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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Dec 04. 2022

(6) 최고 색정녀(色情女) - 감동(甘同)

★ 18禁 역사 읽기 ★ (221204)

★ 19禁 역사 읽기 ★ (221103)

지금이야 야동(動 : 야한 동영상)이 한강물처럼 흔하고, 심지어 케이블 TV나 IPTV 채널에 고정(固定) 편성(編成)되어 있고, 인터넷에는 성인(成人) 인증(認證)만 하면 댐이 터질 듯이 밀려 나올 정도이고, 아프리카 TV 같은 곳은 생방송(Live 방송)도 보여준단다. 하지만 과거에는 야동은커녕 야한 성인잡지(Play-boy 등)도 귀하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다가 비디오와 CD, DVD가 보편화될 즈음에 한반도(韓半島)를 강타(强打)한 야동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오양(吳孃)의 비디오와 백양(白孃)의 비디오였다. 요즘 같으면 미투(Me Too)로, 성범죄로 엄벌(嚴罰)에 처했겠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부분이 관대(寬待)했었는지, 법망(法網)의 미비(未備)였는지는 몰라도 적당히 넘어간 것 같다. 본인들이야 열불 나고 얼굴 들고 못 다닐 일이겠지만, 적어도 그 시대에서 그녀들의 이름과 얼굴을 모르는 남자 성인은 없을 것이다. 성(性)에 대한 담론(談論)이 늘 음습(陰濕)했던 시기에 그녀들은 일종의 희생양(犧牲羊)이었다.

<영화 깜동 : 포스터>

성인(成人)의 남녀가 침대(寢臺)에서 그거 하는 거는 어쩌면 당연한 건데, 그것을 도덕적(道德的), 사회적으로 너무 억눌러 놓은 것이다. 그거 안 하면 남녀가 밤새도록 눈 비벼가며 ‘쌔쌔쌔’ 놀이나 해야 할까? 아니면 술이나 마약(痲藥)을 해야 하나? 건강(健康)하고 운동되고, 땀 흘리는 종합 스포츠로 최고 아니겠는가? 근데 일부 점잖은 척, 유식(有識)한 성인군자(聖人君子)인 척하는 작자들이 꼭 이럴 때 나불거리고 나선다. 마치 똥 누고 밑 안 닦은 듯한 심각한 얼굴로 대중매체(大衆媒體)에 등장(登場)해서는 이 시대가 유사(有史) 이래의 타락(墮落)한 말세(末世) 인양 횡설수설(橫說竪說) 비판해댄다. 자기네들 때는 안 그랬는데 요즘 애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흰소리 해댄다. 하긴 공자(孔子)도 2,500년 전에 요즘 아이들은 버릇없다고 했다니깐.

이런 걸 두고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라는 거다. 어디 한반도 백성들이 언제부터 윤리(倫理) 도덕에 목매달고 살았는가? 신라(新羅), 고려(高麗) 역사를 뒤져봐도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란 말은 없고, 도리어 남녀십칠세자동석(男女十七歲自同席) 즉 남녀는 17세가 되면 스스로 같이 자리에 앉게 되어있다. 그게 바로 음양(陰陽)의 이치(理致)가 아니던가?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클리프 리처드’라는 영국 가수가 내한(來韓) 공연(公演) 왔을 때 무대(舞臺)로 팬티, 브래지어 벗어던지고 열광(熱狂)했던 세대가 있었고, 영화 ‘타워링’의 모델이 됐던 대연각호텔 화재(火災) 때 여고삐리들이 객실(客室)에서 사고를 당했던 사례도 있다.

<탈렌트 오현경 : 헤럴드경제 자료>

그뿐만이 아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더욱더 경악(驚愕) 할 만한 사건은 부지기수(不知其數)다. 그중에서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 하여 성리학(性理學)을 기초로 하여 정치를 하면서 성(性)을 터부(Taboo) 시 하고, 여성의 성을 억압(抑壓)하면서 그들은 몰래 밀실(密室)에서 희희낙락(喜喜樂樂) 즐긴 조선시대를 돌아보자. 그 시대에 이름 하여 “조선판 오양(吳孃), 백양(白孃)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조선 초기 조정(朝廷)을 뒤흔들었던 음풍(淫風) 사건의 주인공은 “유감동(兪甘同)”이다.

<영화 깜동 : 팜플렛>

유감동(兪甘同)의 이야기는 1988년 이보희, 신성일, 김희라 주연의 <깜동>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映畫化)되었다. 이 영화의 극본(劇本)은 <소설 동의보감(東醫寶鑑)>과 드라마 <허준(許浚)>의 작가인 이은성이 썼다. 영화의 내용은 실록의 사실들을 작가적 상상력(想像力)으로 엮어서 다음과 같다. 사대부 여식으로 태어난 깜동(이보희 분)은 무안군수(務安郡守)에서 평강현감(平康縣監)으로 좌천(左遷)된 남편을 따라 강원도에서 생활하다가 말미를 얻어 한양(漢陽)에 돌아오게 된다. 시댁에서 씨내리(강수연의 씨받이 반대)로 보낸 남자를 피해 가출한다. 그때 평소 그녀를 탐(貪)하던 김여달(김희라 분)에게 강간당한 깜동을 우의정 정탁(신성일 분)이 데려가 첩(妾)으로 삼는다. 정탁은 조카 정효문(김추련 분)과 정(情)을 통하자 쫓아낸다. 쫓겨난 깜동을 정효문 조차도 버리자 기방(妓房)을 차려 방탕(放蕩)한 생활을 하게 된다. 남편을 빼앗긴 여인들의 투서(投書)로 깜동은 교사형(絞死刑)을 받게 되나, 첫사랑이었던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인 박성지(정승호 분)가 적극 변호하여 유배형으로 감형된다. 외딴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깜동은 벼슬을 버리고 내려온 박성지와 감격적인 해후(邂逅)를 하게 된다. 사실(史實)과는 완전 다른 허구(虛構)의 해피엔딩(Happy Ending)이다.

<영화 깜동 : 포스터>

실제(實際) 감동(甘同)의 음란(淫亂) 사건이 터진 때는 세종(世宗) 9년(1427)이다. 유감동(兪甘同)이라는 여자는 본래 양반집 규수였다. 명예(名譽) 서울시장인 검한성 윤(檢漢城 尹)을 지낸 유귀수(兪龜壽)의 딸로서, 선천적으로 몸이 뜨거운 구조였는지 어쨌는지 엄청나게 밝히는 여자로 낙인(烙印)이 찍혔지만, 원래 양반집 규수(閨秀) 답게 똑똑하고 기억력도 비상(非常)하며, 글도 잘 지었다고 한다. 그녀가 쓴 글은 음부(淫婦)로 낙인(烙印) 찍히고 노비(奴婢)로 전락(轉落)하면서 대부분 멸실(滅失)되었으니 그게 안타까운 일이다.

그녀는 강원도 평강현감(平康縣監) 최중기(崔仲基)와 결혼하였으니 초창기에는 비교적 안정된 결혼 생활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무안군수(務安郡守 : 종4품)로 발령받아 근무하고 있을 때 그 지방으로 같이 갔던 모양이다. 그 시절 남편이 몸이 좋지 않아 피접(避接)을 가게 되었다. 피접(避接)은 아픈 환자가 다른 집에 가서 몸조리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김여달(金如達)이라는 자가 순찰(巡察)을 도는 척하면서 감동(甘同)을 붙잡아서 협박(脅迫)했다. 김여달(金如達)은 인근(隣近) 무뢰배(無賴輩) 두목(頭目)으로 무리를 이끌고, 연약(軟弱)한 여자를 계속 협박(脅迫)하고 희롱(戲弄) 하니 버틸 수가 없어 결국 감동(甘同)은 겁탈(劫奪) 당하고 말았다. 조선실록(朝鮮實錄)에는 밤새 협박과 희롱을 받았다고 나온다.

<가수 백지영 : 스포츠 한국 자료>

당시(當時)의 사회 분위기 봐서 감동은 이 일을 발설(發說)할 수가 없었다. 정조(貞操)를 더럽힌 여자로 손가락질받느니 조용히 덮어두는 게 더 나았던 것이다. 감동의 얼굴이 반반하고 양반집 아낙으로서 현숙(賢淑)한 매력이 넘쳤는지, 아니면 밤일에 남다른 묘미(妙味)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놈 김여달(金如達)이 한 번으로 욕심(欲心)을 거둘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원래 훔쳐 먹는 사과가 더 맛있다고 하다던가? 김여달(金如達)은 최중기(崔仲基)가 집에 없는 틈을 타 집안으로 침입(侵入)해서 감동(甘同)을 또 겁탈(劫奪)하기에 이르렀다. 원래 남녀 간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첫 번째의 관계(關係)가 이루어지면 그것이 발전하여 지속적(持續的)인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가 다반사(茶飯事)이다. 감동(甘同)으로서도 병치레나 하는 골골한 유생(儒生)인 남편보다 떡대 좋은 왈패(曰牌) 두목의 품이 더 격정적(激情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날 성범죄처벌법이 생기기 전에 만든 형법(刑法)에서 간강범(强姦犯)이 한 여성에게 어느 정도 시차(時差)를 두고 두 번 이상 계속 강간(强姦)을 한 경우에는 강간범으로 처벌하지 않는 조항(條項)이 있었다. 강간이 두 번 이상 같은 형태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아주 전근대적(前近代的)인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당시의 조선사회에서는 강간범인 김여달(金如達)보다 그녀의 행실(行實)을 문제 삼아 비난(非難)하였다. 정절(貞節)을 잃은 사대부(士大夫) 여인은 남편에게 버림받고 친정(親庭)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것이 당연했고,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하곤 했다. 유감동은 김여달(金如達)에게 강포(强暴) 한 짓을 당했지만 여느 조선의 여인들과는 달리 자신을 스스로 창기(娼妓)라 부르며 복잡한 애정행각(愛情行脚)을 계속했던 것이다. 남편 최중기가 무안군수로 있을 때 병을 핑계 삼아 먼저 서울로 돌아오기도 했다. 서울로 올라와 방종(放縱)하게 굴자 최중기가 버렸다고 한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쫓겨났으니 친정에서도 받아주지 않을 것이고, 어쩔 수 없이 기녀(妓女)로 생활하였을 것이다. 자신을 강간한 김여달(金如達)과도 계속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어쩌면 김여달(金如達)은 왈패(曰牌)로서 감동의 기둥서방 노릇을 했을지도 모른다.

왕조실록(王朝實錄) 세종(世宗) 9년(1427) 8월 27일에 유감동과 관계했던 남자는 김여달(金如達), 이승(李升), 황치신(黃致身), 유강(柳江), 전수생(田穗生), 이돈(李敦) 등이고 몰래 간통한 사람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녀가 정을 통한 남자는 실록(實錄)에 나온 이름만 세어보니 40여 명에 달한다. 해주판관(海州判官) 오안로(吳安老)ㆍ전 도사(前都事) 이곡(李谷)·전 호군(前護軍) 전유성(全由性)·장연 첨절제사(長淵僉節制使) 박종지(朴從智)ㆍ행 사직(行司直) 주진자(朱嗔紫)ㆍ전 판관 유승유(柳升濡)ㆍ내자 판관 김유진(金由畛)ㆍ찰방 최심(崔潯)ㆍ길주판관(吉州判官) 안위(安位)ㆍ부령(部令) 이수동(李秀東)ㆍ진해현감(鎭海縣監) 김이정(金利貞)ㆍ사정 김약회(金若晦)ㆍ부사직 설석(薛晳)ㆍ여경(余慶)ㆍ행수(行首) 이견수(李堅秀)ㆍ전직 권격(權格)ㆍ별시위 송복리(宋復利)ㆍ급제(及第) 이효례(李孝禮)·성달생(成達生)ㆍ박근(朴根)ㆍ박호문(朴好問)ㆍ이치(李菑)ㆍ이구상(李具商)ㆍ홍치(洪治)ㆍ남궁계(南宮啓)ㆍ유강(柳江)ㆍ정중수(鄭中守) 등도 이름을 올렸다.

한 집안의 근친간(近親間)인 고모부와 조카, 삼촌과 조카와도 정을 통했다. 좌의정(左議政) 이귀령(李貴齡)의 아들 이돈(李敦)과도 관계를 하였고, 고려말 홍건적(紅巾賊)을 몰아낸 명장(名將) 변안열(邊安烈)의 손자 행수(行首) 변상동(邊尙同)과 이성계의 의형제 이지란(李之蘭)의 손자 상호군 이효량(李孝良)도 끼어있었다. 변상동(邊尙同)은 이승(李升)이 감동(甘同)을 첩(妾)으로 정하여 거느리고 살 때에 몰래 훔쳐서 간통한 후 여러 달 동안 간통했다. 이효량(李孝良)은 감동의 전 남편 최중기의 매부(妹夫)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이효량(李孝良)은 처남(妻男)의 정처(正妻) 즉 처남댁과 간통한 것이다. 또 우의정(右議政) 정탁(鄭擢)이 먼저 감동(甘同)과 간통(姦通)하고 첩으로 들였는데, 이를 알고도 조카인 총제(總制) 정효문(鄭孝文)이 고의로 범했으니 강상(綱常)의 죄를 지은 것으로 행실이 짐승과 같다고 하였다. 정효문은 이 일이 들통나서 참수형을 선고받았다가 공신(功臣)의 아들이고 대사면(大赦免) 이전의 일이라는 이유로 면죄(免罪)되었다. 권격(權格)은 고모부(姑母夫)인 이효례(李孝禮)가 일찍이 간통한 것을 알면서도 자기가 또 여러 차례 간통했다.


수정장(水精匠) 장지(張智)ㆍ안자장(鞍子匠) 최문수(崔文殊)ㆍ은장(銀匠) 이성(李成) 등 중인계급(中人階級)이었던 기술자들도 상당수에 달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내놈들은 여자 치마폭에 파묻히면 불법(不法)과 탈법(脫法)도 마다하지 않는다. 전수생(田穗生)은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의 자리에 있으면서 독서생(讀書生)의 양식(糧食)을 청하는 단자(單子)와 맹인(盲人)이 양식을 청하는 단자(單子)를 위조(僞造)하여, 군량미(軍糧米)를 빼돌려 감동에게 보내주었다. 해주판관(海州判官) 오안로(吳安老)는 감동을 관아(官衙)에 끌어들여 간통하고, 관청(官廳)의 물건까지 팔기도 하고 주기도 하였다. 이승(李升)과 이돈(李敦)은 감동의 신분을 알고도 태연하게 간통하면서 감동의 아버지 유귀수(兪龜壽)의 집에도 드나드는 뻔뻔한 인간이었다. 그야말로 조선의 기강(紀綱)을 송두리째 뒤흔든 셈이었다.

조정(朝廷)을 뒤흔든 음행(淫行) 사건은 두 달 남짓 조사와 판결이 이어졌다. 결국 감동은 대명률(大明律)의 준거(準據)에 따라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개가(改嫁)한 여자에 해당하는 벌을 받았다. 치죄(治罪)는 구체적으로 “유감동이 최중기와 부부로 살 적에 김여달(金如達)에게 겁탈(劫奪) 당한 후 계속되는 간통을 하였고, 후에 남편과 함께 자다가 소변을 본다는 핑계로 김여달에게 갔다.”라고 하였다. 1427년(세종 9년) 9월 16일 교형(絞刑)에 처하도록 사헌부에서 계(啓)하였으나, 세종(世宗)이 감형(減刑)하여 변방(邊方)에 노비로 정죄(定罪)하였다.


한편 감동과 간통한 40여 명 가운데 20명만이 처벌을 받았는데, 당시의 법률 규정이나 감동의 형량(刑量)에 비해 가벼운 처벌(태형, 파면 등)을 받았다. 더욱이 피접(避接)을 간 사대부의 여인인 유감동(兪甘同)을 무뢰배들과 공모(共謀)하여 위협·공갈로 강간·폭행한 악질범(惡質犯) 김여달 조차도 극형(極刑)이나 중형(重刑)을 처하지 않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세종(世宗)의 처사이다. 원래 곤장 100대에 삼천리 변방에 유배(流配)되는 것이 합당한 형(刑)이었으나 곤장 80대로 감해졌다. 다음 해인 1428년(세종 10년) 윤달 4월 1일 유감동(兪甘同)의 천역(賤役)을 면제(免除)하여 먼 지방에 안치(安置)할 것을 명했다.

세종 통치 시기에 사건이 여러 건 더 터졌으니, 연생(延生) 사건, 금음동(今音同) 사건, 동자(童子) 사건, 어리가(於里加) 사건이다. 전 직장(直長) 안영(安永)의 아내이며 유장(柳章)의 딸 유연생(柳延生)이 그의 사촌 오빠 홍양생(洪陽生)과 더불어 몰래 간통하는 것을, 간음(姦淫) 현장(現場)에서 붙잡아 두 사람의 머리털을 잘랐다고 남편이 고소하였다. 홍양생(洪陽生)은 모친의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이성(異姓) 사촌 누이인 유연생(柳延生)을 간음하였고, 연생(延生)도 부친의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서로 간음하였다. 율(律)에 의하여 홍양생(洪陽生)은 장형 100대를 집행하여 고성(固城)에 귀양 보내고, 유연생(柳延生)은 울산(蔚山)에 안치하였다.


죽은 소윤(少尹) 조민경(曺敏卿)의 딸 금음동(今音同)은 처녀로서 이성(異姓)의 시마친(緦麻親 : 8촌 이내의 친척)인 양자부(楊子敷)와 간통을 하였고, 또 고 임득성(故林得成)의 아들인 임견수(林堅守)의 아우 임일(林逸)과도 간통하였다. 또 죽은 사정(司正) 양웅(楊雄)의 딸 양동자(楊童子)가 처녀로서 이성(異姓) 시마친(緦麻親 : 8촌 이내 친척)인 조상(曹詳)과 간통했다. 양동자(楊童子)는 고 임득성(故 林得成)의 아내 민씨(閔氏) 집에 들어가 그 아들 임견수(林堅守)와 서로 간통하고, 임견수가 동자(童子)를 유혹하여 계속 간통하려고 다른 집으로 옮겨 두었다. 금음동(今音同)과 동자(童子)는 옷을 벗기고 곤장 100대와 도형(徒刑 : 징역) 3년에 처하고, 상간남(相姦男)도 이에 준하는 형에 처했다.

이어리가(李於里加)는 병조참판 이춘생(李春生)의 딸이고, 별시위(別侍衛) 이진문(李振文)의 아내였다. 이의산(李義山)이 그녀와 간통하였는데, 그는 아버지가 병중임에도 사족(士族)의 부인과 간통을 한 것이다. 어리가(於里加)는 해진(海珍)에, 이의산(李義山)은 기장(機張)에 안치(安置)되었다. 세종은 간통행위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한 처벌을 하였다. 그 근거로 이런 교지를 내렸다. “윤수(尹須)ㆍ이귀산(李貴山)의 아내가 다 음탕하고 더러운 행위로 일이 발각되어 사형을 받았으니, 악행을 징계하는 법이 엄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건만, 감동(甘同)ㆍ금동(今同)ㆍ연생(延生) 등이 서로 잇따라 나왔으니, 남녀 사이의 정욕(情慾)을 어찌 한갓 법령(法令)만으로 방지할 수 있겠는가.” 남녀간의 애욕(愛慾)을 국법(國法)으로 다스리기는 예나 지금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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