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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공수처가 동창(東廠)인가

금동수의 세상 읽기(220210)

by 금삿갓

근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이른바 공수처(公搜處)의 무분별한 일반인의 통신자료 조회로 <언론 및 민간 사찰>이란 논란이 일고 있다. 야당인 국민의힘은 공수처가 소속 의원 105명 가운데 최소 78명의 통신자료를 조회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형사소송법학회 인권이사 등은 2021.1.28. 에 헌법재판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수사 대상이 고위공직자의 특정 범죄로 한정된 공수처가 형사소송법학회 회원들과 야당 국회의원, 기자, 팬카페 회원, 일반 주부 등 민간인까지 통신자료를 조회했다”며 헌법소원(憲法訴願)을 제기했다. 공수처나 정부 여당은 “적법한 절차에 따른 수사행위”라고 항변하지만 “사찰 의혹”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공수처 : 뉴스1 이미지>

통신자료 조회란 말은 일반인이 듣기에 따라서 법률적 구분이 약간 애매한 표현이다. 검찰이나 경찰 등 수사기관이 조회하는 것은 통신자료 조회와 통신사실 조회로 구분된다. 통신자료 조회는 수사기관이 특정 전화번호의 가입자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연락처 등을 해당 통신사에 요청하여 확인하는 것을 말한다. 통신사실 조회는 수사기관이 법원으로부터 수색영장 격인 <통신사실 확인 조회 허가서>를 발부받아 특정인의 전화번호로 수신 및 발신한 모든 통화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 자료는 수사 대상인 전화번호와 통신한 상대번호·내역·위치정보 등이 담겨 있다. 수사기관은 이들 정보 중에서 의심되는 기간, 빈도 등을 종합해 범죄 연관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는 번호를 추린 뒤, 수사대상과 어떤 관계인지 등을 파악하기 위해 가입자 정보, 즉 통신자료를 통신사에 조회하게 된다.


지난 과거부터 현재까지 수사기관의 통신자료 조회 관행은 변함이 없다. 법조계나 학계에서 통신자료 조회가 남발(濫發)될 경우 통신비밀과 사생활 침해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은 많았다. 하지만 여야의 입장 차이만 바뀔 뿐 관련법의 개정에는 한 발짝의 움직임도 없다. 더욱이 공수처의 경우 고위공직자의 범죄 행위에 대한 수사 기관임에도 언론인, 교수, 학생, 주부 등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 통신자료 조회를 한다는 사실이 민간인 부당 사찰에 해당하여 국민들을 불안하게 한다. 사찰이란 단어는 한자로 쓰면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사찰(査察)은 조사하여 살핀다는 뜻이고, 사찰(使察)은 사람을 시켜서 살펴보는 것이고, 사찰(四察)은 눈, 귀 입, 마음의 네 가지로 살펴서 아는 것이며, 사찰(伺察)은 몰래 엿봐서 살피는 것으로 제일 기분 나뿐 일이다.


몰래 사찰하는 행위를 일삼으면 공수처가 명(明) 나라의 동창(東廠)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사찰은 주로 도청(盜聽)·감청(監聽), 도촬(盜撮), 탐문(探問) 등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조선시대에 암행어사 제도가 지방관에 대한 공식적인 암행의 감찰제도이다. 암행어사 제도가 폐지되었지만 고종(高宗)은 지금의 국정원과 비슷한 비밀정보기관인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라는 조직을 두었다. 이들은 고종에게 직보(直報)하는 문서를 당시에 주로 쓰던 먹물로 쓰지 못하게 하고 화학비사법(化學秘寫法)이란 특수 화학약품으로 된 잉크를 쓰도록 하여 비밀을 유지했다. 책임자 독리(督理) 1인, 사무(司務)·사기(司記)·사신(司信)의 3개 분과 밑에 상임 통신원(16명), 보통 통신원(15명), 특별 통신원(21명), 해외 통신원(9명), 임시 통신원 등 총 61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전제군주제의 근간을 흔들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서 정탐하여 보고하였다. 관료의 동정, 전단(傳單)과 유언비어(流言蜚語), 기독교도(基督敎徒) 동태, 동학도(東學徒)의 동태, 녹림당(綠林黨) 동태, 백성들의 주거 이동, 해외 통신원의 파견국의 동정 등을 파악 보고토록 하였다. 민중의 저항 운동이었던 동학농민혁명도 일제 경찰의 도청과 탐문에 의해 사전에 포착되어 쉽게 제압된 것이다.


정치나 군사를 위해 피아(彼我) 간의 정보 파악이 중요하다는 것을 중국인들은 아주 일찍 터득했다. 손자병법의 용간편(用間篇)에서 정보는 귀신에 물어보거나 해와 달을 보고 점칠 수도 없고, 사안을 보고 유추하기도 어렵다. 오로지 사람을 통해 얻어야 한다고 했다. 임진왜란의 발발 예상 정보를 조선은 모르거나 무신경이었는데 반해 중국은 허의후(許儀後)와 주균왕(朱均旺)의 첩자 노릇으로 소상히 알고 있었다. 명나라의 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는 공식적인 황실 정보기관을 최초로 만든 사람일 것이다. 그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4남인 주체(朱棣)로 조카인 건문제(建文帝)로부터 무력으로 권력을 빼앗아 황제에 올랐다. 그래서 정통성이 부족한 왕권(王權)에 도전하는 무리를 색출할 명목으로 신임하는 환관을 수장으로 하는 동창(東廠)을 만들었다. 서양에서는 그보다 늦은 16세기 영국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신의 왕권과 종교 갈등을 막기 위하여 비서실장 격인 프랜시스 월싱엄(Francis Walsingham)을 수장으로 한 비밀 첩보기관을 두었다. 이 기관은 국내외에서 활동하며 왕권을 노리던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Mary Stewart)의 반역 모의를 발각하여 처형하기도 하고,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를 무찌르는 정보력을 과시했다.


영락제는 1420년에 아버지 주원장(朱元璋)이 만든 금의위(錦衣衛) 보다 더 강력한 동집사창(東輯事廠) 즉 줄여서 동창을 만들었다. 북경의 동안문(東安門) 북쪽에 설치하였고, 금의위를 하부 기구로 두었다. 명나라 중엽으로 가면서 서창(西廠), 내행창(內行廠)을 만들어 더 강화하였다. 우두머리를 동창장인태감(東廠掌印太監) 또는 독주(督主)라 부르며 환관의 서열 2위였지만 실질적인 1위였다. 명나라 15대 황제 천계제(天啓帝) 때 환관 위충현(魏忠賢)은 시장의 파락호(破落戶) 출신으로 일자무식이었으나 자신의 손으로 고환을 잘라내고 출세를 위해 환관이 된 사람이다. 황제 주유교의 유모인 객(客)씨를 정부(情婦)로 만들어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다. 그는 환관의 수장인 병필태감(秉筆太監)과 동창의 제독을 겸했다. 동창을 활용하여 정치적 반대파를 색출하거나 정보를 조작하여 제거하고, 황제의 눈과 귀를 막아 전횡을 누렸다. 당시 동창에는 72가지의 고문 도구가 있었고, 모두가 잔인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살아있는 위충현을 기리는 사당이 송나라의 충신 악비(岳飛)의 사당 바로 옆에 더 크게 지어지고, 행차 때마다 환관 3,000명이 따르며 구천세(九千歲)를 외쳤다고 한다. 충신들을 사찰하여 쳐내고 간신들과 자기편으로 조정을 채웠지만 결국 자기도 능지처참(凌遲處斬) 당하고 명나라도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당시 조선의 주청사(奏請使) 서장관 홍익한(洪翼漢)은 북경에 다녀와서 <조천항해록(朝天航海錄)>에 “천하의 권세는 첫째는 태감 위충현, 둘째는 객 내저(客 奶姐), 셋째로 황상이 가졌다(天下威權所在 第一魏太監 第二客奶姐 第三皇上)”라고 썼다.

<군통의 최고 수장 다이리>

왕권의 보호와 가톨릭 국의 종교 탄압을 막기 위해 조직된 월싱엄의 비밀 첩보조직은 국내외의 정보를 잘 활용하여 국익에 큰 도움이 되었고, 훗날 영국의 비밀 첩보기관 MI5와 MI6의 토대가 되었다. 중국의 동창은 세월이 흘러 중국 공산당의 비밀 첩보 조직인 중공특과 즉 터커(特科)나 국민당의 군통(君統) 즉 군사위원회 통계조사국으로 되살아났다. 특히 다이리(戴笠)가 40만 명의 비밀경찰을 통솔하는 군통의 총책일 때는 일본군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1946년 3월 19일 다이리가 비행기 사고로 죽은 뒤, 공산당은 환호를 했고, 주은래(周恩來)는 “그의 사망으로 공산혁명을 10년 앞당길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외국 군사정보기관이나 공산당 정보기관도 다이리의 군통을 무척 어렵고 높이 평가한 것이다. 정보기관이든 감찰조직이든 사찰기구이든 간에 모든 조직이 자기 조직의 이익이 아닌 국익의 관점에서 활동할 때 그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다. 특히 국익을 위해서라도 국민들의 사생활이나 권리 침해를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활동하여야만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굳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들먹이지 않더라고 말이다.(2022.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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