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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Apr 14. 2024

55> 重別李評事(중별이평사) / 이 평사와 다시 작별

漢詩 工夫 (240409)

重別李評事(중별이평사) / 이 평사와 다시 작별하며

 - 왕창령(王昌齡)


莫道秋江離別難

막도추강이별난

●●○○○●○

가을 강에 이별하기 어렵다고 말하지 마오.


舟船明日是長安

주선명일시장안

○○○●●○○

이 배도 내일이면 장안(長安)이라오.


吳姬緩舞留君醉

오희완무유군취

○○●●○○●

오지방 미희의 느린 춤이 취한 그대를 잡겠지만


隨意靑楓白露寒

수의청풍백로한

○●○○●●◎

뜻을 따라도 푸른 단풍에 흰 이슬이 차갑구나.

* 重別(중별) : 한번 이별주를 마셨으나 출발할 때 또 한 번 이별주를 나누는 것.

* 李評事(이평사) : 評事 벼슬하는 李氏(이씨). 왕창령(王昌齡)의 친구로 신상은 불명(不明). 평사(評事)는 당대관직(唐代官職)으로, 조정(朝廷)의 사건담당 사법관(司法官).

* 吳姬(오희) : 吳(오) 지방의 미인. 예부터 오 지방에 미인이 많다고 한다.

* 緩舞(완무) : 느린 리듬의 춤.

* 隨意(수의) : 뜻에 따라

別時(별시)에 留戀難捨(유연난사)하야 以至於重別(이지어중)하니 正視別離不易(정시별리불이)라. 今乃反其詞曰莫道難(금내반기사왈막도난)이라하니 用逆振法(용역진법)하야 以取下文之勢耳(이취하문지세이)라. 不別則已(불별즉이)어니와 今日別(금일별)이면 明日長安矣(명일장안의)라. 正見離別之不難也(정견별리지부난야)라. 然(연)이나 豈知難爲情者(기지난위정자)가 正在未別之前乎(정재미별지전호)아. 舟船二字(주선2자)는 連用魏碣石篇云舟船行難(연용위갈석편운주선행난)이라.

이별할 때에 그리움이 남아서 버리기 어려우므로, 거듭 이별함에 이르렀으니, 바로 이별이 쉽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지금 이에 그 말을 반대로 하여 어렵다 말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거꾸로 떨치는 방법을 써서 아래 글의 형세를 취했다. 이별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오늘 이별하면 내일은 장안일 것이다. 바로 이별이 어렵지 않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가 바로 이별하기 직전에 있음에 어찌 알기가 어렵겠는가? 舟船(주선)이란 두 글자는 위갈석편에서 말한 ‘배가 가기 어렵다.’는 말을 이어서 사용한 것이다.

君旣別(군기별)에 長安(자안)을 卽日可到(즉일가도)니 然則君又何須急行(연즉군우하수급행)고 吾意(오의)는 在留君一醉(재류군일취)하야 以盡今日之歡(이진금일지환)이요. 又恐君去心急促(우공군거심급촉)하야 於是(어시)에 藉吳姬緩舞之力(차오희완무지력)하야 以留之(이류지)하니 君心(군심)은 越急(월급)하고, 吳姬(오희)는 越緩(월완)하야 庶幾可以冀君一醉耳(서기가이기군일취이)니 依戀之情(의연지정)이 不甚深乎(불심심호)아. 醉後忘情(취후망정)하야 隨意所適(수의소적)하니 雖以秋楓之將落(수이추풍지장락)과 夜露之相侵而不覺其寒氣迎人則歡之甚矣(야로지상침이불각기한기영인즉환지심의)라.

그대와 작별하고 나면 장안에 그날로 이를 수 있으니, 그렇다면 그대 또한 어째서 꼭 급하게 가는가? 나의 뜻은 그대를 머물게 하여 한번 취하여 오늘의 즐거움을 다하는 데에 있다. 또 그대의 떠나려는 마음이 급할까 걱정하여 이에 오희의 완무의 힘을 빌려 머물게 하니, 그대의 마음은 더욱 급하고, 오희는 더욱 느려 그대가 한번 취하기를 바랄 뿐이니, 그리운 정에 의지하는 것이 매우 깊지 않은가? 취한 뒤에는 정을 잊고, 뜻대로 따라 비록 가을 단풍이 장차 떨어지는 것과 밤이슬이 서로 침노하여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한기가 사람을 맞이한즉 기쁨이 심한 것이다.

王昌齡(왕창령698-755) : 자 소백(少伯). 강령(江寧)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 출신. 727년 진사에 급제하여 비서성 교서랑(秘書省校書郞)이 되었고, 734년 박학굉사(博學宏詞)의 시험에 합격하여 범수(氾水)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성고현(成皐縣)의 위(尉)가 되었다. 그러나 소행이 좋지 못하다 하여 강령의 승(丞), 다시 용표(龍標)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검양(黔陽)의 위(尉)로 좌천되었다. 왕강령 ·왕용표로 불리기도 하는 것은 그 임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자사(刺史)인 여구효(閭丘曉)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시는 구성이 긴밀하고 착상이 청신하며, 특히 칠언절구에서 뛰어난 작품이 많다. 여인의 사랑의 비탄을 노래한 《장신추시(長信秋詩)》 《규원(閨怨)》, 변경의 풍물과 군인의 향수를 노래한 《출새(出塞)》 《종군기(從軍記)》가 유명하다. 시집 《왕창령 전집》(5권)과 그의 저술로 전하여지는 시론서 《시격(詩格)》 《시중밀지(詩中密旨)》 각 1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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