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촌에는 바로 낚싯대를 드리울 만하다. 낚시를 끝내고는 바로 배를 매 두어야 마땅하지만, 이에 활달하게 맘대로 맡겨둔 것이다. ‘배를 매두지 않고’라는 세 글자로 하나의 아름다운 구절을 펼쳐낸 것이다. 이미 배를 매 두지 않았고, 또 편안히 잠을 잘 잘 수 있겠는가? 진실로 홀로 가는 대로 뜻에 따라 그 머무는 곳을 맡겨두고 휴식한 것이다. 아래 두 구절의 위의 구는 한편 풀어놓고, 아래 구는 한편 걷어 들였는데, 따라서 ‘배를 매 두지 않고’라는 세 글자 속에 바로 이 두 구절의 뿌리가 숨어있는 것이다. 갈대꽃은 얕은 물에 비록 강 바람에 쉽게 불려 간들 다만 강촌의 좌우에 있으리니 불려 간들 무슨 해가 되겠는가? 말의 뜻이 매우 얕아 스스로 아름답게 여기는 일종의 흥미가 있다.
* 사공서(司空曙) : 720 ~ 790, 대력십재자(大曆十才子) 중의 한 명. 자는 문초(文初) 또는 문명(文明)으로 되어 있다. 광평(廣平), 지금의 하북성 영년현(永年縣) 출신. 대력 연간에 진사에 급제하고 검남절도사(劍南節度使)의 막료로 있다가, 좌습유(左拾遺), 장림현승(長林縣丞), 수부낭중(水部郎中) 우부낭중(虞部郎中) 등을 역임하였다. 집안이 가난하고 성정이 바르고 곧았으며 권력을 탐하지 않았기 때문에 폄적을 당해 떠돌다가 장사(長沙)에도 잠시 머물렀고, 강우(江右) 지역으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이약(李約)과는 둘도 없는 친구로 지냈으며, 장안에 있으면서는 노륜(盧綸), 독고급(獨孤及), 전기(錢起) 등과 시로 교류하였다. 사공서의 시는 세상을 떠돌면서 지은 시가 많아서, 헤어지고 만나는 것을 슬퍼하고 기뻐한 다든지 자연의 풍광을 읊은 시가 많다. 약간은 어둡고 쓸쓸한 분위기로, 안록산의 난을 겪고 난 뒤의 심정을 표현하였다. 후인들이 명구로 꼽는 “잠깐 만난 것이 꿈이 아닌가 싶은데, 서로 슬퍼하며 지난 세월을 물어보네(乍見翻疑夢, 相悲各問年)”와 같은 구절도 절차탁마의 노력에 의한 산물이라기보다는 당시 사람들이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을 시로 표현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사공서의 시는 현재 70여 수가 전한다. ≪전당시(全唐詩)≫에 2권이 있고 ≪사공문명시집(司空文明詩集)≫ 2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