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부의 양주궁 노랫말은 개원(당현종) 중 서양부 도독 곽지운이 올린 것이다. <서역기>에 구자국 왕이 여러 신하들과 음악을 아는 자들과 더불어 대산에서 한가히 바람소리를 듣고 박자를 요약하여 소리를 만들었는데, 후에 뒤집어 중국에 들어가니 이주, 양주, 감주 같은 경우가 모두 구자국의 경내라 하였다. 한편 양주는 곧 한나라 때의 월지국이니, 한나라 무제가 주천군, 무위, 장액을 두었다. 후에 위나라가 양주라고 불렀는데 옥문관이 바로 이곳에 있다.
이는 봉림관 안의 강물이 동으로 흐른다고 말한 것은 세월이 빠르다는 말이고, 흰 갈대 누런 느릅나무가 60년이 됐다는 말은 변방의 성에서 장졸들이 수고로운 고생하는 것을 60년이나 보아왔다는 말이고, 변방의 장수가 모두 임금의 은택을 입어 변두리에 있을 적에 해가 거듭됨에 따라 전공이 있는 자가 모두 은택을 입어 포상으로 현달했다는 말이고, 양주를 취할 방법을 알아낼 사람이 없어 스스로 탄식하여 말하기를 “누가 양주를 취해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겠는가? 변방의 장수들이 모두 국은을 입었지만 양주를 취할 자가 한 사람도 없구나!”
* 장적(張籍, 약 767~약 830) : 당나라 오군(吳郡) 사람. 화주(和州) 오강(烏江)에서 살았고, 자는 문창(文昌)이다. 덕종(德宗) 정원(貞元) 15년(799) 진사가 되고, 헌종(憲宗) 원화(元和) 원년(806) 태상시태축(太常寺太祝)에 올랐는데, 10년 동안 승진을 못하고 안질에 걸린 데다 집안까지 빈한하여, 맹교(孟郊)가 조롱 삼아 “궁핍하고 애꾸인 장태축(窮瞎張太祝)”이라 불렀다. 나중에 수부원외랑(水部員外郞)과 국자사업(國子司業)을 지내 ‘장사업(張司業)’ 또는 ‘장수부(張水部)’로도 불린다. 당시 명사들과 많이 교유했고, 한유(韓愈)의 인정을 받았다. 시의 발전과정에서 볼 때 두보(杜甫)와 백거이(白居易)의 연계선상에 있는 시인이다. 악부시(樂府詩)로 이름이 났다. 현전 하는 시 418수 가운데 7~80수가 악부시여서 서사(敍事)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지만 악부시가 아닌 것도 대부분 민간의 고통을 반영하는 데 성공했다. 왕건(王建)과 이름을 나란히 해 ‘장왕악부(張王樂府)’로 병칭 되었다. 유명한 시편으로는 「새하곡」, 「징부원」, 「채련곡」, 「강남곡」이 있다. 저서에 『장사업집(張司業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