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남편을 원정 보낸 부인의 노래다. 閨中少婦(규중소부) 4글자가 하나의 시의 주인이 된다. 젊은데도 婦(부)라 하였으니 그 자신이 남편이 있음을 알겠고, 부인인데 젊다고 하였으니 이별의 수심이 아직은 얕은 것이다. 젊은 부인이 나이가 어려 수심이 괴로움이 됨을 알지 못하고, 또 아직 사람과 접촉이 없었다. 凝粧(응장)이란 황분을 이마에 바른 것이니, 바로 여아의 모양을 꾸민 것이다. 젊은 부인이 규문을 나오지 않다가 이제 봄날을 맞아 이같이 꾸몄으니 이는 스스로 일찍 살펴 착용하니, 규방의 여인이 아니다. 누각에 오른 것은 장차 멀리 바라보려는 게 있다.
반드시 성대하게 꾸민 다음에 취루에 오른 것은 바로 그가 근심하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見(견)은 누각 머리에서 멀리 바라보는 것이다. 忽見(홀견)이란 갑자기 눈을 붙여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놀라는 것이다. 젊은 부인의 깊은 번민과 정회를 모두 버들 색이라는 구절에 의해 움직이도록 했으니, 그렇다면 버들 색을 보지 않았더라면 봄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남편이 종군한 것은 벼슬에 봉하는 계획의 취함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날 이미 가도록 하였으니, 지금 길머리에서 봄빛을 보고는 남편이 한번 떠난 뒤 소식 없음을 느끼고, 떠난 뒤 오지 않을 줄 진작 알았더라면 어떻게 애당초에 남편에게 가지 못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후회한 것이다.
왕창령(698~757) : 자 소백(少伯). 강령(江寧)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 출신. 727년 진사에 급제하여 비서성 교서랑(秘書省校書郞)이 되었고, 734년 박학굉사(博學宏詞)의 시험에 합격하여 범수(氾水)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성고현(成皐縣)의 위(尉)가 되었다. 그러나 소행이 좋지 못하다 하여 강령의 승(丞), 다시 용표(龍標)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검양(黔陽)의 위(尉)로 좌천되었다. 왕강령 ·왕용표로 불리기도 하는 것은 그 임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자사(刺史)인 여구효(閭丘曉)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시는 구성이 긴밀하고 착상이 청신하며, 특히 칠언절구에서 뛰어난 작품이 많다. 여인의 사랑의 비탄을 노래한 《장신추시(長信秋詩)》 《규원(閨怨)》, 변경의 풍물과 군인의 향수를 노래한 《출새(出塞)》 《종군기(從軍記)》가 유명하다. 시집 《왕창령 전집》(5권)과 그의 저술로 전하여지는 시론서 《시격(詩格)》 《시중밀지(詩中密旨)》 각 1권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