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송별하면서 지은 것이다. 고향이 파릉의 서쪽에 있어서 강가에서 그대와 만나 술잔을 잡고 서로 권하여 취해도 미혹함에 이르지 않은 것이다. 작은 동생이 이웃 장원에서 아직도 고기를 잡을 것이다. 이제 한 통의 편지를 그에게 붙이고 몇 줄기 눈물이 흐름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첫 구절은 고향의 소재지를 말했고, 둘째 구절은 그대를 만나 취해도 정신은 흐리지 않음을 말했고, 셋째 구절은 동생이 이웃 장원에서 고기 잡는 일을 말했고, 넷째 구절은 편지를 부치며 눈물을 흘린 것을 말했으니 모두 처량한 말이다.
王昌齡(왕창령698-755) : 자 소백(少伯). 강령(江寧)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 출신. 727년 진사에 급제하여 비서성 교서랑(秘書省校書郞)이 되었고, 734년 박학굉사(博學宏詞)의 시험에 합격하여 범수(氾水)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성고현(成皐縣)의 위(尉)가 되었다. 그러나 소행이 좋지 못하다 하여 강령의 승(丞), 다시 용표(龍標)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검양(黔陽)의 위(尉)로 좌천되었다. 왕강령 ·왕용표로 불리기도 하는 것은 그 임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자사(刺史)인 여구효(閭丘曉)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시는 구성이 긴밀하고 착상이 청신하며, 특히 칠언절구에서 뛰어난 작품이 많다. 여인의 사랑의 비탄을 노래한 《장신추시(長信秋詩)》 《규원(閨怨)》, 변경의 풍물과 군인의 향수를 노래한 《출새(出塞)》 《종군기(從軍記)》가 유명하다. 시집 《왕창령 전집》(5권)과 그의 저술로 전하여지는 시론서 《시격(詩格)》 《시중밀지(詩中密旨)》 각 1권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