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할 때에 그리움이 남아서 버리기 어려우므로, 거듭 이별함에 이르렀으니, 바로 이별이 쉽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지금 이에 그 말을 반대로 하여 어렵다 말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거꾸로 떨치는 방법을 써서 아래 글의 형세를 취했다. 이별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오늘 이별하면 내일은 장안일 것이다. 바로 이별이 어렵지 않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가 바로 이별하기 직전에 있음에 어찌 알기가 어렵겠는가? 舟船(주선)이란 두 글자는 위갈석편에서 말한 ‘배가 가기 어렵다.’는 말을 이어서 사용한 것이다.
그대와 작별하고 나면 장안에 그날로 이를 수 있으니, 그렇다면 그대 또한 어째서 꼭 급하게 가는가? 나의 뜻은 그대를 머물게 하여 한번 취하여 오늘의 즐거움을 다하는 데에 있다. 또 그대의 떠나려는 마음이 급할까 걱정하여 이에 오희의 완무의 힘을 빌려 머물게 하니, 그대의 마음은 더욱 급하고, 오희는 더욱 느려 그대가 한번 취하기를 바랄 뿐이니, 그리운 정에 의지하는 것이 매우 깊지 않은가? 취한 뒤에는 정을 잊고, 뜻대로 따라 비록 가을 단풍이 장차 떨어지는 것과 밤이슬이 서로 침노하여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한기가 사람을 맞이한즉 기쁨이 심한 것이다.
王昌齡(왕창령698-755) : 자 소백(少伯). 강령(江寧)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 출신. 727년 진사에 급제하여 비서성 교서랑(秘書省校書郞)이 되었고, 734년 박학굉사(博學宏詞)의 시험에 합격하여 범수(氾水)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성고현(成皐縣)의 위(尉)가 되었다. 그러나 소행이 좋지 못하다 하여 강령의 승(丞), 다시 용표(龍標)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검양(黔陽)의 위(尉)로 좌천되었다. 왕강령 ·왕용표로 불리기도 하는 것은 그 임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자사(刺史)인 여구효(閭丘曉)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시는 구성이 긴밀하고 착상이 청신하며, 특히 칠언절구에서 뛰어난 작품이 많다. 여인의 사랑의 비탄을 노래한 《장신추시(長信秋詩)》 《규원(閨怨)》, 변경의 풍물과 군인의 향수를 노래한 《출새(出塞)》 《종군기(從軍記)》가 유명하다. 시집 《왕창령 전집》(5권)과 그의 저술로 전하여지는 시론서 《시격(詩格)》 《시중밀지(詩中密旨)》 각 1권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