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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Apr 10. 2024

49> 春宮曲(춘궁곡) / 봄 궁궐의 노래

漢詩 工夫 (240403)

春宮曲(춘궁곡) / 봄 궁궐의 노래

 - 王昌齡(왕창령)


昨夜風開露井桃

작야풍개로정도

●●○○●●◎

어젯밤 봄바람에 우물가 복사꽃 피고


未央前殿月輪高

미앙전전월륜고

●○○●●○◎

미앙궁전(未央宮殿) 앞에는 둥근달이 높이 떴네.


平陽歌舞新承寵

평양가무신승총

○○○●○○●

평양공주의 가무녀(歌舞女)가 새로이 은총 입어


簾外春寒賜錦袍

렴외춘한사금포

○●○○●●◎

주렴 밖 봄추위에 비단옷 내렸다네.

* 春宮曲(춘궁곡) : 〈長信秋詞(장신추사)〉‧〈西宮春怨(서궁춘원)〉‧〈西宮秋怨(서궁추원)〉 등의 시와 더불어, 군주에게 받는 총애의 무상(無常)함과 버려진 이의 슬픔‧원망‧고독함 등을 드러낸 시 가운데 하나이다.

* 露井(노정) : 지붕이 없는 우물.

* 未央(미앙) : 미앙궁(未央宮)으로 한나라의 고조(高祖) 때 소하의 설계로 지어서 혜제(惠帝)부터 평제(平帝)까지 사용했다.

* 平陽歌舞(평양가무) : 漢武帝(한무제)의 왕비 陳氏(진씨)는 10여 년간 자식이 없었다. 武帝(무제)가 灞水(파수) 가에서 제사를 올리고, 귀로에 여동생인 平壤(평양) 공주의 집에 들렀다. 공주는 양가의 규수 10여 명을 곱게 단장시켜 데리고 있으면서 항상 시중들게 했다. 황제는 눈길도 주지 않았으나 주연이 시작되어 歌姬(가희) 衛子夫(위자부) 만이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 공주는 위자부를 궁중으로 보냈다. 그녀가 뒤에 아기를 낳아서 무사황후 위씨(武思皇后 衛氏)가 되었다. <해설에는 가무녀가 이연년의 여동생으로 되어 있지만, 중국의 역사서나 이 시에 대한 분석에서도 대부분 위자부 즉 위황후로 특정하고 있다.>

昨夜二字(작야2자)는 冒一章(모일장)하니 乃追溯之詞也(내추소지사야)라. 桃生露井上(도생노정상)하야 得春風之披拂(득춘풍지피불)하야, 始開(시개)하야 以興宮人之承恩寵者(이흥궁인지승은총자)라. 桃開則夜暖(도개즉야난)하고 月高則夜深(월고즉심야)하니, 春宮夜宴而被澤者(충궁야연이피택자)가 何人哉(하인재)오. 蕭何(소하)가 治未央宮(치미앙궁)할새 立東闕北闕(입동궐북궐)하야 前殿(전전)은 武庫大倉(무고대창)이니 周廻二十八里(주회28리)라.

昨夜(작야)라는 두 자가 한 장을 덮으니, 바로 거슬러 추억하는 말이다. 복숭아가 우물가에 자라서 봄바람을 얻어 흔들리며 처음 꽃이 피기 시작해, 궁인이 은총을 받음을 일으킨 것이다. 복숭아꽃이 피니 즉 밤이 따뜻하고, 달이 높이 뜨니 밤이 깊고, 봄 궁궐의 밤 연회에 은택을 입은 자가 누구인가? 소하가 미앙궁을 지을 적에 동궐과 북궐을 세우고, 궁전 앞에는 무기고의 큰 창고가 있었으니, 둘레가 28리다.

漢武帝幸平陽主家(한무제행평양주가)하야 悅善歌舞者李延年女弟(열선가무지이연년녀제)하야, 召見之(소견지)하니 實妙麗善舞(실묘려선무)라. 得幸(득행)하니 卽李夫人也(즉이부인)라. 恩寵(은총)이 已極(이극)하야 卽夜宴未寒而忽指以爲簾外春寒(즉야연미한이홀지이위렴외춘한)이라하야 遂以錦袍賜之(수이금포사지)라. 夫歌舞者(부가무자)가 乃安知簾外之春寒乎(내안지렴외지춘한호)아. 不寒而寒(불한이한)하야 賜非所賜(사비소사)하니 失寵者(실총자)가 思得寵者之榮而愈加愁恨故(사득총자지영이유가수한고)로 有此詞也(유차사야)라.

한무제가 평양공주의 집에 거동(幸)하여, 노래와 춤을 잘 추는 이연년의 누이를 기뻐하여 불러서 보니 실로 기묘하고 화려하게 춤을 잘 추었다. 총애得幸)를 얻으니 바로 이부인이다. 은총이 지극하여 곧 밤 연회가 춥지 않다 해도, 홀연히 주렴 밖 봄추위를 위하여 지시하여 마침내 비단 도포를 하사하였다. 무릇 춤추고 노래하는 자가 이에 어떻게 주렴 밖의 봄추위를 알겠는가? 춥지 않음에도 춥다고 하여 하사하지 아니할 것을 하사하였으니, 총애를 잃은 자가 총애를 얻은 자의 영화를 생각하여 더욱 수심과 한을 더함을 알기에 고로 이런 가사가 있는 것이다.


王昌齡(왕창령698-755) : 자 소백(少伯). 강령(江寧)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 출신. 727년 진사에 급제하여 비서성 교서랑(秘書省校書郞)이 되었고, 734년 박학굉사(博學宏詞)의 시험에 합격하여 범수(氾水)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성고현(成皐縣)의 위(尉)가 되었다. 그러나 소행이 좋지 못하다 하여 강령의 승(丞), 다시 용표(龍標)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검양(黔陽)의 위(尉)로 좌천되었다. 왕강령 ·왕용표로 불리기도 하는 것은 그 임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자사(刺史)인 여구효(閭丘曉)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시는 구성이 긴밀하고 착상이 청신하며, 특히 칠언절구에서 뛰어난 작품이 많다. 여인의 사랑의 비탄을 노래한 《장신추시(長信秋詩)》 《규원(閨怨)》, 변경의 풍물과 군인의 향수를 노래한 《출새(出塞)》 《종군기(從軍記)》가 유명하다. 시집 《왕창령 전집》(5권)과 그의 저술로 전하여지는 시론서 《시격(詩格)》 《시중밀지(詩中密旨)》 각 1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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