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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Feb 10. 2024

32> 采蓮曲(채련곡) / 연밥 따는 노래

漢詩工夫 (240208)

采蓮曲(채련곡) / 연밥 따는 노래

 - 賀知章(하지장)


稽山罷霧鬱嵯峨

계산파무울차아

○○●●●○◎

회계산에 안개 흩어지니 울창한 산 높고 높네,


鏡水無風也自波。

경수무풍야자파

●●○○●●◎

경호(鏡湖)의 물은 바람 없이도 절로 물결치네.


莫言春度芳菲盡

막언춘도방비진

●○○●○○●

봄이 지나 꽃다운 향기 다했다 말하지 마세요.


別有中流采芰荷

별유중류채기하

●●○○●●◎

중류에는 마름과 연밥 따는 곳 별도로 있다네.

采蓮曲之見於絶句及律詩(채련곡지견어절구급율시)와 長篇者(장편자)이 不爲不多而詞各不同(불위부다이사각부동)하니, 此(차)는 言峨嵯之稽山(언아차지계산)이 出於半天(출어반천)하니 高大之象(고대지상)을 可觀(가관)이오. 下有鏡水(하유경수)하야 無風而自波(무풍이자파)하니 浩蕩平穩之勢(호탕평온지세)가 亦可玩(역가완)이라. 乃言三春紅綠之景(내언 삼촌홍록지경)이 今已盡謝(금이진사)하고, 炎夏之節(염하지절)이 方將屆出(방장계출)하니 莫言芳菲盡也(막언방비진야)하라. 芰荷滿於綠水則其采之之事(기하만어녹수즉기채지지사)가 別作淸致耳(별청치이)라.

채련곡이 절구, 율시와 장편에 보이는 것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말은 각각 같지 않으니, 이는 높이 솟은 회계산이 하늘에 반쯤 솟아, 높고 큰 형상을 가히 볼만하다고 말한다. 아래에는 경수호가 있어서 바람이 없어도 스스로 파도가 일어나니 넓고 평온한 형세가 또한 놀만하다. 이에 말하기를 봄 세 달의 홍록 경치가 이제 이미 다하여 물러가고, 뜨거운 여름이 막 나와서 이르니 꽃다운 향기가 다했다고 말하지 말라. 마름과 연꽃이 푸른 물에 가득하면 그것을 따는 일이 별도로 맑은 운치가 된다.

先言山水之勝(선언산수지승)하고 後言采蓮之事(후언채련지사)하니, 吳姬越女(오희월녀)가 相與語曰春色之盡(상여어왈춘색지진)을 何足道哉(하족도대)아. 見今江湖之上(금견강호지상)에 蓮花(연화)가 盛開則牽花憐共蒂(성개즉견화련공체)하고, 折藕愛蓮絲(절우애련사)면 豈非可樂者耶(기비가락자야)아?

먼저 산수의 빼어남을 말하고, 뒤에 연 따는 일을 말하였으니, 오나라 여인과 월나라 여자가 서로 말하기를 “봄빛이 이미 다하였으니 어찌 말할 게 있겠는가?” 지금 강과 호수 위에 연꽃이 왕성하게 피어 있은 즉, 꽃을 당기니 꼭지가 가련하고, 연뿌리는 끊겨도 연실로 이어진 사랑을 보노라면, 어찌 즐길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采蓮曲(채련곡) : 채련곡은 원래 옛날 중국 남방에서 연밥을 따면서 부르던 민요로서 남녀 간에 상사()의 정을 읊은 노래이다. 후대의 문인들은 연밥 따는 노래를 통하여 남녀 간의 사랑을 그렸던 것이다. 이와 같은 채련곡은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염정시()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

稽山(계산) : 중국 저장성 샤오싱현에 있는 회계산이다. 본래는 모산(茅山) 또는 동산(棟山)으로 불렸다.  BC 5세기 초 이곳에서 월왕(越王) 구천(勾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 포위되어 패하였다가 20년의 신고(辛苦) 끝에 부차를 격파하여 ‘회계(會稽)의 치욕’을 설욕하였다는 고사로 유명하다.

罷霧(파무) : 안개가 걷히다.

嵯峨(차아) : 산이 높이 솟은 모습

鏡水(경수) : 월주(越州, 지금의 소흥시)에 있는 경호(鏡湖)이다. 감호(鑑湖)라고도 한다. 경호(鏡湖)는 매우 커서 동호(東湖)·남호(南湖)·장호(長湖)로 구분된다. 글자 그대로 거울 같이 맑고 조용한 물로 해석될 수도 있으나, 회계산과 대비되는 경호의 모습을 보고 지은 것이다.

也(야) : 강조 표시의 부사. ~도(七八歲的孩子~學習漢字 : 7~8세의 아이도 한자를 배운다.)

度(도) :  渡(건널 도)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

菲(비) :  엷을 비, 향초비, 향기가 짙음 

芰(기) :  마름 기

하지장(약 659-744) : 자는 계진(季眞), 호는 사명광객(四明廣客), 월주영흥(越州永興, 지금의 항저우시 샤오산구) 사람이다. 당나라 무측천증성(武则天證聖) 원년(695)에 진사(進士)에 장원급제하여 여정전서원(丽正殿書院)에 들어가 수서(修書)를 짓고, 《육전(六典)》과 《문찬(文纂)》을 지은 후에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옮기고 비서감을 누천 하여 하감(贺監)이라 하였다. 사람됨이 활달하여 '청담풍류'라는 평판이 있다. 당 천보 3년(744년)에 고로환향하여 도사가 되었다. 하지장은 장약허(張若虚), 장욱(張旭), 바오융(包融)과 함께 '오중사사(吳中四士)'로 불렸다. 《전당시》에는 시 19수가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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