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長信秋詞(장신추사) : 악부(樂府) 《상화가(相和歌)》의 〈초조곡(楚調曲)〉으로, 장신원(長信怨)이라고 되어 있는 본도 있다. 모두 다섯 수인데, 여기에 실린 작품은 세 번째 수이다. 장신국(長信宮)은 한(漢) 나라 때의 궁전 이름으로, 태후(太后)가 거처하던 곳이다. 한(漢) 나라 성제(成帝) 때 반첩여(班婕妤)는 조비연(趙飛燕) 자매가 입궁하자 황제의 총애를 잃고, 혹시 모함당할까 두려워하여 장신궁에서 태후를 봉양하기를 구하였다.
* 奉箒(봉추) : 비를 잡고 청소한다는 의미로 비빈(妃嬪)이 총애를 잃은 것을 이른다. 반첩여(班婕妤)가 총애를 잃고 지은 부(賦)에 “동궁에서 받들어 봉양함이여, 장신궁의 말류에 의탁하였네. 휘장 안에 물 뿌리고 쓸어냄이여, 영원토록 죽을 때까지 하리라.(奉供養於東宮兮 託長信之末流 共洒掃於帷幄兮 永終死以爲期)”라는 구절이 있다. 또 오균(吳均)의 〈行路難(행로난)〉에도 “반첩여(班婕妤) 총애 잃어 얼굴을 못 펴고, 비 들고 장신대(長信臺)를 받드네.(班姬失寵顔不開 奉帚供養長信臺)”라는 구절이 있다.
* 平明(평명) : 동이 틀 무렵을 말한다.
*金殿(금전) : 궁전을 뜻한다.
*團扇(단선) : 둥근 부채. 반첩여의 〈怨歌行(원가행)〉에 “가지런한 흰 비단 새로 끊어 오니, 깨끗하기 서리 같고 눈 같도다. 마름질하여 합환선(合歡扇) 만드니, 둥글고 둥긂이 밝은 달 같구나. 그대 품속을 들고 나며, 미풍을 일으킨다네. 늘 두려운 것은 가을철 이르러,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빼앗아 가면 상자 안에 버려져, 은정(恩情)이 중도에 끊기는 것이라네.(新裂齊紈素 晈潔如霜雪 裁爲合歡扇 團團似明月 出入君懷袖 動搖微風發 常恐秋節至 涼飇奪炎熱 棄捐篋笥中 恩情中道絶)”라고 하였다. 즉 둥근 부채가 가을이면 버림받는다는 것으로 자신의 처지를 비유한 것이다.
* 昭陽宮(소양궁) : 한(漢) 나라 때의 궁전으로, 성제(成帝)의 총애를 받던 조비연(趙飛燕) 자매가 거처한 곳이다. 궁이 동쪽에 있어, 갈까마귀가 동쪽의 해를 받고 오므로 자신이 그만 못하다고 여긴 것이다.
* 日影(일영) : 해 그림자로 임금의 은총을 비유하는 말이다.
* 반첩여(班婕妤) : 첩여 반씨(婕妤 班氏 B.C 48~2)는 한 성제의 후궁이며 유명한 시인이었다. 이름은 반염(班恬)이다. 함양령 반념구의 딸이며, 반표(班彪)의 고모이고, 반고(班固), 반초(班超), 반소(班昭)의 고모할머니이다. 반씨는 처음에 입궁하여 비교적 지위가 낮은 소사(少使)에 머물다가 총애를 받아 금방 첩여(婕妤)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성제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죽고 말았다. 반첩여는 초기에는 매우 총애를 받는 후궁이었으나, 젊고 아름다운 조비연(趙飛燕)과 그 여동생이 후비로 입궁하면서 점점 실총(失寵)하게 된다. 조비연 자매는 그녀와 허황후(許皇后)를 제거하기 위해 성제에게 허씨와 반씨가 후궁들과 성제를 저주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이 때문에 허황후는 폐위되었다. 반첩여도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결백을 주장하여 결국은 혐의가 풀리고 금까지 하사 받았다. 혐의는 풀렸지만 반첩여의 신세는 그 옛날 총애를 한 몸에 받던 때와 같지 않았다. 결국 또다시 모함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반첩여는 자신을 귀여워하던 왕정군 태후를 모신다는 이유로 궁을 나가 장신궁(長信宮)으로 떠나버렸다. 반첩여는 장신궁에 머물며 자도부(自悼賦), 도소부(搗素賦), 원가행(怨歌行) 등 세 편의 시를 지었는데 그중에 원가행만이 오늘날까지 전한다.
빗자루를 들은 것은 장신궁을 물 뿌리고 쓸려함이다. 金殿(금전)이 열린다는 것은 새벽에 일어나 물 뿌리고 쓸 적에 궁궐문이 비로소 열린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장신궁에 봉양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므로 어찌 버림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 둥근 부채와 더불어 가을이 지나면 버려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므로 무료한 때에 또 이 부채를 잡고 놀면서 때때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근심이 함께 몰려온다.
이때에 반첩여가 스스로 옥 같은 얼굴을 돌아보고, 스스로 가련하고 애석하여 까마귀 색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 탄식한 것은 그 뜻이 전부 아래 구절에 있다. 소양궁의 해 그림자는 군왕의 총애의 빛이니, 저 까마귀가 오히려 가까이 은총의 광명을 얻어 여색을 더하나 나는 또한 그 같지 못하여 감히 까마귀를 원망하지도 못하고, 다만 원망하는 나의 안색이 일찍이 까마귀의 만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원망하지만 화내지 않는 것은 시인의 온후한 뜻이다.
王昌齡(왕창령698-755) : 자 소백(少伯). 강령(江寧)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 출신. 727년 진사에 급제하여 비서성 교서랑(秘書省校書郞)이 되었고, 734년 박학굉사(博學宏詞)의 시험에 합격하여 범수(氾水)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성고현(成皐縣)의 위(尉)가 되었다. 그러나 소행이 좋지 못하다 하여 강령의 승(丞), 다시 용표(龍標)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검양(黔陽)의 위(尉)로 좌천되었다. 왕강령 ·왕용표로 불리기도 하는 것은 그 임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자사(刺史)인 여구효(閭丘曉)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시는 구성이 긴밀하고 착상이 청신하며, 특히 칠언절구에서 뛰어난 작품이 많다. 여인의 사랑의 비탄을 노래한 《장신추시(長信秋詩)》 《규원(閨怨)》, 변경의 풍물과 군인의 향수를 노래한 《출새(出塞)》 《종군기(從軍記)》가 유명하다. 시집 《왕창령 전집》(5권)과 그의 저술로 전하여지는 시론서 《시격(詩格)》 《시중밀지(詩中密旨)》 각 1권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