했다. 나라를 뒤흔드는 사건을 혼자 기획했는지, 사주(使嗾) 공작(工作)을 한 배후(背後)가 있는지에 대한 수사는 아직까지 없다. 병풍 수사는 검찰이 여야 유불리(有不利)에 관계없이 진실을 밝혀낸 수사로 평가받지만 실제 내부에서는 발표 시기를 저울질하는 등의 행위가 있었다면 선거에 개입한 사례로 볼 수 도 있다.
2007년 제17대 대선 때 야당이었던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 대한 <다스와 BBK 사건(당시 공식용어로 옵셔널벤처스 주가조작사건)> 수사가 대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競選)이 치러지던 4월경부터 불거져서, 여름 이후에는 일부 언론과 여당을 중심으로 이명박의 <다스와 BBK 주가 조작 및 도곡동 땅> 의혹 등을 집중 제기했고 결국 검찰은 수사에 나섰다. 검찰은 당시 도곡동 땅에 대해선 대선 4개월 전인 2007년 8월 ‘제삼자 소유로 보인다’는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다스와 BBK>의 실소유주 의혹은 대선을 관통하는 사건이었다. 다스의 경우는 초기 수사 단계에서부터 실소유주를 의심할 여지가 많았지만 마지못해 수사에 나선 검찰은 12월 5일에 “무혐의” 수사 결과를 내놓았다. 그럼에도 의혹이 사그라지지 않은 채 선거가 치러졌고 이명박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선 뒤에 정호영 특검은 38일간에 걸쳐 수사를 한 후 대통령 취임식 4일 전에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모든 의혹이 근거 없다고 했다. 10여년이 지나 밝혀진 일이지만 당시 특검은 130억 원이 넘는 다스의 비자금 증거를 발견하고도 눈을 감았단다. 그리고 2012년 내곡동 사저(私邸) 특검에서도 다스 비자금 실소유주를 밝혀낼 기회가 있었지만 결과는 허탕이었다.
하지만 검찰과 특검(特檢)이 ‘봐주기’ ‘맹탕’ 수사로 덮었지만 진실이 영원히 묻히지는 않았다. 2017년 11월 BBK 피해자의 고소를 계기(契機)로 검찰은 재수사에 나섰다. 다스 의혹이 처음 제기된 때로부터 10년이 넘은 시점이었지만 공소시효(公訴時效)도 MB를 구해주지 못했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례상 대통령 임기 중에는 내란(內亂)·외환죄(外患罪)를 제외한 모든 범죄의 공소시효가 정지된다. 퇴임한 전직 대통령은 이미 죽은 권력이고, 측근 등 사건 관련자들의 입도 가벼워졌으며, 검찰은 눈치를 볼 일이 없었다. 다양한 자료와 관련자의 진술을 통해 사실 관계가 명백히 규명됐다. 결국 MB는 2020년 10월 29일 대법원은 다스 실소유와 관련한 뇌물·횡령 등의 혐의로 1심보다 2년 길어진 징역 17년을 확정했다. 지지율 1위를 달리던 후보의 범법 행위가 대선 전에 밝혀졌다면 선거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불행하게도 제15대부터 17대까지 연속해서 3번에 걸쳐 강력한 대권 후보자에 대한 비리 혐의가 터졌다. 검찰은 수사를 유보(留保)하거나 결행(決行)했으나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실체적 진실을 적기(適期)에 밝혀내지 못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이런 사건들이 제 때에 명명백백하게 밝혀졌더라면 오늘날의 정치 상황이 좀 더 투명하고 깨끗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위 <병풍사건>과 <다스·BBK> 사건은 늦은 감이 있지만 대선 이후 모든 것이 밝혀져 단죄(斷罪)되었는데, <김대중 비자금> 사건은 영원히 미제(未濟)로 넘어갔다. 이런 검은 비자금의 토양이 제대로 척결(剔抉)되지 않아서 오늘날 여권 후보에게 제기되는 <대장동 의혹>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검찰은 역사의 죄인으로 남아 두고두고 역사의 심판(審判)을 받지 않으려면 총력을 기우려 최단기간 내에 실체적(實體的)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 뭉그적거리거나 이런 저런 눈치를 보면서 수사를 덮으려 하다가는 국민들의 돌팔매를 맞을 것이다. 수사권을 가진 권력기관인 검찰의 선거 개입 행위가 또다시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모든 국민이 눈을 부릅뜨고 촉구해야 한다.
<대장동 의혹>이 2007년 대선의 <다스·BBK> 사건과 비슷하다는 시각(時角)이 많다. 한 정치권 인사는 “이재명 후보가 ‘대장동 개발 설계는 내가 한 것’이라고 기자회견까지 했다가 선을 긋는 것을 넘어 야당 게이트라고 덮어씌우는 걸 보니, 이명박 후보가 당시에 ‘내가 BBK를 설립했다’고 말해놓고 논란이 되자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한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항간(巷間)에 떠도는 ‘단군(檀君) 이래 최대의 개발 비리’를 적당히 처리하고 넘어간다면 국민이 단죄하여야 한다. 또한 유력 야당 후보자 본인에게 제기된 <고발 사주(使嗾)> 의혹 사건도 철저히 수사하여 범법 행위가 있다면 처벌하여야 정치 토양이 건전해 질 것이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