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도 풍자에 의탁한 시이다. 개울가의 풀빛으로 군자의 삶이 때를 만나지 못함을 비유하였고, 깊은 숲 속에서 꾀꼬리가 우는 것으로 소인이 참소하고 아첨하여 자리를 차지한 것을 꾸짖었다. 봄물이 본래 급한데, 비를 만나서 또한 늦게 밀물의 정취를 당하여 그 급함이 더욱 심하니 때가 늦은 것을 비유한 말이다. 들판의 나루터에 배는 있으나 배 저어 건네줄 사람이 없는 것을 군자가 산림에 숨어 살아 들어 쓸 사람이 없음으로 비유한 것이다.
당나라 위응물은 서울 사람이니 좌사낭중과 소주자사를 지내서 한편 ‘위소주’라고 부른다. <당시합해>에서는 生(생)자를 行(행)자로 고쳤고, 上(상)자를 尙(상)자로 바꾸었다. 서간(西澗)이 그윽하여 향풀이 사랑할 만하여 나 홀로 그를 아껴 산보의 발걸음이 여기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깊은 나무에서 우는 것은 봄이 비록 저물었으나, 아직도 꾀꼬리가 깊은 나무숲 속에서 맴돌며 우니 물정이 연정에 머물러 다 감당한다. 晩來急(만래급)은 이때에 봄물이 범람하여 비 온 뒤의 흐르는 물이 늦게 더욱 급하게 흐른다는 말이다. 배가 절로 비껴있다는 것은 봄비에 나루터 물이 불어 건너는 자가 드물어서 사공 없는 배가 있어서, 물이 불어남으로 인하여 절로 가로 놓이게 되었을 뿐이다. 이것은 우연히 서간의 경치를 읊은 것이요, 꼭 의탁하는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 위응물(韋應物, 737~?) : 경조 장안(京兆 長安) 출생으로 당나라 중기의 시인이자, 당나라의 대표적 자연시인이다. 젊을 때는 의협을 사랑하여 무절제한 생활을 하였으나 뒷날 진사에 급제하여 오랫동안 관리생활을 하였고, 시풍은 고아하고 기품이 있으며 즐겨 자연을 노래하였다. 도연명과 더불어 도위(陶韋)라 일컬어지며, 왕유, 맹호연, 유종원과 더불어 왕맹위유(王孟韋柳)라 일컬어지기도 하였고, 시인의 작품 <추야기구원외(秋夜寄邱員外)>는 벗을 그리워하는 시로 널리 애송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