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관(玉關) : 옥문관(玉門關)으로 한 무제 원정(元鼎) 연간에 수축되었다. 돈황군 용륵현(龍勒縣)에 속함. 서역 지방의 옥석(玉石)이 이곳을 경유하여 내지로 수입되었기 얻어진 명칭으로 옥문도위가 이곳을 다스린다. 서쪽과 북쪽에만 문이 있으며, 북문 밖은 소륵하(疏勒河)이다. 한대(漢代)에는 서역으로 통하는 양대 문호의 하나로서 옥문관을 나서면 실크로드의 북쪽 길에 이어져 거사(車師), 구자(龜玆), 소륵 등의 국가에 통하였다.
이 시는 자신이 장안에서 옥문관에 이르러서 한 말이다. ‘那惜(나석)’은 ‘어찌 아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만리에 떨어진 자가 한 줄의 편지를 보면 어찌 만금뿐이겠는가? 친구가 유독 인정이 없는가? 어찌 이를 아껴 부치지 않는가? 이는 주부를 꾸짖은 것이다. 옥문관을 나와 서쪽을 바라보니, 아득하여 모래바람 부는데 친구의 소식이 아득하여 간장이 끊어질 듯한데, 하물며 세모를 만남에랴. 해와 달이 흐르고 옮겨가 객사에서의 수심이 오히려 견딜 수 없으니 친구는 아는가? 모르는가?
잠삼(岑參, 715년 ∼ 770년) : 당나라의 시인. 강릉[江陵, 지금의 허베이성(湖北省) 장링현(江陵縣)] 사람으로, 선조의 고향이 남양[南陽,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난양시(南陽市)]이다. 본래 명망 있는 관료 집안 출신이었으나 부친 대에 가세가 몰락했다. 따라서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 그의 평생의 염원이었으며, 이를 위해 두 차례에 걸쳐 5년여간 안서(安西)와 북정(北庭) 등의 서부 변경 지역에서 종군하기도 했다. 변경에 있을 때 그곳의 황량한 풍경과 혹독한 기후 환경, 전쟁의 참혹한 모습과 병사들의 고통, 소수민족들의 풍습과 문물 등을 많은 시로 남겨 중국 문학사상 ‘변새시(邊塞詩)’라는 새로운 시의 영역을 확립했으며, 고적(高適)과 더불어 이른바 당대(唐代) ‘변새시파(邊塞詩派)’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으로 추앙받았다. 장편 가행체(歌行體)에 특히 뛰어났으며 7언 절구에서도 좋은 작품을 다수 남기고 있다. 시집으로 ≪잠가주시(岑嘉州詩)≫ 8권이 있으며, 현재 400여 수의 작품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