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두공부(두보)가 춘흥을 이기지 못하여 청려장을 짚고 춘강을 향하여 천천히 느리게 걸어 꽃다운 강섶에 서 있으니, 강 언덕의 버들개지는 바람 따라 춤을 추고, 강 언덕의 복숭아 꽃잎은 물을 따라 흘러가니, 버들개지의 미친 듯 한 자태가 볼만하고, 꽃의 경박한 자태 역시 볼만하다. 윗 두 구절은 꽃다운 강섶에 서서 경치 구경을 말했고, 아래 두 구절 복숭아꽃의 풍광을 말하였다.
* 杜甫(두보 : 712-770) : 자(字)는 자미(子美), 자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라 하여 세칭 두소릉이다. 하남 궁현(지금의 허난성 궁이시) 태생이다. 천보(天寶) 시대에 장안에 이르러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십 년을 고생하여 겨우 우위(右衛)의 벼슬을 얻었다. 안사의 난에는 망명 생활을 하다가 반란군에 포로로 잡혔고, 위험에서 벗어나서 숙종으로부터 좌습유(左拾遺)를 받았다. 이후 관직을 버리고 촉(蜀)에 들어가 청두(成都)에 정착하였으며, 한때 검남절도사 엄무(嚴武) 막료인 검교공부원외랑(外校工部員外郞)으로 근무하여서 두습유(杜拾遺), 두공부(杜工部)라고도 불렸다. 만년에 온 가족이 동쪽으로 이주하여 도중에 기주에서 2년 동안 머물다가 싼샤를 떠나 후베이와 후난 일대를 떠돌다가 가난하고 병들어 죽었다. 당나라가 흥망성쇠로 변한 역사시대에 살았던 두보의 시는 사회 불안, 정치의 암흑, 인민의 고통에 대해 쓴 것이 많아 시사(詩史), 시성(詩聖)으로 불린다. 시사는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며 고상한 인격과 뛰어난 시술을 가지고 있어 추앙받는 칭호이다. 두보는 당나라의 가장 위대한 사실주의 시인으로 이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1400여 수의 시가 <두공부집>에 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