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29일 이태원에서 156명이 참변(慘變)을 당한 것은 근래(近來) 선진국(先進國)에선 볼 수 없는 무참(無慘)한 사고이고,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모든 국민이 가슴 깊이 애도(哀悼)하고 다시는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참사(慘事)가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세월호 사고의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또다시 이런 참혹(慘酷)한 사고(事故)가 발생하다니 믿기지 않을 뿐이다.
이태원이라는 지명(地名)은 우리 역사상 아주 기구(崎嶇)한 사연(事緣)을 가진 지명이다. 지명의 끝에 원(院) 자가 들어가는 경우에 대부분이 교통의 요지(要地)로서 역참(驛站) 또는 역원(驛院)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역원(驛院)은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고려(高麗)를 거쳐 조선(朝鮮)에 와서 전국이 통일 체계로 정비가 되었다. 이러한 역참(驛站)이나 역원(驛院)은 대체로 30리(里) 단위로 설치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거리를 말할 때 “한참 가야 한다.”라는 말은 두 역참(驛站) 사이를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時間)의 의미와 거리(距離)의 의미를 내포(內包)하고 있다. 역원(驛院)은 공적(公的) 관리 기구였는데, 왕래(往來) 인구가 많아짐에 따라 사설(私設) 기구인 주막(酒幕)이나 주점(酒店)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기고, 그 후 교통과 통신 수단의 발달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간혹(間或) 지명으로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한양으로 출입하는 역원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것은 2역(驛)<노원역(盧原驛), 청파역(靑坡驛)>과 4원(院)<보제원(普濟院), 홍제원(弘濟院), 이태원(利泰院), 전환원(箭串院)>이 있다. 청파역과 이태원은 숭례문(崇禮門 : 남대문)에서 남쪽 방향으로 오가는 목적이고, 노원역과 보제원은 흥인문(興仁門 : 동대문), 전환원은 광희문(光熙門)에서 동남쪽 방향, 홍제원은 돈의문(敦義門 : 서대문)에서 서북쪽 방향을 위한 것이다. 이태원(利泰院)은 목멱산(木覓山 : 남산) 남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 책에는 이름이 이로울 이(利) 자로 현재의 배 이(梨) 자가 아니다. 보제원(普濟院)은 흥인문(興仁門) 밖에, 홍제원(弘濟院)은 무악재 너머 지금의 홍제동에 있었고, 전환원(箭串院)은 살곶이 다리 부근이었다. 제(濟) 자가 들어간 보제원(普濟院), 홍제원(弘濟院)은 가난한 백성을 구휼(救恤)하는 기능도 겸했고, 나중에 이태원도 같은 기능을 했다. 이태원은 고려 때부터 역원으로 사용되었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안동으로 몽진(蒙塵)을 떠날 때 이태원을 경유하였다. 조선 개국 이후에는 영남 쪽에서 한양을 출입하는 길목의 역원으로서 교통이 좋고 왕래가 빈번하였다. 중국의 사신(使臣)들이 한양을 출입할 때, 홍제원(弘濟院)에서 옷을 갈아입었듯이, 일본의 사신(使臣)이나 통신사(通信使)들은 이태원에서 묵으며 한양을 출입한 것이다.
이태원의 한자명(漢字名)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세종(世宗) 8년(1426년)에 기록된 세종실록(世宗實錄)과 세조(世祖) 1년(1457년)에 발간된 국조보감(國朝寶鑑)에는 이태원(利泰院)으로 기록되어 있고, 1525년에 발간된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이태원(李泰院)으로,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다시 이태원(利泰院)으로, 인조(仁祖) 5년(1627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이태원(利太院)으로, 정조(正祖) 7년(1783년) 일성록(日省錄)에는 이태원(梨太院)으로, 정조(正祖) 20년(1796년) 일성록(日省錄)에는 이태원(梨泰院)으로, 이긍익(李肯翊)이 1778~1803 사이에 저술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이태원(李泰院)으로, 심지어 1871년에 저술된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이태원(異胎院), 1927년에 김대림(金大林)이 편찬한 편찬한 윤휴(尹鑴)의 백호문집(白湖文集)에는 이태원(理泰院)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이태원의 명칭(名稱)에 대한 여러 가지 전설(傳說)이 있는데 이를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고려 시대에 도선비기(道詵祕記)의 도참(圖讖)을 믿고 한양에 오얏나무를 많이 심었다가 무성(茂盛)하게 자라면 번번이 베어내어 지기(地氣)를 눌렀기 때문에 오얏이(李)자 이태원(李泰院)이란 설(說)이 있다. 또 일설(一說)은,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를 양(兩) 선봉장(先鋒將)으로 삼아 침략했다. 이들은 일평생 경쟁 관계여서 한양 점령(占領)과 조선의 임금 선조(先祖)를 사로잡는데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래서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숭례문(崇禮門)으로,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흥인문(興仁門)으로 입성했다. 가토는 불교 신자이며 주전파(主戰派)이고, 고니시는 가톨릭 신자이며 반전파(反戰派)에 해당하는데, 이때 가토 부대가 이태원에 주둔하였다. 주둔 중에 이들은 식량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겁탈(劫奪)하기도 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난을 가버린 상황이라 피난을 못 간 사람들이 많은 피해를 보았다. 이들은 남산 기슭의 황학골에 있던 운종사(雲鐘寺)의 비구니(比丘尼)들도 겁탈했다. 그리고는 절을 불살라 버리고 떠났다. 전쟁은 여성들에게 지옥이듯이 겁탈 당한 비구니들과 여인들이 임신을 하게 되자, 오갈 데 없는 처지의 이들이 융경산(隆景山 : 남산의 지맥(支脈)인 지금의 매봉산 기슭 정도) 부군당(府君堂) 밑에 토막(土幕)을 짓고 살다가 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을 다른 민족의 태(胎) 즉, 이태(異胎)가 사는 곳이라고 하였고, 그 일대를 이태원(異胎院)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후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청국(淸國)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환향녀(還鄕女)와 그들의 자식들도 옮겨와 살게 되었다. 또 다른 일설은 효종(孝宗) 시절에 이곳에 배나무가 많아서 배 리(梨) 자 이태원(梨泰院)으로 부르게 하였다고 전하나 기록의 근거는 없다. 국가의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조선왕조실록 세종(世宗) 8년(1426)부터 연산군(燕山君) 10년(1504)까지 이로울 이(利) 자 이태원(利泰院)으로 썼고, 인조(仁祖) 1년(1627) 승정원일기와 정조(正祖) 20년(1796)까지 일성록에는 이태원(利太院)과 이태원(梨泰院)으로 쓰였다. 그러니 효종(孝宗)이 이태원(梨泰院)으로 쓰라고 지시한 근거도 찾을 수 없다. 부군당(府君堂)도 이태원 현장의 안내 설명 게시판(揭示板)에 기록된 걸 보면 명확하지는 않지만 광해군(光海君) 11년(1619)으로 비문(碑文)에 쓰였다고 되어있다. 그러면 이때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끝난 지 21년이 지난 때라서 부군당(府君堂)의 존재 시기와 맞지 않는다.
왜군에게 비구니가 겁탈당했다는 운종사(雲鐘寺)의 기록은 찾을 수가 없고,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목멱산(木覔山 : 남산)의 남쪽 이태원(李泰院)의 들에는 고산사(高山寺)의 동쪽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으며, 큰 소나무가 골에 가득하여 성 안의 부녀자들이 빨래하러 많이 간다.(木覓山之南李泰院之坪有泉潟出于高山寺之東長松滿洞城中婦女洴澼衣者多往焉)”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민족(異民族)의 태(胎)라는 이태원(異胎院)의 기록은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남문(南門) 밖에 또한 이태원(異胎院)이 있는데, 임진년(1592) 뒤에 왜인(倭人)들을 이곳에 옮겨 두고 인(因)하여 이름을 삼았으나, 지금은 상고(詳考)할 수가 없다.(我國南門外異胎院壬辰後徒置倭種因以爲名今無稽之)....천일정(天一亭)으로 가는 길이 이태원(異胎院)을 경유한다. 임진왜란 뒤에 왜인(倭人)들을 살게 해 준 곳이다. 그 풍속(風俗)이 지금도 사납고 독하니 왜인의 종자가 남아 있어서일 듯한데, 습속(習俗)은 그 유래(由來)가 있는 것이다.(天一亭去路由異胎院壬辰後倭種之徒置處也其俗悍毒豈倭種之有遺而俗習則有自也)” 다른 나라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이타원(異他院)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 “이태원(梨泰院)은 목멱산 남쪽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임진란 뒤에 왜인의 귀순(歸順)한 자를 숭례문 밖 남산 아래에 살게 하여 자연히 한 마을을 이룬 까닭에 이타인(異他人)이라고 일컬었으므로 동리(洞里) 이름이 되었는데, 뒤에 이름을 고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전설(傳說)이나 설화(說話)는 구전(口傳)된 것이 많겠지만, 1932년 7월경 동아일보에 황학동 운종사 비구니(比丘尼)의 기구한 운명을 전설로 소개한 기사(記事)가 있고,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도 이러한 일면(一面)의 설화가 기록되어 전해진다. 왜군(倭軍)에 겁탈 당해 이민족의 피가 섞였든, 왜란(倭亂) 후에 귀화한 왜인(倭人)들이 정착했든, 청나라에서 돌아온 환향녀(還鄕女)들의 후손이 눌러앉았든 오랜 세월 이태원은 도성(都城) 안쪽보다 훨씬 더 다양한 핏줄과 출신들이 어울려 살았음에 분명하다. 전란(戰亂)이 없었을지라도 일본과 통신사(通信使)와 사신(使臣)이 오가는 길목이라서 한양에 당도하기 전 어쩌면 마지막 숙소이며 교역(交易)의 장(場)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조선 고유의 풍속(風俗) 보다는 좀 더 개방적(開放的)이고 자유분방(自由奔放)했을 수도 있겠다.
이태원을 포함한 용산은 역사적 기록으로 봐도 군대의 주둔지(駐屯地)로 많이 이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蒙古)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몽진(蒙塵)할 때 이곳을 경유했지만 몽고군(蒙古軍)들도 용산(龍山)을 병참기지(兵站基地)로 활용했다. 조선 시대에 용산 강변에는 군량미(軍糧米)를 보관하는 군자감(軍資監) 창고가 있었다. 본격적인 군대 주둔지는 조선 말기에 이루어졌다. 고종(高宗)과 민비(閔妃)의 개화정책은 보수적인 대원군(大院君) 일파와 충돌하여 임오군란(壬午軍亂 : 1882)이 일어났다. 민씨(閔氏) 일당은 탐학불법(貪虐不法)한 짓을 자행하여 민원(民怨)을 사고, 또 신식(新式) 군대를 훈련한 뒤부터 구식(舊式) 군대를 천대(賤待)하여 급료를 13개월이나 지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모래가 섞인 악질미(惡質米)로 1개월분을 지급하자 이에 불만을 가진 구식 군대가 난을 일으켰으니 이것이 이른바 임오군란(壬午軍亂)이다.
난동의 배후에는 민비(閔妃)의 정적(政敵)인 대원군(大院君)이 이를 조종하고, 평소 민씨 일파에게 불평을 품고 있던 왕십리(往十里)와 이태원(梨泰院)의 주민들이 가담 합세하여 사건이 더욱 확대되었던 것이다. 6월 9일에 난을 일으킨 1대(隊)는 민씨 일당의 집을 습격하고, 1대는 서대문 밖 일본 공사관(公使館)을 습격하고, 1대는 하도감(下都監)에 가서 신식 군대의 훈련 책임자 일본인(日本人) 교관(敎官) 호리모토 레이조(掘本禮造)를 죽였다. 이튿날 궐내(闕內)에 침입하여 그곳에 숨어 있던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 민겸호(閔謙鎬)와 그 당파인 영의정 이최응(李最應)과 경기감사(京畿監司) 김보현(金輔鉉)을 죽이고 민비(閔妃)를 해치려고 하였으나, 민비는 간신히 궁중을 탈출하여 충주(忠州)로 피난했기 때문에 무사하게 되었다. 군란은 대원군이 궁중으로 들어가서 군졸을 효유(曉諭)함으로써 일단 진정(鎭靜)이 되고 이 일을 계기로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한 달 후에 청(淸) 나라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대원군을 납치(拉致)해 가게 되니, 민비가 충주로부터 돌아와 정권은 그의 수중으로 되돌아갔다.
6월 9일, 난군의 습격을 받은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카타(花房義質)는 인천(仁川)으로 도망하여 영국(英國) 측량선을 타고 돌아갔다가, 7월 7일 다시 군함을 거느리고 와서 손해배상을 요구하므로, 조선은 할 수 없이 그들의 요구에 응하여 7월 17일에 전권대신 이유원(李裕元)과 김홍집(金弘集)을 인천에 보내어 일본과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의 내용은 일본 정부에 손해 배상금 50만 원(圓)을 5년 연부(年賦)로 지불하고,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키고, 일본에 진사사(陳謝使)를 파견할 것 등으로 규정했는데, 이 조약에 따라 8월 8일에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를 일본에 보내어 유감(有感)의 뜻을 표하였다. 이상이 박영효가 쓴 사화기략(使和記略)의 내용이다.
이 난을 기화(奇貨)로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의 원세개(袁世凱) 군대 3000명이 용산에 주둔하게 되었고, 군란(軍亂)의 주동자(主動者)와 참가자들을 색출(索出)하여 처벌하게 되었다. 그때에 이태원과 왕십리 민간인이 170여명 체포되어 11명이 사형당하고, 나머지는 투옥되거나 처벌되었다. 그 시절도 이태원은 평온(平溫)한 곳이 아니었다. 그 후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의 평정(平定)을 위해 파병 요청된 청군의 진출은 텐진조약(天津條約)에 따라 일본의 동시 파병(派兵)이 이루어지고, 동학운동이 평정된 뒤에도 일군은 철수하지 않고 용산에 터를 잡고 있으면서 청나라와 무력 경쟁을 했다. 급기야 1894년에 청일전쟁(淸日戰爭)을 일으키고, 이를 승리하자 조선의 국권(國權)을 틀어잡고 상주(常駐)한 것이다.
그 후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 때 용산(龍山) 주변 300여만 평(坪)을 강제 수용해 병영(兵營)으로 사용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일본은 1906년 4월 대한제국으로부터 서울 용산 일대 부지 300만 평을 사들여 일본군 주둔기지(駐屯基地)로 건설했다. 그곳에 당시 일명 “용산아방궁(龍山阿房宮)”으로 불렸던 일본 용산 총독관저(總督官邸)를 건설했다. 용산 총독관저는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사령관(司令官)으로 부임해 제2대 조선총독이 된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전쟁 경비에서 남은 비용 50만 원(圓)으로 건설한 유럽풍의 초호화 건축물이었다. 이 관저는 1939년 경무대(景武臺) 관저를 지을 때까지 사용되었다. 그 당시 한 달의 전기료가 400원(圓)이 소요될 만큼 초호화판으로 지었다고 한다. 총독부 건물과의 거리, 편리성 등으로 실제 관저로 쓰이지는 않고 비워두고, 각종 연회나 개최하여서 일본왕의 이궁(離宮)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본은 용산 위수감옥(龍山 衛戍監獄)을 용산의 등줄기에 해당하는 둔지산 자락에 위치를 정하고 1909년에 완공하였다. 이 감옥(監獄)은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감옥으로 사용되다가 광복 이후에는 미 7사단 구금소(拘禁所)로 사용되기도 했던 역사의 아픔이 있다. 남영동(南營洞)의 이름도 일본군 군영(軍營)의 남쪽에 있어서 부쳐진 것이다. 역사적으로 1884년에 용산(龍山)이 “개시장(開市場)”으로 지정되어 부산, 인천, 원산처럼 외국 상인들의 교역(交易)이 허용되면서 증기선(蒸氣船)들이 드나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군사적, 상업적 외국과의 접점(接點)이었다.
용산이 해방(解放)되면서 일본군 주력부대의 주둔지에서 미군(美軍) 주둔기지로 변화했다. 미 7사단 병력 1만 5000명이 용산(龍山) 일본군의 병영(兵營)을 접수(接受)해 사용하면서 지금의 주한미군사령부로 발전했다가 이젠 평택으로 모두 이전한 것이다. 그때부터 이태원과 한남동 주변은 영외(營外) 거주자들의 숙소(宿所)와 미군을 위한 가게, 술집 등이 들어서면서 위락지대로 변했다. 또 한편 인근(隣近) 남산 밑에는 6·25 전쟁 후 월남민(越南民)들이 집단 거주하는 해방촌(解放村)이 생겼다. 1960년대 이후에는 이태원과 한남동 일대에 외국 공관(公館)이 들어서고, 군인(軍人) 아파트가 건설되고, 유엔 빌리지 등 외국인들의 집단(集團) 거주지가 형성됐다. 1971년에는 121후송병원(後送病院)이 부평에서 미 8군 영내로 이전하여 서울미군병원과 통합함에 따라 미군과 병원 종사자들, 기지촌(基地村) 상인들이 더불어 이주해 이태원 지역을 더 발전하게 만들었다. 1980년대는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 게임이 개최돼 한국이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려지면서 외국 관광객(觀光客)들의 쇼핑과 유흥(遊興) 위락(慰樂)을 위한 거리가 됐다. 세계 각국의 이색적(異色的)인 요리(料理)를 맛볼 수 있는 음식점도 많다. 이태원에는 1976년에 세워진 이슬람 성전(聖殿) 서울중앙성원(中央聖院)이 있다. 국내에도 이슬람 교인이 6~7만명 가량 존재한다.
이렇게 다양(多樣)하고 기구(崎嶇)한 역사를 지닌 이태원은 1997년 관광특구(觀光特區)로 지정되었다. 그 이후 세계인의 관광특구로서 전통(傳統)과 현대(現代), 한국적(韓國的)인 것과 이국적(異國的)인 것이 공존(共存)하는 매력(魅力)을 발산(發散)하는 거리가 되었다. 이태원은 과거의 아픔과 현재의 자유분방(自由奔放)한 즐거움을 공유(共有)하는 거리로 발전했고, 이웃한 미군기지의 대규모 부지(敷地)가 공원(公園)과 다양한 목적으로 조화(調和)되게 개발된다면 제2의 도약(跳躍)이 될 약속된 미래(未來)의 땅이기도 하다.
<이태원 운집 인원 모습 : 뉴스1, 세계일보 영상>
안전에 대처(對處)하는 선진화된 국가 시스템의 부재(不在)와 공적(公的)인 대처 의식이 부족(不足)한 면이 크다. 반면(反面)에 국민 개개인(個個人)도 각자 안전 의식(意識)을 갖고, 공중 질서(秩序)를 지켜야 사고를 줄일 수 있다. 상호 존중(尊重)하는 생활 의식이 미비(未備)한 상태에서 순간적(瞬間的), 즉흥적(卽興的) 행동으로 발생된 대형 참극(慘劇)이라 당사자(當事者)와 유가족(遺家族)의 비극(悲劇)으로만 끝날 수가 없는 것이다. 철저한 원인 규명(糾明)과 사태 처리 과정의 책임(責任) 소재(所在)를 엄격하게 따져서, 다시는 이런 후진적인 대규모 참사(慘事)가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기를 기대해 본다. 어린 자녀를 먼저 떠나보내는 것을 선조(先祖)들은 서하지통(西河之痛), 상명지통(喪明之痛)이라 했다. 공자(孔子) 제자인 자하(子夏)의 고사(古事)에서 나온 말이다. 공자 사후(死後)에 자하(子夏)가 서하(西河)에서 위 문후(魏 文侯)의 스승으로 있을 때 아들이 죽자 슬피 울다가 눈이 멀었다는 고사(古事)이다. 다시 한번 더 깊은 애도(哀悼)를 표(表하)고 영면(永眠)을 기원(祈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