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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May 05. 2022

(2) 나라를 기울게 하는 미녀 - 말희

★ 18禁  역사 읽기 ★ (220505)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임금이 미모에 혹(惑)하여 나라가 망하는지도 모를 만큼 매우 뛰어난 미녀 말한다. 이 말은 <한서(漢書)> 이부인열전(李夫人列傳)에 나오는 고사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한다. 중국 한무제(漢武帝) 때 협률도위(協律都尉 : 음악을 관장하는 벼슬)로 있던 이연년(李延年)은 노래 솜씨는 물론 작곡과 춤, 시에도 뛰어난 실력자였다. 어느 날 무제 앞에서 춤을 추며 자기 누이동생을 자랑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가인가(佳人歌)〉를 불렀다.

북쪽에 아름다운 여인 있다네(북방유가인 : 北方有佳人)

세상과 떨어져 홀로이 서있네(절세이독립 : 絶世而獨立)

한 번 돌아보면 성이 기울고(재고경인성 : 一顧傾人城)

다시 돌아보면 나라가 기우네(재고경인국 : 再顧傾人國)

성과 나라가 기울지 어찌 모르리오만(녕부지경성여경국 : 寧不知傾城與傾國)

아름다운 여인을 두 번 다시 얻기 어렵다네(가인난재득 : 佳人難再得)

그러자 한무제가 그의 여동생을 취하여 후궁인 이부인으로 삼아 총애를 받으면서 아들 창읍왕(昌邑王)을 낳았다. 그 공로로 작은 오빠 이광리가 이사장군(貳師將軍)이 되어 서역과 흉노를 정벌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장수 이릉(이릉이 적국에 항복하자 사마천이 이를 변호하다가 무제로부터 궁형(宮刑)을 받게 된 것이다. 가사의 내용처럼 이연년의 동생 이부인은 미녀였지만 나라를 위태롭게 하지는 않았고 젊은 날 일찍 사망하였다.

<중국의 4대 미녀 : 침어 서시, 낙안 왕소군, 폐월 초선, 수화 양귀비>

다른 일설에는 사마천의 <史記(사기)>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서로 천하를 놓고 다툴 때, 유방의 가족이 항우에게 포로로 사로잡혔다. 이때 후공(侯公)이라는 변사가 항우를 설득하여 유방과 화친을 맺는 조건으로 인질로 잡고 있던 유방의 가족들을 풀어주게 했다. 이 일로 인하여 항우는 기울고, 유방은 위기를 넘겼다. 그래서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후공은 참으로 천하의 변사로, 그의 변설(辯舌)은 나라를 기울일 수 있겠다고 평했다. 이에 유방은 후공(侯公)의 공을 인정하여 경국(傾國)의 반대말인 평국(平國)이라는 글자를 따서 그에게 평국군(平國君)이라는 작위를 주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나라를 기울게 만들지도 모를 매우 뛰어난 미녀를 경국지색으로 일컬었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에는 왕이나 황제가 미인에 혹하여 나라가 기우뚱한 경우는 많다. 포락지형(炮烙之刑)으로 유명한 상(은)나라 주왕(紂王)은 미녀 달기(妲己)에 빠져 나라를 잃었고, 주나라 유왕(幽王) 또한 미인 포사(褒姒) 때문에 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그 외에도 미인 서시(西施)는 월왕 구천이 원수를 갚기 위해 미인계로 보냈는데, 이를 눈치 채지 못한 오왕 부차(夫差)가 그 미모에 빠져 목숨과 나라를 동시에 잃고 말았다. 양귀비는 당나라 현종이 정사(政事)는 돌보지 않고 정사(情事)에만 빠지게 만들어 나라를 위태롭게 한 경국지색이 분명하다.

<포락지형 : 기름 바른 구리 기둥을 불에 달구는 중>

중국 역사 중 가장 태평성대라는 요순시대를 지나서, 하(夏)나라는 치수(治水)의 달인 우왕(禹王)이 세워 걸왕(桀王)까지 17대의 472년간 지속되었다. 우왕 이전에는 왕위를 세습하지 않고 적임자에 물려주는 선양(禪讓) 제도였으나 우왕부터 아들 계(啓)에게 세습했다. 하나라의 마지막 임금 걸왕도 원래부터 폭군은 아니었고 지략과 용맹을 겸비한 군왕이었다. 그런데, 지략보다 용맹이 더 승했는지 점차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성질 또한 개떡같이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최고 권력자가 국정과 주변 제후국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으면 더 이상 성취할 게 없어서 마지막으로 빠져드는 것이 한 곳이 있다. 그게 바로 여자 즉 미인과 향락의 세계인 것이다. 그는 여자를 무척 밝혀서 3만명의 후궁을 두고도 성에 안차서 더 섹시한 여자를 찾는데 혈안이 있었다고 야설에 전한다. 이런 임금을 쉽게 보필하는 사람은 대충 간신이고, 어렵게 보필하는 사람은 충신일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임금에게나 간신은 존재하는데, 그를 분별해 내는 것이 군왕의 바른 눈이다. 비위 맞추기 귀신인 간신 조량(趙梁)이 그런 걸왕에게 “유시국(有施國)에 천하제일의 미녀가 있으니 그녀를 취하시면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꼬드겼다. 그러자 걸왕이 유시국의 왕 유시씨에게 미녀를 요구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완전히 꼭지가 돌아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오른 걸왕이 유시국을 무참하게 징벌하러 나섰다.


천자국인 하나라와 제후국인 유시국의 싸움은 초장부터 게임이 안 되어 유시국은 순식간에 초토화된다. 급기야 유시국은 항복을 하거나, 하나라 걸왕의 모든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다. 목숨이 명재경각(命在頃刻)에 달린 유시씨가 벌벌 떨고 있을 때, 짜잔하고 등장한 미녀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중국 최초의 경국지색 말희(妺喜)였던 것이다. 달나라 월궁의 항아(姮娥) 같은 미녀 말희가 “소첩이 이 한 몸을 걸왕에게 바쳐 이 나라를 구하고자 하옵니다.”라고 아뢰니, 군왕과 모든 대신들의 눈과 귀가 화들짝 놀랐다. 절세미인이 얼굴만 고운 게 아니라 나라를 위한 충정 또한 높고 깊으니 모두들 할 말을 잊은 것이다. 사내랍시고 큰소리만 쳤지, 나라 하나 제대로 건사 못하는 꼴에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야사에 말희의 미모는 검고 윤기 나는 긴 머리칼을 가지고 있고, 그 머리가 달걀 모양으로 얼굴을 감싸며, 걸음걸이는 가는 허리와 봉긋한 엉덩이를 나비처럼 살랑살랑 흔들어서 보는 이의 애간장을 녹였다고 한다. 피부는 우유 같이 하얗고, 윗입술은 가늘고 아랫입술은 도톰하여 물고 싶은 정이 듬뿍 들었다고 했다.


아무튼 유시씨가 진상한 말희를 보자마자 단박에 뻑 간 걸왕은 유시국의 모든 죄를 사면한다면서 그녀를 데리고 부리나케 철수하였다. 그날로부터 걸왕은 3만명이든 5만명이든 다른 여인들은 찬밥 신세로 쳐다보지도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허구한 날 밀실에 쳐 박혀 먹고, 마시고, 뒹굴면서 국정은 아예 헌신 차 버리듯이 멀리한다. 이쯤 되면 말희가 미인계나 미인 스파이계의 원조일 것이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파리의 물랭루주에서 댄서로 일하던 독일 스파이 마타 하리(Mata Hari), 영국의 국방장관 존 프러퓨모(John Profumo)를 실각시킨 콜걸 출신 크리스틴 킬러(Christine Keeler), 중국 출신의 일본판 마타 하리인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 조선의 요화(妖花) 배정자는 말희를 대선배로 모셔야 할 듯.

<마타하리 영화 중 한 장면>

말희의 비단결 같은 육체와 정신을 세뇌(洗腦)시키는 요염함에 포로가 된 걸왕은 말희가 원하는 것은 무조건 들어준다. 조국의 원수를 갚고자 자원한 말희의 입장에서는 걸왕에게 아양을 떨면서 무엇이든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겠다. 말희가 심심하다고 하자, 있는 궁녀 이외에 추가로 3천명의 미녀를 더 선발해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혀 노래와 춤을 하도록 했다. 미녀 징발령이 내리자 나라 안은 창졸지간(倉卒之間)에 어여쁜 딸을 징발당한 부모들의 탄식이 이어졌고, 결혼 상대가 없어진 애꿎은 총각들의 자살률이 높아졌다나 뭐라나? 고운 옷을 만드는데 드는 비단을 짜는 백성들의 원성이 고조되건 말건 걸왕과 말희의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유희는 끝 간 데를 모르고 치닫는다. 낮밤을 번갈아 노는 게 귀찮아서인지 아예 긴 밤을 놀기 위해 장야궁(長夜宮)을 지었다. 말희는 갈수록 점점 더 고난도 주문을 한다. 주지육림(酒池肉林)에서 놀고 싶다고 하자, 걸왕은 어화원(御花园)에 수 천명의 노예를 동원하여 제꺼덕 만든다. 걸왕이 비밀을 유지하려고(?) 설계자와 설계도를 없애서 정확하지는 않으나, 주지육림이 어떻게 생겼냐 하면 대강 이러했다. 요대(瑤臺)라는 옥으로 만든 궁정(宮庭) 한 모퉁이에 커다란 연못을 판 다음, 바닥에 새하얀 모래를 깔고, 연못의 둑은 술지게미로 만들어 향기로운 미주(美酒)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연못 둘레에는 고기(肉)로 동산을 쌓고 포육(脯肉)으로 숲을 만들었다. 걸왕과 말희는 그 못에 호화선을 띄우고, 연못 둘레에는 춤을 추는 3,000명의 미소녀(美少女)들이 신호의 북이 울리면 일제히 소가 물을 마시듯이 연못의 미주를 마시고, 포육의 숲 속을 뛰어다니면서 희희낙락(喜喜樂樂) 즐겼다고 한다.

<주지육림의 환락>

폭군 걸왕은 눈에 넣어도 좋을 애첩 말희를 위해 같이 먹었던 정력요리는 곰 발바닥(웅장:熊掌) 요리라는 야설(野說)도 있다. 중국에서 곰 발바닥 요리 즉 웅장(熊掌)의 재료는 우리나라 백두산(장백산)의 검은 곰 앞발바닥을 최고로 쳤다. 그 이유는 백두산에는 질 좋은 꿀이 많이 생산되는데, 검은 곰들은 벌의 침과 독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곰은 두터운 앞발로 벌집을 부수고 꿀을 핥아먹는다. 더구나 곰은 벌집을 털 때 오른쪽 앞발만 사용하는 버릇이 있어서 무차별 공격해오는 벌떼의 독과 꿀이 고스란히 발바닥으로 침투, 최고의 보양식인 곰 발바닥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란다. 또 다른 학설은 중국에서 곰이 땅굴이나 동굴에서 겨울잠을 자는 걸 준창자(蹲仓子)라고 하는데, 이때 배가 고파서 오른 발바닥을 혀로 핥는데, 타액이 앞발에 흡수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왼발은 주로 자신의 항문 뒤처리에 사용하기 때문에 냄새가 심해서 선호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걷거나 서는데 주로 사용하는 뒷발 바닥은 질기고 단단해서 맛이 떨어지는 것이다. 요리 방법은 갓 잡은 곰의 발을 종이나 헝겊으로 물기나 핏물을 잘 닦아낸 다음, 항아리 바닥에 석회를 깔고, 그 위에 볶은 쌀을 평평하게 덮은 후에 곰발을 놓는다. 그리고 항아리의 빈 공간을 볶은 쌀로 가득 채우고 뚜껑을 석회로 밀봉하여 한두 해 저장해 두면 변질이 안 되면서 잘 건조된다고 한다. 건조된 곰발을 데치듯 약간 삶은 다음, 털을 뽑고 꿀을 발라 다시 약한 불에 한 시간쯤 삶다가 꺼내어 닭고기 국물에 다른 양념재료를 섞어 세 시간쯤 뭉근한 불로 졸인다. 이를 다시 꺼내어 뼈를 발라내고 또 다른 재료를 넣고 함께 쪄내면 바로 저 유명한 웅장요리가 되는 것이다. 가정집에서는 이렇게 복잡하게 가공하여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약식(略式)으로 한다. 곰발에 황토 진흙을 발라 불에 구운 다음 진흙 덩어리를 부수면 가죽과 털은 진흙과 함께 떨어지고 살과 뼈만 남게 되는데, 이것을 갖은양념에 찍어 먹는다.


맹자(孟子)도 곰 발바닥 요리를 좋아했다. 맹자 고자장구상(告子章句上)에 이렇게 되어있다. “물고기도 먹고 싶고 곰 발바닥도 먹고 싶으나, 두 가지를 모두 먹을 수 없을 때에는 물고기보다는 곰 발바닥을 택할 것이다. 목숨을 지키고, 의(義)도 지키고 싶은데 모두를 바랄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할 것이다.(魚 我所欲也 熊掌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 亦我所欲也 義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 맹자의 불가득겸(不可得兼) 즉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을 수 없을 때는 의(義)를 쫓으라는 비유에서 물고기와 곰 발바닥 요리를 비교하여 후세에 귀감을 준 것을 보면 웅장요리가 삼천년 이전에도 진귀하고 오래된 요리임에 틀림이 없다. 실제 곰 발바닥요리가 그리 맛있지는 않고 돼지족발 수준의 쫀득쫀득한 식감(食感)이다. 다만 곰 한 마리 잡아도 오른쪽 발이 하나이다 보니 식재료의 귀함과 조리의 복잡함으로 해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진미로 인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곰 발바닥 요리>

일찍이 공자는 주례(周禮)에서 팔진(八珍) 즉 8가지 진미에 대해 언급하였다. 당시 팔진(八珍)이 무엇 무엇이라고 특정하지 않았으나 후대에 들어와서 연구하고 검토한 끝에 시대별로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굳어졌을 것이다. 주나라 예법서에는 순오(淳熬:쌀밥에 기름장 젓갈), 순모(淳母:기장밥에 기름장 젓갈), 포장(炮牂:통양구이), 포돈(炮豚:통돼지구이), 도진(擣珍:육회), 오(熬:육포), 지(漬:소고시 절임), 간료(肝膋: 간과 지방 구이)로 되어 있다. 춘추전국 시대 이후에는 웅장(熊掌), 성순(猩唇:성성이 입술), 녹근(鹿筋:사슴 힘줄), 표태(豹胎:표범 태반), 이미(鯉尾:잉어 꼬리), 타제(駝蹄:낙타 발굽), 낙봉(駱峰:낙타 혹), 선복(蟬腹:매미 배)으로 되어있다. 당송(唐宋) 시대에는 웅장(熊掌), 성순(猩唇), 녹근(鹿筋), 표태(豹胎), 이미(鯉尾), 용간(龍肝:살모사 간), 봉수(鳳髓:닭 골), 효적(鴞炙:올빼미 구이), 수락선(酥酪蟬:우유에 졸인 매미)으로 구성되어있다. 몽고족인 원나라 때에는 유목민답게 조항(麆吭:노루 목), 타제(駝蹄), 녹순(鹿唇), 타유미(駝乳糜:낙타 젖 죽), 천아적(天鹅炙:백조 구이), 자옥장(紫玉漿:양 젖), 현옥장(玄玉漿:마유주), 제호(醍醐:우유와 갈분 미음)로 되어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곰 발바닥(웅장:熊掌), 코끼리의 코(상비:象鼻), 낙타의 봉(타봉:駝峰), 고릴라의 입술(성순:猩脣), 원숭이의 골(후뇌:猴腦), 표범의 자궁(표태:豹胎), 제비 집(연와:燕窩), 상어 지느러미(사시:鯊翅), 사슴 힘줄(녹근:鹿筋)등이 많이 꼽힌다.


주색잡기(酒色雜技)와 가무(歌舞), 변태 놀이에 금방 싫증이 난 말희가 어느 날 갑자기 비단 찢는 소리가 듣고 싶어 하자 걸왕은 나라 안의 비단을 무더기로 징발한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그 비싼 비단을 마구 찢는다. 비단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가 남성의 성적 호기심을 돋운다는 설은 들어봤다. 하지만 비단 찢는 소리가 여성에게 성적 쾌감을 주는 이유가 뭔지는 도대체 들어본 적이 없다. 참고로 이 비단 찢는 소리를 들으며 쾌감을 느끼는 요녀가 또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바로 주나라 유왕(幽王) 때의 포사(褒姒)이다. 걸왕의 호사스러운 놀이와 극치를 달리는 사치, 산해진미와 계속되는 술판 등으로 국고는 탕진되고,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에 다다르게 된다. 따라서 죽음을 무릎 쓰고 직언을 하던 충신들은 하나 둘 처형당하거나 하나라를 떠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제후국인 상나라의 탕왕이 이윤(伊尹)이라는 걸출한 요리사를 걸왕에게 추천했다. 이 탕왕은 한때 걸왕에게 포로로 잡혀 죽음을 당할 뻔한 적도 있고, 걸왕의 폭정을 타도할 생각도 품고 있었다. 요리사 이윤은 갖가지 기기묘묘한 요리로 걸왕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즉 이윤 또한 걸왕을 산해진미에 젖게 만드는 비밀 임무를 충실히 해낸다. 당연히 이윤과 말희는 배짱이 맞아 걸왕을 위아래로 향락에 젖게 만든다. 사실상 고대에는 요리사가 정치인이었다. 제정(祭政)이 일치된 사회에서 제사장이 통치자 역할을 겸하였고, 제사장은 신께 진상할 제물의 요리를 잘하는 것이 중요한 업무였을 것이다. 이윤이 요리사 겸 탁월한 정치 식견을 갖은 첩자로서 활동한 것이다. 이윤은 말희와 내통·결탁하여 하나라의 정황을 탕왕에게 보고하고 점점 더 국고를 탕진하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이윤의 정치가적 면모는 탕왕을 도와 상나라의 건국과 탕왕이 죽은 후에 섭정을 하다가 탕왕의 손자 태갑(太甲)을 왕위에서 쫓아내고 스스로 왕 노릇을 했다. 실제 노자의 도덕경에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부드럽고 연한 작은 물고기를 삶는 것처럼 해야 한다.(治大國者 若烹小鮮)”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런 흥청망청한 짓거리가 오래 못 가는 건 당연하다. 음행이나 악행이 절정에 도달하면 반드시 응징을 받게 된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분노에 이웃나라들의 항거가 합세하여 40여 개 국 제후들이 탕왕을 우두머리로 하여 하나라를 징벌하기에 이른다. 이때 탕왕이 걸왕을 치기 위한 대의명분과 그의 죄상을 낱낱이 밝힌 그 유명한 주걸고(誅桀誥), 탕세(湯誓)를 발표하고, 중훼지고(仲虺之誥)를 듣는다. 주걸고(誅桀誥)는 탕왕이 하나라의 걸왕의 죄상(罪狀)을 밝히고 이를 징벌(懲罰)한 사실을 만백성(萬百姓)에게 반포(販布)한 것이다. 탕세(湯誓)는 걸왕의 타도 취지와 백성들에 대한 탕왕의 서약이다. 탕왕은 전례가 없었던 무력으로 역성혁명을 하고보니 신하가 임금을 쳐서 옥좌를 강제로 빼앗았다는 도덕적 자괴감이 심했다. 즉 후세 사람들의 입방아와 당시 백성들이 자신의 행위를 두고 욕을 하지나 않을까 무척이나 걱정을 했다. 그러자 공신인 중훼(仲虺)가 탕왕에게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말한 것이 중훼지고(仲虺之誥)이다. 일찍이 요(堯)임금 – 순(舜)임금 – 우(禹)임금 순으로 제왕의 자리를 선양한데 반해 자기는 무력으로 왕위를 뺏어 부끄럽게 생각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중훼가 “하나라의 걸왕은 덕이 없었기에 백성이 진흙 구덩이에 빠지고, 숯불에 타는 꼴인 즉 도탄(塗炭)에 빠졌습니다. 하늘이 곧 탕왕에게 우왕의 옛 나라를 계승토록 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여기서 백성이 도탄(塗炭)에 빠진다라는 말이 탄생한다.


하나라가 망하기 전에 중국사에 최초로 기록된 충신 관용봉(關龍逢)이란 신하가 있었다. 그는 걸왕에게 꾸준히 나아가 직언을 하였으나 그가 듣지 않았다. 그래서 우임금이 황하 치수를 위해 고생한 일들을 그림으로 그린 황도(黄图)를 만들어서 선조께서 어떻게 세운 나라이고 지금의 실정은 어떤지 간곡하게 아뢨다. 우임금의 황하 치수와 도산에서 부족장 대회를 연 것, 치수를 위해 산을 깎을 때 자기 집 앞을 세 번이나 지나치면서 한 번도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했다.(大禹治水, 涂山大会, 三過家門而不入) 그러나 걸왕이 그를 죽여 버렸다. 하나라는 결국 제후인 탕에게 나라를 빼앗겼다.하나라가 천명을 잃었으니 탕이 새롭게 명을 받들다(夏失天命 湯革復命)는 구절의 두 자를 따와서 혁명이라 용어가 되었다. 걸왕으로 인하여 도탄과 혁명이란 말이 생겨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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