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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Mar 15. 2022

(1) 중국을 덮은 치마폭 – 측천무후

★ 18禁 역사 읽기 ★ (220314)

자기들이 천하에서 최고이고, 온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중국에서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여자가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중국의 유일무이한 여황제 측천무후(624-705)다. 당나라를 지우고 자신의 나라인 무주(武周)의 천책금륜성신황제(天冊金輪聖神皇帝)로 즉위하여 14년 4개월 동안 중국을 통치했다. 동서양 역사상 여왕들이 많았지만 중국에서는 이 여자가 최초이자 마지막 여황이다. 재위 기간 동안 연호(年號)를 황제의 자리를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뜻으로 천수(天授), 마음대로 하겠다는 여의(如意), 오래 해 먹겠다는 장수(長壽), 하늘과 통했다는 통천(通天) 등 14번이나 바꾸었다. 평균 1년 1개씩 바꾼 것이다. 그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 신라에는 632년에 선덕여왕과 637년에 진덕여왕이, 일본에서는 훨씬 전인 180년경에 히미코(卑彌呼), 250년경에 이요(壹與) 여왕이 있었고, 610년경 수이코(推古) 여왕이 즉위했다. 측천무후보다 일찍 여왕으로 등극하였으니 신라나 일본이 중국에 비해 남녀평등이 빨랐다고나 할까. 진덕여왕이 더 오래 살았다면 여황제 즉위에 축하사절이라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는 법적, 공식적으로 부자간(당 태종과 고종)인 두 사람을 남편으로 두었고, 육체적 비공식적 남자는 삼천에 이르렀다고 짐작한다.

그녀는 원래 성이 무(武), 이름이 조(照)인데, 당 고조의 개국공신인 무사확(武士彠)의 둘째 달로 태어났다. 무사확은 원래 건설업자 및 장사꾼이었는데, 당 고조인 이연을 도와 당나라 건국에 공을 세웠다. 공신의 딸로서 14살의 풋내 나는 나이에 당나라 2대 천자인 태종의 후궁이 되었다. 그때 직급이 정5품에 해당하는 재인(才人)이었으니 몰락한 공신의 딸로서는 출세한 셈이다. 재인이란 춤과 노래, 악기 연주 등을 담당하는 후궁이다. 아무리 영계를 좋아해도, 요즘 같으면 서슬이 퍼런 미성년자보호법이나 아동청소년성보호법 같은 것으로 꿈에도 그리할 수 없지만 오로지 나라님의 말씀이 곧 법이었으니 안 되는 게 없다. 무조(武照)가 들어간 상양궁(上陽宮)에는 미스 차이나 뺨치는 미인들이 득시글대고 있었다. 모두들 각자 자기 지방에서 “미스 춘향”,“능금아가씨”,“고추아가씨”,“인삼아가씨”등 등 내로라하는 규수들이 3천여 명이나 되었다. 의술의 힘을 빌리지 않은 자연산 미녀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니 황제의 눈에 띄기는 로또 당첨 수준의 확률이었을 거다. 하지만 운 좋게도 무조는 태종의 눈에 들었고 ‘무미랑(武媚嫏)’이라는 이름도 받은 걸로 나온다.

당시 태종과 무조의 일화가 있는데, 여기서 그녀의 성격의 단면이 여실히 드러난다. 서역에서 공물로 받은 사자총(獅子銃)이란 말이 하도 사나워서 대장군인 울지경덕(尉遲敬德)도 길들이지 못하고 낙마하자 무조가 자신이  길들여보겠다고 하였다. 태종이 어떻게 할 것인가 묻자,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먼저 철편(鐵鞭)으로 때려서 기를 죽이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면 철추(鐵鎚)로 후려칩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목을 찌르겠습니다.”대답을 들은 태종은 섬뜩한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은 그녀에게 대범하다고 크게 감탄하였지만 그녀를 총애하게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런 탓인지 궁에 있던 10여 년 동안 수많은 비빈(妃嬪)이 승진했지만, 그녀는 재인으로 황제의 손길 한번 못 스친 채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 힘든 시간 동안 그녀는 상심하거나 자위행위만 하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부유한 친정 집안의 재산을 활용하여 그녀는 부패한 환관들을 상대로 뇌물을 주면서 궁 안의 정치적 역학 관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온갖 정보를 모았다. 돈을 아끼지 않고 후하게 인심을 쓰면서 항상 따뜻한 말과 깍듯한 예로 궁 안 사람들을 대하니 점점 많은 사람이 그녀 편이 된 것은 당연지사다.

이 시기에 무조는 당 태종을 늘 시종 하면서 ‘정관(貞觀)의 치’로 일컫는 태종의 정치 리더십을 배운 것이다. 당 태종의 인재 용인술과 현명한 신하의 간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제왕의 본보기를 본 것이다. 황제의 정치적 리더십과 왕궁내의 정치적 암투에 대한 내막을 잘 파악하면서 때를 기다리던 그녀에게 기회와 위기가 동시에 찾아온 것이다. 태종이 고구려 원정 후유증으로 병석에 드러눕자 무조는 병 수발을 하는 후궁으로 근무하게 되고, 태종이 죽으면 모든 후궁들은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는 위기인 것이다. 그런데 태자와 왕자들이 아버지의 병문안을 오는데, 그중에서 태자 이치(李治)의 눈길이 무조에게 꽂혀서 떠날 줄을 모른다. 그 시기 무조는 20대 중반의 활짝 핀 장미 같은 미모여서 서너 살 연하의 젊은 태자로서는 불길이 확 타오를 수밖에 없었다. 병상을 돌보는 시녀 신분과 병문안을 올리는 태자가 지근거리에서 분 냄새를 맡으면서 스치니 사고가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법률상 두 사람은 모자관계지만 젊은 혈기는 국경을 넘기도 하니까.

궁궐에는 무수한 여자가 있지만, 참고로 당나라 후궁의 공식적인 숫자와 품계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명의 황후가 최고봉이고 그 밑으로 4부인(婦人 : 귀비, 숙비, 덕비, 현비), 9빈(嬪 : 소의, 소용, 소원, 수의, 수용, 수원, 충의, 충용, 충원), 27세부(世婦 : 첩여 9, 미인 9, 재인 9), 81어처(御妻 : 보림 27, 어녀 27, 채녀 27) 등 12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당나라의 법전인 대당육전에서 정한 황제의 공식적인 여인이지만, 그 외에도 황제의 성향에 따라 총 3천여 명의 여자들이 궁궐에 있었다고 한다. 황제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꽃다운 여인이 부지기수다. 한나라 원제 시절 뇌물을 안주는 왕소군의 초상화를 일부러 밉게 그려서 결국 왕소군이 흉노로 시집가게 되자, 황제가 그녀를 처음 보고 그 미모에 놀라고 아까워서 초상화 그리는 환관 모연수(毛延壽)의 목이 달아났다는 설화도 있다.

태종이 사망한 이후에 무조도 황실의 관습에 따라 감업사(感業寺)로 출가해서 비구니로 지내게 되었다. 쓸데없이 잡생각 하지 말고 돌아가신 천자의 극락왕생을 빌면서 여생을 마치라는 거였다. 전해 내려오는 헛소문 전설에 따르면 감업사 주변에는 ‘살송곳 장사’는 찾아볼 수 없어도 은장도와 바늘 장사가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아무튼 무조도 용빼는 재주가 없어 절 밥을 먹으며 밤마다 은장도를 사용하고 있었을 거다. 구중궁궐 안에서나 감업사에서 긴긴밤을 홀로 지내야만 하는 궁녀나 과부 같은 독신 여성들에게만 생기는 특별한 직업병을 실녀병(室女病)이라고 한다. 실녀병은 성생활을 하지 않는 독신 여성에게 잘 생기는 병이니 궁녀들의 직업병으로 당연히 산재보상을 해 줘야 옳은 거다. 무조가 절에서 ‘반야심경’을 외우던가, ‘수덕사의 종소리’나 ‘성불사의 밤’을 부르면서 다소곳이 여생을 마쳤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고구려가 안 망했을까나?

감업사에서 오매불망 환궁(還宮)을 그리워하던 무조가 법률상 의붓아들인 황제 고종(이치)에게 여의랑(如意娘)이란 연시(戀詩) 한 수를 보냈다. 무조는 문인으로서도 재능이 뛰어나서 <수공집(垂拱集)>, <금륜집(金輪集)> 등의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현존하지 않고, 시로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게 모두 49 수다. 그중에서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은 이 시가 유일하다.

마음이 심란하여 붉은색이 푸르게 보이네요.(간주성벽사 분분 : 看朱成碧思紛紛)

님 생각에 초췌해지고 지루하답니다.(초췌지리위억군 : 憔悴支離爲憶君)

근래도록 길게 흘린 눈물 믿기지 않으신다면(불신비래장하루 : 不信比來長下淚)

상자 열어 석류 치마 눈물자국 보시옵소서.(개상험취석류군 : 開箱驗取石榴裙)

이 연시(戀詩)를 받아본 덕분인지, 머리 깎은 지 3년 만에 고종이 아버지 태종의 제를 올리기 위해 감업사로 납시어 무조를 해후하고 만다. 남의 떡이 항상 커 보이고, 손에 든 꽃 보다 절벽에 핀 꽃이 예쁜 것이다. 고종은 공작을 꾸며 그녀를 기어이 정2품 소의(昭儀)로 금의환향시킨다. 그녀가 후궁으로 재취업하면서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녀를 중심으로 덜커덩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십 대 후반의 농(濃) 익은 몸으로 고종의 후궁으로 화려한 컴백을 하게 된 무조는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일설에는 황후가 무조를 환궁시키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당시 황후와 소숙비 사이에 황제의 사랑을 쟁취하려는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사실 고종의 마음은 황후보다는 소숙비에게 기울고 있었는데, 황후는 무조를 데려와 무조와 소숙비가 서로 다툰다면 자기가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무조를 황궁으로 데려오자고 먼저 건의한 것이 바로 황후였다는 것이다. 사랑의 삼각관계와 사각관계를 구상한 것이다.

맘에도 없던 비구니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황궁으로 돌아온 무조는 당시 가장 왕성한 스물아홉의 나이었다. 스스로 모든 계획을 갖춘 그녀는 입궁 이후 누구보다 황후를 모시는 데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고종과 황후의 밤무대를 가끔씩 주선해 주자, 황후는 자신의 계산대로 소숙비에 대한 고종의 사랑이 점점 사라져 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기는 아이가 없는데 무소의가 고종의 딸을 낳았다. 그러자 무소의를 증오하기 시작한 황후는 이번에는 소숙비와 한통속이 되어 무소의를 제거하기로 의기투합하지만 무소의의 대응이 한 수 위였다. 무소의는 태종 시절 길러온 실력을 발휘하여, 고종을 지극히 보살피는 한편 황후에게 배척당한 후궁들과 매수한 환관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이들을 통해 고종과 황후, 소숙비의 일거수일투족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이 정보를 활용하여 거짓을 보태거나 윤색하여 고종에게 고했다. 과거나 현재나 문고리 권력이 젤 세고, 그보다 더 센 것이 베개머리 권력이다. 힘은 권력자와의 거리에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암투와 별별 도구와 방법이 동원된다. 무당을 불러들여 굿을 하거나 부적 등의 주술적인 방법, 독극물을 이용하는 방법, 헛소문을 퍼드리는 방법, 살인 등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진다. 무소의는 자신이 갓 낳은 어린 딸을 황후가 보고 간 뒤 딸을 목 졸라 죽이고는 이를 ‘황후 짓’이라고 모함했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황후가 목숨을 건졌지만 고종의 총애가 무측천에게 집중될수록 안절부절못하던 황후는 굿을 하면서 무당에게 황제를 저주하라고 한다. 이 사실은 바로 무소의에게 전달되어 고종에게 고해진다. 이 일로 고종은 왕황후를 폐위하고 무소의를 황후의 자리에 앉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충신 장손무기와 저수량이 반대했지만 콩깍지가 쓰였는지 베개머리싸움에서 패배했는지 고종이 강행 처리했다. 마침내 무소의가 무측천이 되어 승자가 모든 걸 독식(Winner takes it all)하게 된 것이다. 창업보다 수성이라고, 그녀는 황후 자리를 손에 넣는 것 못지않게 자리를 지키는 일에 힘을 쏟았다. 언제 또 어떤 비빈이 고종의 총애를 얻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뒤 왕황후와 소숙비를 잔인하게 죽임으로써 감히 무측천에게 대드는 비빈은 없었다.

무측천은 구중궁궐내의 여인천하를 평정한 후에도 야심을 계속 키웠다. 그녀는 고종과의 사이에 딸 둘과 아들 넷을 낳았다. 첫 딸은 왕황후를 몰아내고 자기가 황후가 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아들 넷은 차례로 자기의 권력 장악에 적절하게 활용을 하여 드디어 자기 맘대로 나라를 만들고 스스로 여황제로 등극하였다. 막내딸은 늘그막에 자기의 치정(癡情) 생활의 하수인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계보를 보면 장녀 안정공주 교살, 장남 태자 홍(弘) 독살, 차남 현(賢) 자살, 삼남 현(顯) 중종 폐위, 사남 단(旦) 예종, 차녀 태평공주 순서이다. 무측천의 잔인하고 엽기적인 행각을 사례별로 보도록 하자.

▲ 첫 딸(안정공주) 살해

첫 딸이 첫돌이 되어 왕황후가 축하차 방문했을 때 무측천이 자리를 비우고 병풍 뒤에 숨는다. 황후가 나가자 베개로 얼굴을 눌러 질식사를 시킨다. 딸을 보러 고종이 침소를 방문했을 때 죽은 딸을 보고 경악하는 쑈를 벌인다. 고종이 시녀를 불러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추궁을 하자 "왕황후가 아까 다녀갔다"라고 대답하게 한다. 이 음모를 위해 무측천은 사전에 환관과 시녀들에게 돈을 풀어 매수해 놓은 것이다. 이 술수가 왕황후의 짓이 아니란 것이 밝혀져 간신히 모면하지만 황후는 무당굿으로 폐위되고 만다.

▲ 왕황후, 소숙비 살해

음모로 쫓겨나 궁궐 지하 감옥에 갇힌 신세인 왕황후와 소숙비를 가엽게 생각한 고종이 그녀들을 살펴보러 다녀온다. 무측천은 고종의 관심이 행여나 자기에서 멀어져 그녀들에게 돌아갈 새라 이들을 처단하기로 작정한다. 두 여인을 옥에서 꺼내 곤장을 때려 반죽음시킨 뒤 손발을 잘라서 술독에 넣어 서서히 죽게 만들어 버린다.

▲ 조카딸 위국부인 독살

무측천은 황후 자리를 꿰차도 곳곳에 젊은 후궁들의 암초가 도사리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이를 발본색원할 방도를 찾는다. 그래서 믿을 수 있는 친언니가 미침 과부로 있어서 그녀를 고종에게 소개하고 젊은 후궁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자 고종이 언니에게 한국부인의 작위를 주고 홀딱 빠져버린다. 다행히 언니는 빨리 병사했는데, 도리어 조카인 젊은 딸에게 고종이 껌뻑 가게 되어 위국부인으로 삼는다. 그러자 무측천이 친정 오빠들에게 음식을 진상하라고 시켜서 여기에 독을 타서 조카딸에게 먹여 독살시킨다. 연적(戀敵)은 무조건 제거다.

▲ 장남 홍(弘) 살해

원래 고종의 서자(궁녀의 아들) 이충(李忠)이 태자였는데, 황후가 된 무측천은 이를 폐위하고 자기 장남 홍을 태자로 삼았다. 이 친구가 맘이 여려 숙청된 소숙비의 옥에 갇힌 두 딸을 위해 중매를 거겠다고 나서다가 무측천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 그래서 엄마에게 독살당한다. 일설에는 아주 현명하고 정치력도 있었는데 병약하여 죽었다는 설도 있다. 부모가 나중에 의종으로 추존한 것을 보면 병사로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 차남 현(賢) 태자 폐위 후 자결

장남이 죽자 차남 현(賢)을 태자로 책봉한다. 차남이 능력이 뛰어나고 학문을 숭상하며 신하들의 신임을 얻자 무측천은 자기의 야망에 껄끄러운 방해물이라고 판단한다. 자신이 총애하는 명숭엄(明崇儼)의 살해 사건으로 엮어 모반의 죄목을 뒤집어 씌워 폐위한 뒤에 다시 사천성에 유배시킨 뒤 자결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현(賢)은 무측천의 자식이 아니라 무측천의 언니인 한국부인과 고종이 야합하여 낳은 아들이라고도 한다.

▲ 삼남 현(顯) 중종 즉위시킨 후에 폐위

남편인 고종이 사망하자 삼남 현(顯)이 제위에 오른다. 바로 중종이다. 근데 이 중종이 마누라 위황후에게 꽉 잡혀서 장인 위현정에게 정승자리를 주려하고, 심지어 유모의 자식에게도 고위관료를 제수하려고 한다. 신하들이 집단적으로 반대하자 중종은 홧김에 “내가 천자로서 장인에게 천하라도 내 마음대로 줄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소리치자 이를 반대파들이 무측천에게 알렸다. 이씨 천하를 위씨에게 넘긴다는 발언은 바로 역성혁명이요 종묘사직에 대한 반역이다. 무측천은 아들이지만 중종을 즉각 폐위하여 왕으로 강등시킨다. 그 후 정변이 일어날까 봐 경계하면서 감시하던 중 중종도 일찍 병사한다.

▲ 사남 단(旦) 예종으로 올리고 수렴청정하다가 황위를 선양받음.

무측천은 중종을 쫓아낸 뒤 사남 단을 예종으로 제위에 앉히고, 지켜보니 황제가 하는 짓이 한심해 보인다. 그래서 직접 수령청정을 하다가 “여자라고 황제가 못 될쏘냐?”라고 큰맘 먹고 드디어 중국 최초의 여황이 된다. 국호를 옛날 주(周) 나라를 그대로 본떠서 무주(武周)의 초대 여황제로 즉위한다. 이때가 690년으로 무후의 나이 67살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이 나이면 대부분 산에서 제사를 받는 것이 통상인데 아직도 40대의 미모와 왕성한 욕구로 남첩 3천 명을 거느릴 수 있었다.

▲ 이씨 왕족과 충신들의 씨를 말림

무황제의 집권을 지탱한 가장 큰 힘은 엄격한 감시와 통제인데 <사궤(四櫃)>라는 투서함을 두고, 불량배, 건달, 왈패 등을 중심으로 혹리(酷吏) 비밀조직을 만들어 밀고 및 공포정치를 했다. 무황제는 재위 동안 27명의 혹리를 두었는데, 역사에 기록된 최고의 고문 기술자는 삭원래(索元禮), 내준신(來俊臣), 주흥(周興), 후사지(侯思之) 등이다. 이들의 고문 기술은 5공 시절의 고문기술자 불리던 이근안 경감은 초등학생 수준도 되지 못했다. 내준신은 도박꾼의 아들로 건달생활을 하다가 감옥에서 옥리를 모함하여 무측천에게 혹리로 발탁되어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나중에 주남산(朱南山)과 함께 <나직경(羅織經)>이라는 모함 날조하는 고문 기술 이론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고문 기술을 보면, 한압부수(旱鴨鳧水), 봉황쇄시(鳳凰曬翅), 옥녀등제(玉女登梯), 미후찬화(獼猴鑽火), 선인헌과(仙人獻果), 청군임옹(請君入瓮) 등 일견 멋있어 보이는 사자성어인데 잔인하기가 소름이 돋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친일경찰로 독립운동가들의 치를 떨게 한 악랄한 고문기술자 노덕술(盧德述)이 이를 벤치마킹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들의 활약으로 이씨 왕족과 충신들은 거의 몰살당하다시피 한다. 하지만 혹리들의 말로도 그들이 고안한 고문기술에 의하여 생을 마감한다. 무측천은 이런 혹리를 활용하여 정적을 제거하고 스스로 나라를 세워 황제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권력욕과 음욕이 강했던 여황제의 남색행각(男色行脚)은 아주 유명하다. 본인 스스로도 잘생긴 남자들을 뽑아 데리고 놀기도 했지만 아부하기 좋아하는 밑의 놈들이 추천한 남자들이 대부분이다. 기가 찬 것은 같은 여자인 시고모와 딸이 훌륭한 남첩을 추천했는데 정말 만족스러워했다. 그중에서 절륜한 대표 선수 몇 명만 보기로 한다.

▲ 시고모인 천금공주가 추천한 설회의

천금공주는 당 고조 이연의 딸이며, 태종의 여동생이다. 무측천에게는 시누이며, 시고모인 것이다. 무측천이 이씨의 당나라를 무씨 황국으로 만드려고 이씨 황족들을 사냥하자, 목숨을 구하기 위해 조카며느리에게 면수(面首) 즉 남총(男寵)으로 설회의(薛懷義)를 갖다 바치다 못해 자신이 양어머니로 모시게 해 달라고 빌었다. 도대체 촌수가 어떻게 되는 건지? 설회의 이 놈은 본명이 풍소보(馮小寶)로 체격 좋은 괴력의 소유자로 떠돌이 약장사였다. 우연히 천금공주의 눈에 들어 여황제의 남첩으로 제공되었다. 여황제는 근본도 없는 남첩을 황궁으로 들이기가 곤란하자 딸 태평공주의 남편 설소(薛昭)의 숙부로 위장하면서 이름을 설회의로 하사했다. 직업을 스님으로 세탁해서 백마사 주지로 만들어 무시로 황궁에 들어와 수청을 들게 했다. 그놈은 궁궐 주변에 엄청난 규모의 만상신궁(萬象神宮)을 건축하여 여황제의 즉위를 치성으로 빌고, 그들의 애정을 나누는 방은 요즘 러브호텔처럼 사방을 구리거울로 장식하여 환상적인 밤 생활을 영위했다. 여황의 총애로 승승장구 승진하여 대장군이 되어 돌궐의 침략에 원정하기도 했지만 여황이 주치의 심남료(沈南蓼)에게 빠지자 질투심으로 만상신궁을 불태워 결국 사지를 잘려 효수되어 죽게 된다.

참고로 역사에 등장하는 유명한 괴승 또는 요승 두 사람이 더 있다. 러시아의 라스푸틴과 고려의 신돈이 바로 그들이다. 심령주술사 또는 최면술사인 라스푸틴은 러시아 최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아들 알렉세이 황태자의 혈우병을 우연히 고쳐주어서 이들의 총애를 받고 설쳐대던 놈이다. "라스푸틴이 없었다면 러시아혁명도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국정 농단을 보면 2년 동안 수상 4명, 국방상 6명, 내무상 4명을 갈아치울 정도였다. 또한 평소 30cm, 발기 시 40cm인 거근(巨根)의 소유자이고 밤무대 기술이 환상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소문의 맛을 보려고 불나비처럼 몰려오는 황족과 귀족의 부인들을 밤마다 파티에서 모조리 해치웠다. 심지어 잠 옷 입은 공주들의 방에 노크 없이도 무상출입할 정도로 난잡했다. 황제 버금가는 권세로 국정을 농단하고, 황족인 펠릭스 유스포프의 아내 이리나 공주에게도 거근을 무기로 집적대는 것을 참지 못한 유스포프 공작이 파티에서 그를 암살한다. 그의 국정 농단으로 제1차 대전에서 독일에게 완패하고 재정이 어려워져 결국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제국은 쓰러졌다. 일설에 그의 남근이 잘려서 알코올 병에 담겨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고려의 신돈은 공민왕의 꿈에서 생명을 구해준 인연으로 강력한 신임을 받아 왕의 전권을 받아 서민위주의 개혁정책과 기득권층을 혁파하고 신진 사류를 장려했다. 하지만 전횡을 일삼다가 그의 지지층인 신진세력으로부터 반발을 사서 죽게 된다. 그는 도성 안에 저택을 일곱 채를 갖고 있으면서, 남편을 생트집으로 하옥시키고 귀부인들을 겁탈한 후에 풀어주는 수법을 주로 썼다. 공민왕이 볼 때는 초근목피를 먹다가 그 일당들과는 산해진미에 심지어 정력증강용으로 말 거시기를 고아먹었다. 그 힘으로 남편을 잡아넣고 사대부 부인들을 모조리 해치운 건가? 최상의 거래는 여불위(呂不韋)처럼 자신의 애첩인 "반야"를 공민왕에게 받쳐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우왕이고, 손자가 창왕이다. DNA 검사를 할 수 없었으니 그 핏줄이 누구의 것인지 영원히 수수께끼일 뿐이다.

▲ 여황의 주치의 심남료(沈南蓼)

여황제는 밤의 욕구는 설회의로 시원하게 풀고 있지만, 자신이 하루하루 늙어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을 것이다. 젊음을 붙들어 놓고 미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건 모든 여인의 소망이니까. 아무리 용한 어의라지만 그 당시에 피부 IPL이나 피부 주름살을 잡아당기는 성형술은 없었다. 그래도 여성용 비아그라 대용품이나 피부 미용품을 열심히 개발한 주치의 심남료가 있었다. 그는 <익모초택면방(益母草澤面方)>과 <면지(面脂)>를 만들어 여황제가 상용토록 하여 젊음을 유지했다. 익모초택면방은 요즘 안티 에이징 크림에 해당하는데, <신선옥녀분(神仙玉女粉)>이라고도 불렀다. 단오시기에 채취한 익모초와 각종 약재를 활용한 이 약은 부인병의 내·외용약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얼굴에 바르면 색이 검어진 것을 치료하고 반점과 주름살을 없애주는 효능이 있으며, 피부를 촉촉하게 하고 광택이 나게 한다. 이 약은 얼굴에 바르면 피부가 매끄럽고 뺨에 광택이 생기며, 얼굴에 혈색이 돌아 윤기가 있으니, 50대의 여인이 사용해도 10대의 소녀와 같이 젊어져 보이게 된다고 한다. <면지>도 요즘의 얼굴 크림 종류다. 주요 구성 약재는 풍기(風氣)를 없애는 세신, 백부자, 신이, 음기(陰氣)를 보강해 피부를 윤택케 하는 위유, 과루인, 돼지기름, 기(氣)를 도와주는 황기, 피를 잘 통하게 하는 천궁, 목람피, 그리고 백지, 산약 등을 추가한다. 약재들을 가루로 내어 술에 하룻밤 재운 뒤 다시 천천히 졸여서 묵처럼 응고시킨다. 이것을 바르면 피부가 밝고 깨끗해지며 주름살이 없어지고 피부가 촉촉해진다고 한다. 이 발명품으로 장안 귀부인 상대의 벤처사업을 했으면 지금의 태평양화학이나 로레알은 쪽도 못 썼을 텐데, 여황제 전용 독점 시장 즉 한 구멍만 파느라 수익성도 별로 없고 구멍 파는 실력도 그만그만하여 그리 오래 총애를 받지는 못했다. 또한 당나라판 여성용 비아그라는 만들어서 진상한다. 그것은 바로 무후주(武后酒)라 불리는 메추리 술이다. 메추리를 암순(鵪鶉), 순조(鶉鳥)라고 하기에 암순주(鵪鶉酒)라고도 부른다. 메추리의 머리, 깃털, 내장을 제거한 뒤 깨끗이 씻고 물기를 제거한 뒤 하수오, 녹용, 인삼, 고량주를 넣어 반으로 줄도록 달인다. 이를 식힌 뒤에 단지에 꿀과 함께 밀봉하여 서늘한 곳에서 3개월 정도 숙성시켜 만든다. 매일 조석으로 적당량 섭취하면 성기능을 강화시키고, 갱년기 정력 감퇴에 효과가 아주 좋다고 한다.

▲ 막내딸 태평공주가 선물한 장창종(张昌宗), 장역지(张易之)

얼굴이 연꽃처럼 아름다운 미남 장창종(张昌宗)은 태평공주(太平公主)가 무측천(武则天)에게 추천하였다. 이 친구는 요즘으로 치자면 톰 크루즈나 브래드 피트 정도였는지 69살의 여황제가 뻑 가버린다. 그는 또 자기 형 장역지(张易之)를 데리고 들어와서 여황제를 감동시킨다. 그리하여 형제는 용감하게 밤마다 리턴 매치가 아닌 태그 매치(Tag match)를 하던가, 쓰리썸(Three sum)으로 여황제를 모셨다. 맨 처음에 두 형제는 중낭장(中郎将)과 소경(少卿)에 임명된 후 날이 갈수록 여황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대부분의 정사(政事)를 이장(二張) 형제에게 맡기니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이들도 여황이 병들자 705년에 재상(宰相) 장연지(张柬之) 등이 정변(政变)을 일으켜 주살(誅殺) 당한다.

측천무후가 대당(大唐)의 황제로 즉위하던 날의 사랑놀음 한 편을 18금 드라마로 한번 살펴보자. 외형으로 보면 여제가 중국을 통치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베일을 벗기고 속을 들여다보면 장씨 형제가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장역지의 위세는 여황 못지않은 권세를 누리고 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고향에 거대한 별장 앵원(鶯苑)에 수십 명의 첩까지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우인 장창종도 형만은 못하지만 역시 형의 별장 맞은편 산에다 별장 향원(香苑)을 짓고 수십 명의 첩을 거느리고 있었다. 여황에게 1년 365일을 붙들려 있으니 좀처럼 고향에 갈 수 없으나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가게 되면 나라님이 행차하듯이 수백 명의 꽃미남들의 호의를 받으며 금의환향하는 것이다. 형만 한 아우 없다고 했지만, 역시 장역지는 역시 출중하다. 그는 고향에 오더라도 한 밤에 쥐도 새도 모르게 왔다가 목욕재계, 칠보단장을 하고 기다린 애첩(愛妾)과 만리장성을 쌓고 해가 뜨면 아침이슬이 증발해 버리듯 입궁해 버린다. 사실 장역지가 고향에 왔다가 가는 것은 여제와 애첩, 그리고 본인과 가족 몇몇 사람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여제는 형 장역지를 더 아끼고 사랑하고 그가 앙탈을 하면 안 되는 것이 없었다. 장역지의 특기는 학무(鶴舞)이다. 형이 구름 같은 학의 털로 만든 탈을 쓰고 너울너울 춤을 추고, 동생인 장창종이 생(笙 : 관악기)을 불면 여제는 신선이 된 듯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세계적인 3대 명주인 백주(白酒)를 마시고 천상의 세계로 가곤 하는 것이다. 형은 형답게 능수능란하다. 그러나 동생은 또 동생답게 풋풋하고 구김이 없어 사랑을 할 때는 형보다 아우를 선호 한다. 여제로서는 둘 다 없으면 안 되는 존재지만 해가 뜨고 대명천지가 되면 장역지가 더 필요하고 달이 뜨고 밤이 되면 동생이 더 좋고 그리운 것이다. 


여제는 언제부터인가 보름달이 높은 밤이면 장창종과 단 둘만의 사랑을 원했다. 특히 정상체위보다 요상한 각종 동물체위를 요구한다. 60이 넘은 나이였으나 그녀의 몸매는 대리석같이 매끄럽고 아름다웠다. 장창종은 잠자리에선 당당한 남자가 된다. 공개석상에서의 여제와 남첩이 아닌 떳떳하고 군림하는 남자가 되어 여자를 유린하는 것이다. 장창종은 억세지만 부드럽게 그녀를 탄다. 사랑스럽게 엉덩이를 감싸 안으며 힘찬 준마의 머리를 서서히 꿈의 동굴로 집어넣으면, 욕정에 눈멀어 한낱 여인이 된 여황은 두 다리를 사시나무 떨 듯 떨며 두 손을 뒤로 해 사나이의 엉덩이를 힘껏 당긴다. 형 장역지는 엷은 커튼 뒤에서 마른침을 삼키며 관음을 즐기고 있는 것을 여인은 충혈된 눈으로 확인한다. 여인은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때론 꾀꼬리 소리로, 때론 비둘기 울음소리로, 때론 암말이 발정 난 소리로, 아니면 흐느끼는 암고양이 소리로 격정에 따라 교성이 바뀌고 있다. 역발산(力拔山) 장창종도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여인의 젖과 꿀이 흐르는 성전(性殿)에선 벌써 폭풍이 너 댓 번 지나갔으나, 암말은 떨어질 줄 모른다. 커튼 뒤의 장역지는 몇 번이고 달려와 아우의 땀을 닦아주고 거울 속의 벌거숭이 남녀를 바라보며 관음(觀淫)에 빠졌다. 이같이 열성적이고 사랑스러운 형제를 여제가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태양은 태양대로 좋고 달은 달대로 아름다우니 시인들의 시심(詩心)에서 어느 하나를 빼버릴 수 없듯이 여제는 눈만 뜨면 형제를 양손이 닿는 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장역지는 춤을 특출 나게 잘 추기도 하지만 입과 손으로 여제를 능수능란하게 황홀경으로 몰았다. 학의 탈을 나신(裸身)으로 분위기에 따라 입었다 벗었다 하면서 알몸의 여제를 희롱하는 것이다. 분위기가 익어 가면 황혼의 여제는 장역지를 붙들고 애원한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생(苼)의 선율(旋律)이 방 안을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어 춤추는 벌거숭이 학을 여제는 훔치듯 끌어안았다. 여인은 분위기에 취해 어느새 꿈의 동굴에 비가 뿌려져 끈적한 물이 흥건하게 흐르고 있다. “이제 그만 이리 오너라! 더는 못 참겠어!” 여제는 사내를 끌어안고 절정의 숫사자가 자기 영역을 표시할 때 포효하듯 교성을 지르고 곧 깊은 잠에 빠졌다. 80살을 바라보는 여황이 젊은 남자를 밝히는 정욕은 유명한 늙은 남자들의 정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거나 뛰어나다. 괴테는 72살 때 17살의 뷔르리케에게 청혼했고, 빅토르 위고는 70살 넘어서도 하녀 부랑쉬와 정을 통했고, 앙드레 지드 또한 75살에도 어린 여성과 관계를 했단다. 숙량흘(叔梁紇)도 60이 넘어서 16살의 안징재(顔徵在와) 야합(野合)하여 공자(孔子)를 낳았다. 마오쩌둥(毛澤東)도 한평생 여성 편력을 했지만 84 세로 죽는 날까지 전속 간호사와 엽색행각을 했다. 80세의 영화배우 로버트 드 니로는 45세의 티파니 첸과 사이에서 늦둥이 딸을 낳아서 인생의 황혼기에 새 봄을 느낀다고 했다.

중국에서는 여성이 왕은커녕 관료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측천은 역사에 전례가 없는 여황이 되기 위해 사서와 경전을 들이 팠다. 불행히도 제자백가의 각종 경전이나 춘추, 사기, 한서 등 사서를 샅샅이 뒤져도 오로지 남존여비를 주장뿐이었다. 심지어 서경(書經)에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으며, 시경(詩經)에도 여자는 누에치기와 베 짜기만 하라고 했으니.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조그만 단서를 불경에서 찾았다. 방대한 불교 경전에서 여자가 왕이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있었다. <대방등무상대운경(大方等無想大雲經)> 줄여서 대운경이라는 불경에 “부처님이 정광이란 여자에게 말씀하시길, 여자의 몸으로 왕이 되어 전륜왕이 통치하던 사방 중의 하나를 얻게 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무측천은 이 경전을 쉽게 번역하여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 불교를 포교하는데 힘썼다. 여성이 왕이 될 수 있는 논리를 불경에서 찾아서 불교를 퍼뜨렸으니, 스스로 새 왕조를 세우고 등극하는 것이 당연하게 된 것이다. 누구 하나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국 어디서나 무측천을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했다. 용의주도한 무측천은 먼저 섣불리 나서지 않고 주변에서 옹립해 주기를 기다렸다. 급기야 지지자들이 “무측천을 황제로 모시자”는 청원에 나섰다. 1차 시위는 관중 지역 노인 수백여 명이 자발적으로 낙양의 황궁 앞에 와서 몇 날 며칠 동안 촛불시위를 하면서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땅에는 두 명의 왕이 존재할 수 없다’고 외쳤다. 허수아비 예종과 수렴청정의 무측천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무측천은 극구 사양했다. 그러자 친무세력과 무빠, 대깨무 등 청원인구는 갈수록 늘었다. 2차 시위는 노인, 변방지역 수장들, 승려와 도사들이 황궁에 터를 잡았다. 놀이패·풍물패와 재담가들이 총동원되었다. 당나라 보이그룹과 걸그룹이 ‘무비어천가’를 줄창·떼창을 해댔다. 궁궐 수비대가 추산한 잠정 집계 인원이 12,000명이 넘었단다. 3차 시위는 거국적으로 들고일어났다. 문무백관, 황실 종친, 황제인 예종까지 파업에 동참하였으며, 지방 수령들이 우마차로 지지자들을 실어 날랐다. 궁궐 수비대가 마차들로 궁궐을 명박산성이 아닌 마차산성을 만들어 막으면서, 고춧가루 물대포와 풍구(風具)로 연기를 퍼부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수비대 추산 무려 50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자 무측천은 결국 ‘하늘의 뜻과 백성들의 정성이 이와 같으니 어찌 민의를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며 여황으로 즉위할 것을 가납(嘉納)했다.

마침내 690년 9월 9일 무측천은 황제로 즉위하여 당나라를 주(周)나라로 바꾸고, 연호를 천수(天授)로 선포했다. 신하들은 그녀에게 ‘성신황제’라는 존호를 올렸다. 예종은 다시 황태자로 강등되어 이씨에서 무씨 성을 받는다. 최초의 여제로서 잔인한 철권통치와 음란한 행동으로 욕을 먹지만 그녀는 중국 역사상 위대한 여제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농업 장려와 수리시설 개선, 내륙 교통망 구축, 고구려 정벌, 인재의 탕평등용, 최대 영토 확장 등 그녀의 치적을 기반으로 훗날 현종이 ‘개원의 치(治)’를 열어서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 있었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705년 11월 26일 병으로 81년간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면서, 무자비(無字碑) 즉 아무런 글자도 없는 비를 세우고, 황제가 아닌 고종의 황후 신분으로 남편 곁에 묻으라고 했다.


사실 무측천은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최초이며, 최후의 여황제로 평가하지만, 잠시나마 여자가 황제를 칭하던가 옹립된 사실은 무측천 이전에 더 있다. 북위 제9대 황제인 효명황제와 궁빈(宮嬪) 반외련(潘外憐)의 딸이 있었다. 할머니인 영태후가 자신의 아들인 효명제를 독살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 528년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손녀를 효명제의 아들이라고 속여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영태후는 하루 만에 폐위시키고 다른 손자 원조를 황제로 옹립하였다. 여자 황제의 최초이지만 사가들은 인정을 하지 않는다. 또 당나라 시절 농민 반란군의 여성 지도자 진석진(陳碩眞)이 있었다. 그녀는 목주(睦州) 출신으로, 당 고종 재위 기간 즉 무측천이 무소의로 환궁한 후인 653년 10월에 봉기를 일으켜 문가황제(文佳皇帝)를 자칭하고 여러 현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봉기한 지 1개월 만에 당나라의 토벌군에게 격퇴당하고 진석진은 처형되었다. 무측천보다 37년 일찍 여황제를 칭했지만 역사가들은 그녀를 정통 황제로 보지 않는다. 오로지 무측천 혼자만 후궁, 황후, 황태후, 황제, 태상황제를 모두 역임하여 전무후무한 존재다.

측천무후와 꽃 중의 꽃인 모란꽃에 얽힌 전설이 하나 있다. 모란은 고래(古來)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만큼 문학 작품 등에서 다양한 이명(異名)으로 불리었다. 목작약(木芍藥), 화왕(花王)·백화지왕(百花之王)·부귀화(富貴花)·부귀초(富貴草)·천향국색(天香國色)·낙양화(洛陽花)·상객(賞客)·귀객(貴客)·화신(花神)·화사(花師)·화사부(花師傅) 등 모두 최고의 찬사를 담은 이름들이다. 그중 낙양화(洛陽花)는 낙양(洛陽)에서 핀 모란이 가장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민간에는 구전(口傳)되는 이런 전설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측천무후가 어느 겨울에 꽃들에게 다음과 같은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내일 아침 상원(上苑)에 놀러 갈 테니 너희들은 늦지 말고 모두 꽃을 피워라.”이런 여황제의 명령을 나무판에 써서 걸어두자, 거짓말처럼 다음 날 아침 모든 꽃이 일제히 피어났다. 그런데 오직 꽃 중의 왕인 모란만이 측천무후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불을 때서 억지로라도 꽃을 피울 것을 명령했지만 모란은 꽃을 피우지 않았다. 이에 화가 잔뜩 난 측천무후가 상원(上苑)의 모란을 모두 뽑아 낙양으로 보내도록 했다. 이때부터 모란을 낙양화로 부르게 되었고, 그때 불에 그을린 모란의 줄기가 검은색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북송(北宋) 때 문인 구양수(歐陽脩)의 <낙양목단기(洛陽牧丹記)>에는 측천무후 이후에 낙양에 모란이 흥성하게 되었다(武则天以后 洛阳牡丹虽也兴盛)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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