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운사 May 27. 2024

92> 寒食(한식)

漢詩工夫(240515)

寒食(한식)

 - 韓平君(한평군)


春城無處不飛花

춘성무처불비화

○○○●●○◎

봄의 장안성에 꽃 날리지 않는 곳 없고


寒食東風御柳斜

한식동풍어류사

○●○○●●◎

한식날 봄바람에 대궐의 버들 빗겨지네.


日暮漢宮傳蠟燭

일모한궁전납촉

●●●○○●●

날 저물자 궁중에서 밀초 불을 내려 주니


靑烟散入五侯家

청연산입오후가

○○●●●○◎

푸른 연기 흩어져서 오후가로 들어가네.

* 春城(춘성):늦은 봄의 장안성.

* 飛花(비화):버들개지, 버드나무의 꽃. 柳絮(류서)

* 傳蠟燭(전랍촉) : 한식날 임금이 촛불을 신하에게 하사하는 것.

* 五侯(오후) : 후한 환제(後漢桓帝) 때 같은 날 후(侯)에 봉한 당형(唐衡), 선초(單超), 서황(徐璜), 구원(具瑗), 좌관(左悺) 등 권력을 독단한 다섯 명의 환관을 가리킨다. 五侯家(오후가)란 말은 황제의 비위를 맞추어 벼락출세한 소인배들을 일컫는다. 또 다른 일설은 한나라 성제 때 왕황후의 다섯 형제를 후로 봉하여서 특별한 은총을 주었으니, 천자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 신하인 王譚(왕담), 王商(왕상), 王立(왕립), 王根(왕근), 王逢(왕봉)을 가리킨다고 한다.

寒食時(한식시)에 春花(춘화)가 正開(정개)하고, 旋開旋落(선개선락)은 因風而飛(인풍이비)라. 用無處不三字(용무처불3자)는 徧地皆春光矣(편지개춘광의)라.

한식 때에 봄꽃이 바로 피었고, 피자마자 바로 떨어지는 것은 바람 때문에 날려서 그런 것이다. ‘無處不(무처불)’ 3 자를 쓴 것은 땅이 두루 모두 봄빛이었기 때문이다.

以柳(이류)로 暎上花字(영상화자)하고, 以風(이풍)으로 暎上飛字而又以斜字(영상비자이우이사자)로, 貼風(첩풍)하고 以東風(이동풍)으로 暎上春字而以御柳(영상춘자이이어류)로 伏下漢宮(복하한궁)하고 且於此句(차어차귀)에 特提寒食(특제한식)하고 無裝疊之痕(무장첩지흔)이라. 時雖禁火而宮中則傳燭以分火(시수금화이궁중즉전촉이분화)라.

버드나무로 ‘꽃 화’ 자를 반영하고, 바람으로 ‘날 비’ 자를 반영하고, 또 ‘빗길 사’ 자를 바람에 붙였고, 동풍으로 ‘봄 춘’ 자를 반영하고, 궁궐의 버드나무로 한나라 궁궐에 복종하고 또 이 구절에서 특별히 한식을 이끌어내어 꾸미고 겹친 자취가 없다. 때가 비록 불을 금지했으나 궁중에서 촛불로 불을 나누어 전해준 것이다.

五侯(오호)는 近君驕貴(근군교귀)하야. 傳燭(전촉)을 必先及之(필선급지)하니, 於是(어시)에 靑烟(청연)이 飄颺(표양)하야. 盡散入五侯之家矣(진산입오후지가의)라. 五侯者(오후자)는 漢末(한말)에 宦官(환관)이 專權(전권)하니, 桓帝封禪超(환제봉선초), 徐瓊(서경 : 徐璜 서황), 具瑗(구원), 左琯(좌관), 唐衡(당형), 五侯(오후)하야. 同日爲侯(동일위후)하니 自是(자시)로 朝庭日亂(조정일란)이러니, 唐自肅代以來(당자숙대이래)로 宦者權重(환관권중)하야. 政之衰亂(정지쇠란)이 侔於漢故(모어한고)로 此詩(차시)는 寓諷刺焉(우풍자언)이라.

오후는 임금과 가까워 교만하고 귀한 분이라 촛불을 전해줌이 반드시 제일 먼저 미치니, 이에 푸른 연기가 날리어 모두 흩어져 오후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오후는 한나라 말기에 환관이 권세를 맘대로 부리니, 환제가 선초, 서황, 구원, 좌관, 당형, 다섯 사람을 봉하여, 다섯 후가 같은 날에 후가 되니 이로부터 조정이 날로 어지러워졌다. 당나라가 숙종과 대종 이후로부터 환관의 권세가 중해져 정치가 쇠약해지고 어지러움이 한나라와 비슷하기 때문에 이 시로 풍자를 붙인 것이다.

* 韓翃(한굉) : 대력 십대재자중의 한 사람인 한굉은 당나라 때의 시인이며, 자는 군평(君平)이고, 하남성의 남양인이다. 천보(天寶) 13년(754년)에 진사에 급제하였고, 보응(寶應) 연간에 치청절도사(淄青節度使) 후희일(侯希逸) 막부에 종사하였고, 후에 후희일이 조정에 돌아가니, 장안에서 십 년간 한거하였다. 대력(766-779) 후기에 변송(汴宋)에 들아 가서, 선무절도사(宣武節度使) 막부에서 종사하였다. 건중(780-783) 초에 덕종이 그의 “춘성무처불비화” 시를 감상하고, 가부낭중(駕部郎中), 지제고(知制誥)에 임명되고, 관직은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끝났다.

매거진의 이전글 91> 村南逢病叟(촌남봉병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