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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Dec 06. 2022

(7) 조선의 팜므파탈 - 어우동

★ 18禁 역사 읽기 ★ (221206)

조선 최대의 섹스 스캔들인 감동(甘同) 사건이 발생한 지 50여 년이 지난 성종 11년(1480)에 동방예의지국의 얼굴에 똥물을 끼얹는 희대(稀代)의 어우동(於宇同) 사건이 터진다. 어우동(於宇同)은 원래 지체 있는 사대부(士大夫) 집안의 딸이었다. 승문원(承文院) 지사(知事 : 종3품)였던 부(父) 박윤창(朴允昌)과 모(母) 정귀덕의 딸로서 이름이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6년(1500) 6월 12일에는 박구마(朴丘麻)라고 기록되어 있다. <용재총화(慵齋叢話)>와 <송계만록(松溪漫錄)>, 그리고 <대동야승(大東野乘)>에는 어우동(於宇同)이라고 나오고, 실록(實錄)에는 어우동(於宇同) 또는 어을우동(於乙宇同)이라고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어우동(於宇同) 또는 어을우동(於乙宇同)이란 말이 천민(賤民)이나 노비(奴婢)의 이름으로는 몰라도 사대부의 이름으로는 좀 낮 설고 어색(語塞)하다. 조선시대에 ‘을(乙)’자는 대체로 ‘ㄹ’ 받침으로 활용되어서 ‘얼우동(於乙宇同)’으로 불리 수도 있다.

<영화, 어우동 : 주인 없는 꽃. 포스터>

당시 결혼한 여성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습속(習俗)을 고려한다면, 이름이 아니라 음란(淫亂)한 여자를 지칭(指稱)한 별칭으로 볼 수도 있겠다. 즉 ‘얼우동(同)’이라고 불렀다면 ‘얼우’는 ‘얼우다’에서 나온 말이고, 남녀의 성적(性的) 결합을 나타내는 말이니, 같을 동(同) 자를 더해서 ‘같이 교접(交接)을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다. 국립국어원(國立國語院)에서 풀이한 ‘어른’이란 말은 어원적(語源的)으로 ‘어르(교합 : 交合) + 우(사동접사) + ㄴ(관형사형 어미)’로 분석하고, 이때 ‘어르다, 얼우다’는 남녀 간의 성적(性的) 교감(交感), 즉 혼인(婚姻)의 의미로 추정(推定)한다고 했다. 황진이(黃眞伊)의 시조에 나오는 ‘얼운님 오신 날 밤이어든’이란 말은 추워서 얼어붙은 님이라기보다는 이미 깊은 사랑을 나눈 님이나 같이 교합(交合)할 님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어우동의 한 장면>

그녀는 출신 가문으로 보아 미색(美色)과 학식(學識)을 겸비(兼備)한 여자였을 것이다. 내로라하는 수많은 인사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든 것으로 보아서 단순히 자색(姿色)만으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퇴계(李退溪)의 제자인 권응인(權應仁)의 <송계만록(松溪漫錄)>에 ‘부여회고시(扶餘懷古詩)’라는 제목으로 어우동(於宇同)이 지었다고 추정되는 시(詩)를 소개하고 있다.

백마대가 빈 지 몇 해가 흘렀던고 / 白馬臺空經幾歲(백마대공경기세)

낙화암도 선채로 많은 시간 흘렀네 / 落花巖立過多時(낙화암립과다시)

청산이 만약 입 다물지 않았다면 / 靑山若不曾緘黙(청산약부증함묵)

천고의 흥망을 물어 알 수 있으리. / 千古興亡問可知(천고흥망문가지)

그는 책에서 음부(淫婦)이면서 이와 같이 시에 능(能) 하니, 이른바 재주는 있고 행실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評)했다.

<백마강의 백화정>

그녀는 종실(宗室)인 태강수(泰江守 : 정4품) 이동(李仝)에게 시집을 갔다. 이동(李仝)의 족보(族譜)는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세종(世宗)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손자로 서자(庶子)이다. 그래도 외명부(外命婦) 품계(品階)로 따지면 정4품인 혜인(惠人)으로 종친(宗親)의 아내인 셈이다. <수(守)>라는 관직은 종친에게 주는 명예직으로 대군(大君)-군(君)-정(正)-수(守)-(令)-감(監)의 순서로 부여한다. 기준은 왕이나 세자로부터의 촌수(寸數)나 세수(世數)로 정한다. 이동(李仝)과 어우동의 사이는 처음에 괜찮았을 것이다. 둘 사이에 낳은 건지는 미상(未詳)이지만 번좌(番佐)라는 이름의 딸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은 연경비(燕輕飛)라는 기생에게 빠져들었다. 밤낮으로 그녀와 뒹굴자 어우동도 투기(妬忌)하며 신세가 한탄스럽지만, 이동(李仝)에게는 어우동이 눈엣가시가 되어버렸다. 드디어 태강수는 어우동의 흠을 잡아 집에서 내쫓아버리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안 종부시(宗簿寺 : 종친들을 관장하는 관서)에서 임금에게 부당하다고 상소(上疏)하여 강제로 재결합을 시킨다. 예종(睿宗)부터 성종(成宗)까지 연경비(燕輕飛)라는 기생은 꾀나 잘 나가는 미색(美色)이었다. 이 기생도 수많은 염문(艶聞)을 뿌리며 남성 편력(遍歷)을 하였다. 나주판관(羅州判官) 황사장(黃事長)이 그녀를 데리고 황해도 배천(白川)까지 가서 해를 넘기도록 데리고 놀았고, 족친위(族親衛) 윤유덕(尹有德)은 국상을 당했는데도 그녀와 간통하다가 발각(發覺)되었다. 성종 때는 주문부사(奏聞副使) 이계동(李季仝)이 왕이 베푸는 선정전(宣政殿) 잔치 자리에서 왕이 보는 앞에서 연경비(燕輕飛)에게 희롱하였고, 종친인 명산정(明山正 : 정3품) 이금정(李金丁)은 연경비(燕輕飛)를 첩기(妾妓)로 삼았는데, 당양위(唐陽尉) 홍상(洪常)은 그녀와 몰래 간통하다가 고발되어 조정에서 논죄(論罪)로 물의(物議)를 일으켰다. 이런 기녀(妓女)를 이동(李仝)이 탐(貪)하여 본처(本妻)를 버린 것이다.

<영화, 어우동 : 주인없는 꽃>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그녀의 행실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나이 젊고 훤칠한 은장인(銀匠人)을 불러 은그릇을 만들었다. 그녀는 이를 기뻐하여 매양 남편이 나가고 나면 계집종의 옷을 입고 장인(匠人)의 옆에 앉아서 그릇 만드는 정묘(精妙)한 솜씨를 칭찬(稱讚)하더니, 드디어 내실(內室)로 이끌어 들여 날마다 마음대로 음탕(淫湯) 한 짓을 하다가, 남편이 돌아오면 몰래 숨기곤 하였다. 그의 남편은 자세한 사정을 알고 마침내 어우동을 다시 내쫓아 버렸다.


그 여자는 이로부터 방자(放恣)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였다. 그의 계집종 은설(銀雪)도 역시 예뻐서 매양 저녁이면 옷을 단장(丹粧)하고 거리에 나가서, 잘생긴 소년을 이끌어 들여 여주인의 방에 들여 주고, 저는 또 다른 소년을 끌어들여 함께 잠자기를 매일(每日)처럼 하였다. 꽃피고 달 밝은 저녁엔 정욕(情慾)을 참지 못해 둘이서 도성(都城) 안을 돌아다니다가 사람에게 끌리게 되면, 제 집에서는 어디 갔는지도 몰랐으며 새벽이 되어야 돌아왔다. 길가에 집을 얻어서 오가는 사람을 점찍었는데, 계집종이 말하기를, “누구는 나이가 젊고 누구는 코가 커서 주인께 바칠 만합니다.” 하면 그녀가 말하기를, “누구는 내가 맡고 누구는 네게 주리라.” 하며 실없는 말로 희롱(戲弄)하여 지껄이지 않는 날이 없었다. 드러내놓고 기루(妓樓)라고 할 수 없어서 그 집 주변에 있는 배나무를 본 따서 그들끼리 은밀하게 이원(梨園)이라 불렀다.

그녀는 또 종친(宗親)인 방산수(方山守) 이란(李瀾)과 더불어 사통(私通)하였는데, 방산수는 나이 젊고 호탕하여 시(詩)를 지을 줄 알므로, 그녀가 이를 사랑하여 자기 집에 맞아들여 부부처럼 지냈었다. 하루는 방산수가 그녀의 집에 가니 그녀는 마침 봄놀이를 나가고 돌아오지 않았는데, 다만 소매 붉은 적삼(赤衫)만이 벽 위에 걸렸기에, 그는 시를 지어 쓰기를,

물시계는 또옥또옥 야기가 맑은데 / 玉漏丁東夜氣淸(옥루정동야기청)

흰 구름 높이 걷혀 달빛이 분명하네 / 白雲高捲月分明(백운고권월분명)

작은 방은 조용한데 향기가 남았고 / 間房寂謐餘香在(간방적밀여향재)

꿈속의 정을 지금 같이 그리겠구나 / 可寫如今夢裏情(가사여금몽리정)

하였다.

어우동의 상대는 종친을 비롯한 고관대작(高官大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근친(近親) 간인 경우도 있고, 노비(奴婢)나 하층민 등이 골고루 등장한다. 어우동은 팔촌 시아주버니가 되는 수산수 이기(守山守 李麒 : 정종대왕의 현손)와 간통을 하고서도 또다시 육촌 시아주버님인 방산수 이란(方山守 李瀾 : 세종대왕의 손자)과 통정(通情)을 했다. 어우동이 미복(微服)을 하고 방산수(方山守) 이란(李瀾)의 집 앞을 지나다가, 이란(李瀾)이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다. 이란(李瀾)은 어우동의 자색(姿色)도 자색이지만 한시(漢詩)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짓는 재능에 반하여 정호(情好)가 매우 두터웠다. 그래서 이란(李瀾)이 자기의 팔뚝에 어우동의 이름을 새기기를 청하자 먹물로 이름을 새겨줬다. 또 단오(端牛) 날에 화장을 하고 나가 도성(都城) 서쪽에서 그네 뛰는 놀이를 구경하고 있었다.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가 이를 보고 좋아하여 그 계집종에게 묻기를, “뉘 집의 여자냐?”하였더니, 계집종이 대답하기를, “내금위(內禁衛)의 첩(妾)입니다.”라고 거짓말하였다. 그러자 이기(李驥)가 그녀를 남양군(南陽郡)의 경저(京邸)로 맞아들여 정(情)을 통한 후에 어우동의 길가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또 그녀의 계집종이 “오종년(吳從年)이란 이는 일찍이 사헌부(司憲府)의 도리(都吏)가 되었고, 용모(容貌)도 아름답기가 태강수보다 월등히 나으며, 족계(族系)도 천(賤) 하지 않으니, 배필(配匹)을 삼을 만합니다. 주인(主人)께서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마땅히 주인을 위해서 불러오겠습니다.”하니, 어우동이 승낙했다. 어느 날 계집종이 오종년을 데려오니, 어우동이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다. 또 전의감(典醫監) 생도(生徒) 박강창(朴强昌)이 종(奴)을 매매하고자 어우동의 집에 가서 값을 직접 의논하기를 청했다. 어우동이 나와서 그를 보고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다. 어우동이 또 그의 팔뚝에다 이름을 새겼다. 또 이근지(李謹之)란 자가 있었는데, 어우동이 음행(淫行)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하려고 하여 직접 그녀의 대문(大門)에 가서 거짓으로 방산수(方山守)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칭했다. 어우동이 나와서 그를 보고 불러들여 간통을 하였다. 내금위(內禁衛) 구전(具詮)은 어우동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았다. 하루는 어우동이 정원(庭園)에 있는 것을 보고, 담을 뛰어넘어 서로 붙들고 익실(翼室 : 본채 옆에 딸린 방)로 들어가서 간통을 하였다. 생원(生員) 이승언(李承彦)이 집 앞에 서 있다가 어우동이 걸어서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 계집종에게 묻기를, “지방에서 뽑아 올린 새 기생(妓生)이 아니냐?”하니, 계집종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했다. 이승언이 뒤 따라가며 희롱도 하고 말도 붙이며 그녀 집에 이르러서, 침방(寢房)에 들어가 비파(琵琶)를 가져다가 탔다. 어우동이 성명(姓名)을 묻자, 대답하기를, “이생원(李生員)이니라.”했다. 어우동이 말하기를, “장안(長安)의 이생원(李生員)이 얼마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알겠는가?”하므로, 이승언이 “춘양군(春陽君)의 사위 이생원(李生員)을 누가 모르는가?”하였다. 마침내 함께 동숙(同宿)하였다.

<급제자 유가행진>

학록(學錄) 홍찬(洪璨)이 처음 과거(科擧)에 올라 유가(遊街 : 급제자의 행진)하면서 방산수(方山守)의 집을 지날 적에 어우동이 살며시 엿보고 간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 뒤에 길에서 또 만나자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슬쩍 건드려, 홍찬이 그녀의 집에 따라와 간통하였다. 서리(署吏) 감의향(甘義享)은 길에서 어우동을 만나자, 희롱하며 따라가서 그녀 집에서 간통하였는데, 어우동이 또 그의 등에다 이름을 새겼다. 밀성군(密城君 : 세종의 서자)의 노비(奴卑) 지거비(知巨非)가 이웃에서 살았다. 늘 간통(奸通)하려고 틈을 보다가, 어느 날 새벽에 어우동이 일찍이 나가는 것을 보고 위협했다. “부인(婦人)께선 어찌하여 밤을 틈타 나가시오? 내가 장차 크게 떠들어서 이웃 마을에 모두 알게 하면, 큰 옥사(獄事)가 장차 일어날 것이오.”라고 했다. 어우동이 두려워서 마침내 안으로 불러들여 간통을 하였다. 방산수(方山守) 이란(李瀾)이 옥중(獄中)에 있었는데, 어우동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감동(甘同)이 많은 간부(奸夫)로 인하여 중죄(重罪)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너도 사통(私通)한 바를 숨김없이 많이 끌어대면, 중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하였다. 이로 인해 어우동이 간부(奸夫)를 많이 열거(列擧)하고, 방산수 이란(李瀾)도 어유소(魚有沼)ㆍ노공필(盧公弼)ㆍ김세적(金世勣)ㆍ김칭(金偁)ㆍ김휘(金暉)ㆍ정숙지(鄭叔墀) 등을 끌어대었다. 그러나 조정의 공신 등 관련자가 많아서 덮기 위해 그런지, 증거(證據)가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대부분 방면(放免) 되었다. 어유소(魚有沼)는 그녀와 사당(祠堂)에서 사통(私通) 하고, 김휘(金暉)는 그녀를 길에서 만나 근처 민가(民家)를 급히 빌려 번개 섹스를 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 어미가 말하기를, “사람이 누군들 정욕(情慾)이 없겠는가? 내 딸이 남자에게 혹(惑)하는 것이 다만 너무 심할 뿐이다.”하였다. 사람들이 어우동의 어미 정씨(鄭氏)도 음행(淫行)이 있을 것을 의심하였는데, 그녀는 남편을 구타(毆打)하고 노복(奴僕)과 간통하였으며, 어우동의 오빠인 박성근(朴成根)을 어릴 때부터 학대(虐待)하다가 나중에 아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드라마 왕과나 : 어우동의 처형>

감동(甘同)은 세종 때의 관대한 판결 때문에 목숨만은 부지했지만, 어우동이 살았던 성종(成宗) 때는 그런 패륜(悖倫)이 씨도 안 먹혔다. 성종은 개가금지법(改嫁禁止法)도 만들고 여성의 성(性)을 아주 강하게 옥죄면서 그녀를 끝내 교수형(絞首刑)에 처했다. 예나 지금이나 남녀 간의 간통은 현행범(現行犯)이 아니면 증거를 잡기 어렵기 때문에 의금부(義禁府)의 문초(問招) 과정에서 한결같이 관계를 부인하고 나서면 도리가 없다. 역모죄(逆謀罪)도 아닌 사건으로 고위관료나 종친들을 고문으로 국문(鞫問)하기도 곤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녀와 통정했던 남성들은 성종 13년 8월 이란(李瀾)과 이기(李驥)가 유배형(流配刑)에서 풀려난 것을 마지막으로 모두 석방되고 조선의 남성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떠들었다.

<정인숙 사건 보도 : 경향신문>

조선시대만이 아니라 현대에 들어와서 일어난 정인숙 사건도 이와 비슷하긴 마찬가지였다.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강변도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를 가장한 총격(銃擊) 살인(殺人) 사건이 있었다. 피해자 정인숙(본명: 정금지)은 총상(銃傷)으로 죽고, 그 차를 운전하던 오빠 정종욱은 넓적다리를 관통(貫通) 당했으나 생존해서 구조된 사건이다. 그 사건으로 당시 청와대에서는 이른바 ‘육박전’이 일어났다는 루머가 있었다. 육영수 여사에 ‘육’자와 박 대통령의 ‘박’자를 합쳐서 대통령 부부의 말다툼을 패러디한 것이다. 정인숙은 명지대를 중퇴하고 선운각(仙雲閣)이라는 고급 요정(料亭)에서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의 정재계 인사들의 주요 미팅 장소는 요정이었다. 말하자면 요정(料亭) 정치(政治)를 하던 시절이었다.

<선운각>

선운각(仙雲閣)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후처인 장 모 씨 명의(名義)로 1967년에 개업하여 우이동 북한산 자락에 있던 우리나라 3대 요정 중 최고였고, 정인숙이 이 요정은 얼굴 마담이었다. 3부 요인(要人)을 포함한 정계 모임이나 국가 원수와 외교사절(外交使節)들의 접대 장소였다. 선운각은 그 후 한정식 고향산천, 영빈관 등으로 운영되다가 지금은 기도원(祈禱院)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다음으로 성북동에 1951년에 개업한 대원각(大苑閣), 1972년에 개업한 삼청각(三淸閣)이 있었다. 대원각은 시인 백석(白石)과 연애로 유명한 조선 권번(券番) 출신 자야(子夜) 김영한 씨가 운영하다가 법정(法禎) 스님에게 기증하여, 지금은 길상사(吉祥寺)로 변했다. 삼청각은 남북협상 대표단 만찬장(晩餐場)으로 기획되었고, 아직도 한정식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네 번째 요정은 시내 중심이었던 익선동에 있던 오진암(梧珍庵)이었다. 접근성이 좋았지만 시대 변화에 따라 사라지고 지금은 호텔 건물로 변화되고, 옛날의 건물들 일부는 부암동 안평대군(安平大君) 집터로 옮겨서 무계정사(武溪精舍)로 불리고 있다.

<삼청각>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정인숙의 수첩에는 고위층의 이름과 연락처가 기록되어 있었다. 정일권 국무총리,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 이후락 주일(駐日) 대사는 물론이고 심지어 박정희 대통령도 있었고, 군 장성, 굴지(屈指)의 재벌그룹 회장, 장관, 국회의원 등 27명이 기록되어 있었다. 정인숙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과연 누구의 아들인지가 장안(長安)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사자는 미국에서 성장한 후 귀국하여 전 국회의장을 상대로 친자(親子) 확인 소송을 하려고 했으나 소송 상대가 사망하는 바람에 무위(無爲)로 끝났다. 정인숙이 수첩에 적힌 사람들과 정(情)을 통했는지는 당사자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연락처까지 있는 상대니까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면 어우동 사건과 별 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역사는 닮은꼴이라는 말이 있고, 돌고 돈다는 말도 있다.

<길상사>

역사적으로나 역설적(逆說的)으로 말해 문란(紊亂)한 성문화 방면에서 왕을 제외한 우리나라 남자들은 동시대의 여자들에 비해 한 수 아래인 것 같다. 서양에는 카사노바, 돈 환 같은 자들이 버젓이 등장하는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남자가 역사적으로 한참 후에나 등장(登場)한다. 1955년에야 나타나는데, 1년 남짓 기간에 무려 70여 명의 여자들을 농락(籠絡)한 희대(稀代)의 ‘박인수(朴仁秀) 사건’이 그것이다. 감동(甘同)에 비해 무려 530년이나 뒤진 시기에 홀연히 등장해 겨우 남자들 체면(?)을 세워줬다. 박인수는 외국물 먹은 해군 헌병(憲兵) 대위를 사칭(詐稱)해서 젊은 여자들을 밤나무 밑에서 알밤 줍듯이, 일주일 굶긴 양어장에서 낚시하듯이 낚았다.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헌병 부사관(副士官)으로 입대하여 6·25 휴전(休戰) 후에 예편하였다. 참전(參戰) 중에 애인이 배반하자 예편 후에 장교 구락부(俱樂部), 국일관, 낙원장 등을 무대로 소위 ‘처녀 사냥’에 나섰다. 훤칠한 키에 미남자였고, 헌병 시절 익힌 춤 실력을 바탕으로 여성들을 유혹(誘惑) 하니 안 넘어갈 여자가 없었나 보다. 피해자의 대부분은 여대생이었으며 그중에는 국회의원, 고관(高官)의 딸도 있어서 당시 사회에 원자폭탄만큼이나 큰 충격(衝擊)을 줬다.

<박인수의 참회록>

법정에서 검사가 혼인을 빙자(憑藉)한 간음(姦淫)이라고 주장했으나, 박인수는 자신은 결혼을 약속한 적이 없고, 여성들이 스스로 몸을 제공했다고 했다. 또 그 많은 여대생은 대부분 처녀가 아니었으며 단지 미용사였던 한 여성만이 처녀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박인수의 주장은 당시 미혼 처녀의 순결의 확률이 70분의 1이다라는 유행어를 낳으며 세상의 큰 관심을 모았었다. 박인수는 또 그를 고소(告訴)하겠다고 나선 년은 불과 2~3명뿐이다. 그들도 뒤가 구리기 때문이다. 카바레에서 춤으로 녹이면서, 영어 몇 마디 지껄이면 안 넘어오는 년이 없었다. 홀에서 녹작지근하게 춤추고 나면 당근 여관 가는 게 코스다. 이렇게 주장했다. 이에 1심 법정 권순영 판사는 “법은 정숙(貞淑)한 여인의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정조(貞操)만을 보호한다.”라고 하면서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고, 단지 공무원 사칭(詐稱)에 대해서만 유죄를 선고하여 2만 환의 벌금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2심, 3심에서는 유죄로 1년의 징역형이 확정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성문제(性問題)는 인간사에 늘 일어나고 세인의 관심을 끄는 가장 뜨거운 주제(主題) 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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