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남편을 수자리 보낸 여인이 원망하는 노래다. 향기로운 휘장이 바람에 움직여 꽃이 날려 누각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홀연히 남편 생각하는 수심과 한이 더하여 이에 곡조를 높여 쟁을 연주하여 밤 수심을 완화하고 늦추는 계획으로 여기었는데, 관산에 정벌 나가서 구곡간장이 몇 번 끊어져 여전히 말로 풀 수 없다. 어렴풋한 남은 달빛이 주렴의 고리에 내려오니 밤이 이미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는 달을 대함에 근심을 완화하지 못해 잠을 이룰 수 없어 꿈도 또한 꾸지 못하니 그 원한과 슬픈 생각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王昌齡(왕창령698-755) : 자 소백(少伯). 강령(江寧)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 출신. 727년 진사에 급제하여 비서성 교서랑(秘書省校書郞)이 되었고, 734년 박학굉사(博學宏詞)의 시험에 합격하여 범수(氾水)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성고현(成皐縣)의 위(尉)가 되었다. 그러나 소행이 좋지 못하다 하여 강령의 승(丞), 다시 용표(龍標)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검양(黔陽)의 위(尉)로 좌천되었다. 왕강령 ·왕용표로 불리기도 하는 것은 그 임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자사(刺史)인 여구효(閭丘曉)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시는 구성이 긴밀하고 착상이 청신하며, 특히 칠언절구에서 뛰어난 작품이 많다. 여인의 사랑의 비탄을 노래한 《장신추시(長信秋詩)》 《규원(閨怨)》, 변경의 풍물과 군인의 향수를 노래한 《출새(出塞)》 《종군기(從軍記)》가 유명하다. 시집 《왕창령 전집》(5권)과 그의 저술로 전하여지는 시론서 《시격(詩格)》 《시중밀지(詩中密旨)》 각 1권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