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잎과 치마가 녹색으로 서로서로 비춰 한 색 같다. 부용은 또한 연꽃의 별명이다. 꽃빛과 얼굴색이 서로 함께 붉게 비치는 연 따는 여인이 꽃 가운데로 다니므로 양변이 열렸다고 한 것이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은 연 따는 모양이 꽃과 더불어 다르지 않은 고로 여의의 모양과 꽃 같은 얼굴이 이로부터 서로 어지러워 서로 알아볼 수 없었다. 노래 소리를 듣고 사람이 있음을 깨달은 것은 ‘간불견’ 3 자의 뜻에 족하다는 까닭으로써 합당하다.
王昌齡(왕창령698-755) : 자 소백(少伯). 강령(江寧)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 출신. 727년 진사에 급제하여 비서성 교서랑(秘書省校書郞)이 되었고, 734년 박학굉사(博學宏詞)의 시험에 합격하여 범수(氾水)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성고현(成皐縣)의 위(尉)가 되었다. 그러나 소행이 좋지 못하다 하여 강령의 승(丞), 다시 용표(龍標)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검양(黔陽)의 위(尉)로 좌천되었다. 왕강령 ·왕용표로 불리기도 하는 것은 그 임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자사(刺史)인 여구효(閭丘曉)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시는 구성이 긴밀하고 착상이 청신하며, 특히 칠언절구에서 뛰어난 작품이 많다. 여인의 사랑의 비탄을 노래한 《장신추시(長信秋詩)》 《규원(閨怨)》, 변경의 풍물과 군인의 향수를 노래한 《출새(出塞)》 《종군기(從軍記)》가 유명하다. 시집 《왕창령 전집》(5권)과 그의 저술로 전하여지는 시론서 《시격(詩格)》 《시중밀지(詩中密旨)》 각 1권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