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도사의 산방에 대한 글이다. 도사가 거처하는 곳의 물가에 버드나무를 많이 심었고, 버드나무 아래의 다리는 붉은 난간을 양변에 바로 세우고, 골짜기 안에는 신선이 있어서 그 신선이 만들어 부는 퉁소는 벽옥을 조각하여 만든 것이다. 마고의 편지를 근래에 혹시 얻지 못하였을까? 심양 강가에 조수가 통하지 않아 통신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위의 두 구절은 건너는 다리에 붉은 난간이 꾸며졌다는 말을 하였고, 아래 두 구절은 마고의 편지를 심양강에 조수가 통하지 않아 볼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을 하였다.
고황(顧況) : 자는 포옹(逋翁). 호는 화양진일(華陽真逸). 소주(蘇州) 해염현(海鹽縣 지금은 절강성 해염현) 출신이다. 관료, 시인, 화가, 감상가(鑒賞家) 등으로 이름이 높았다. 숙종(肅宗) 지덕(至德) 2년(757) 진사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郎)이 되었으며, 후에 대리사직(大理司直)이 되었다. 정원(貞元) 2년(787)에는 진해군(鎮海軍) 절도판관(節度判官)으로 세금 선박의 운송을 담당하다 재상 이필(李泌)의 추천으로 저작좌랑(著作佐郎)이 되었다. 후에 조정의 권세가를 풍자하는 시를 써서 요주사호참군(饒州司戶參軍)으로 좌천되었다. 천성이 해학적이었던 고황은 폄적되어 가는 길에 소주를 지나면서 위응물(韋應物)과도 수창(酬唱)하였다. 후에 모산(茅山)에 은거하면서 연금술을 단련하였으며, 94세에 집에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두보(杜甫)의 현실주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신악부(新樂府)운동의 선구(先驅)라고 평가된다.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중시하였다. 당시의 시대적인 폐단을 폭로하고 풍자하는 <건(囝)> <공자행(公子行)> 등의 시를 썼다. 이 외에도 색조가 명랑한 즉흥 서정 소시(小詩)를 쓰기도 했다. 가행체(歌行體)와 절구(絶句)를 좋아하였으며 육언(六言)과 예스럽고 소박한 사언(四言)체를 쓰기도 했다. 시집으로는 《화양집(華陽集)》 20권이 있다. 산수화에도 뛰어났으며, 《화평(畫評)》, 《문론(文論)》 등의 저작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대표작으로는 <낙양조춘(洛陽早春)>이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