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부의 글이니 반첩여를 위한 노래이다. 서궁은 태후가 거처하는 곳이다. 이때에 반첩여가 총애를 잃고 태후를 받들었기 때문에 역시 서궁에 살았다. 군왕이 오지 않음으로 밤이 고요하고, 고요하기 때문에 주렴 밖으로 온갖 꽃의 향기를 맡으니 더욱 사람의 마음을 동하게 한다. 주렴을 걷으려 한 것은 꽃향기와 달빛에 감동받기 위함인데, 주렴을 걷으려 한 것은 오히려 마음의 감동으로 걷지 못하였다.
봄의 한이 긴 것은 춘한이 한창 길어지기 때문에 주렴을 걷으러 갈 힘이 없었다. 주렴을 걷으러 가지 않고 이에 가서 운화의 비파를 안고서, 안고 있기만 하고 연주하지 않았으므로 빗겨 안고 지그시 주렴 밖의 달을 보니, 이는 수심이 쌓인 정경이 아닐 수 없다. 달이 주렴 밖에 있으므로 지그시 바라봤다고 하였다. 소양궁은 조소의(趙飛燕)같이 총애를 얻은 자가 사는 곳이다. 지금 주렴을 따라 밖으로 달을 바라보니 마치 몽롱하게 나무 색이 은은히 소양궁에 드러나 있는 것 같으니, 다만 속마음으로 인하여 생각이 소양궁에 다다라 원망하고 한탄하므로 보이는 것이 모두 소양궁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王昌齡(왕창령698-755) : 자 소백(少伯). 강령(江寧)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 출신. 727년 진사에 급제하여 비서성 교서랑(秘書省校書郞)이 되었고, 734년 박학굉사(博學宏詞)의 시험에 합격하여 범수(氾水)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성고현(成皐縣)의 위(尉)가 되었다. 그러나 소행이 좋지 못하다 하여 강령의 승(丞), 다시 용표(龍標)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검양(黔陽)의 위(尉)로 좌천되었다. 왕강령 ·왕용표로 불리기도 하는 것은 그 임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자사(刺史)인 여구효(閭丘曉)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시는 구성이 긴밀하고 착상이 청신하며, 특히 칠언절구에서 뛰어난 작품이 많다. 여인의 사랑의 비탄을 노래한 《장신추시(長信秋詩)》 《규원(閨怨)》, 변경의 풍물과 군인의 향수를 노래한 《출새(出塞)》 《종군기(從軍記)》가 유명하다. 시집 《왕창령 전집》(5권)과 그의 저술로 전하여지는 시론서 《시격(詩格)》 《시중밀지(詩中密旨)》 각 1권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