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성도의 풍경을 보고 지은 것이다. 금강의 봄빛이 사람을 몰고 와 가까운 서쪽의 봄물이 오리 머리같이 푸르러 완연히 염색한 듯하고, 새로 내리던 비 처음 개이니 산머리의 여지나무는 열매가 이미 익었다고 말한다. 술을 파는 집이 만리교 주변에 많아서 푸른 술집 깃발이 바람에 날리니 봄을 맞아 놀러 다니는 사람들이 오늘 밤엔 어느 집에 가서 묵을까 하니, 성도에 반드시 호방하여 자득한 무리들이 많음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위 두 구절은 강호의 빼어난 경치와 여지가 익은 것을 말했고, 아래 두 구절은 다리 주변에는 술집이 많은 동시에 노니는 호탕한 자들도 가장 많다 말이다.
* 張籍(장적) : 768년 출생 – 830년 사망 추정, 자는 文昌(문창)이고, 中唐(중당)의 문관, 시인. 河北省 濮陽(하북성 복양) 사람이다. 進士(진사)에 급제하여 韓愈(한유)의 천거로 國子博士(국자박사)가 되었고, 國子司業(국자사업)을 역임했다. 古詩(고시)와 書翰, 行草(서한, 행초)에 능했고, 樂府(악부)에도 능하여 王建(왕건)과 이름을 같이했다. 한유에게 ‘노름을 즐기고 남에게 이기려는 승벽이 세며 老佛(노불)을 배척하여 미움을 받으니 맹자처럼 글로 후세에 남기지 못하리라.’는 신랄한 편지를 보낸 바가 있으며 ‘張司業詩集(장사업시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