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변방 밖으로 나가서 고국을 바라보며 지은 노래다. 백화원의 꼭대기에 올라 서울을 바라본 즉 산천이 굽이굽이 둘러있고 구름과 아지랑이가 가려있어 비록 볼 수는 없으나 서울 생각이 맘속에 맺히어 다만 언덕에 올라 바라볼 뿐이다. 황하의 물을 보니 유유히 흘러가서 다할 기약이 없고, 내 수심의 실마리가 저 물과 더불어 어찌 다르겠는가?
가을이 이미 깊어 광막한 들판에 행인이 막이고 끊기어 눈에 쓸쓸함만 가득하고, 이역에서의 외롭고 고통스러움을 견딜 수 없는데 한필의 말머리가 동쪽에서 오니 누구인지 알 수 없구나! 변방에 있어서 백화에 올라 서울을 바라보고, 황하를 보면서 스스로 탄식하여 누런 모래 흰 풀은 가을바람에 소슬하고, 끝없는 사막에는 행인도 보이지 않는데 홀연히 동에서 오는 말머리를 보고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그러나 적막한 가운데 바라건대 마음에 기쁜 단서가 있기를.
王昌齡(왕창령698-755) : 자 소백(少伯). 강령(江寧)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 출신. 727년 진사에 급제하여 비서성 교서랑(秘書省校書郞)이 되었고, 734년 박학굉사(博學宏詞)의 시험에 합격하여 범수(氾水)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성고현(成皐縣)의 위(尉)가 되었다. 그러나 소행이 좋지 못하다 하여 강령의 승(丞), 다시 용표(龍標)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검양(黔陽)의 위(尉)로 좌천되었다. 왕강령 ·왕용표로 불리기도 하는 것은 그 임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자사(刺史)인 여구효(閭丘曉)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시는 구성이 긴밀하고 착상이 청신하며, 특히 칠언절구에서 뛰어난 작품이 많다. 여인의 사랑의 비탄을 노래한 《장신추시(長信秋詩)》 《규원(閨怨)》, 변경의 풍물과 군인의 향수를 노래한 《출새(出塞)》 《종군기(從軍記)》가 유명하다. 시집 《왕창령 전집》(5권)과 그의 저술로 전하여지는 시론서 《시격(詩格)》 《시중밀지(詩中密旨)》 각 1권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