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竹枝詞(죽지사) : 죽지사(竹枝詞)는 원래 촉(蜀)의 파유(巴胚) 지역에서 성행하던 대나무와 관련된 민가(民歌)였는데, 기주자사(夔州刺使)로 부임한 유우석이 이들 민가를 듣고 흥을 느껴 곡에 맞춰 시를 쓰기 시작한 뒤에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양만리(楊萬里), 범성대(范成大), 왕사정(王士禎) 등 많은 문인들이 같음 이름의 작품을 썼다. 말하자면 유우석에 의해 발굴되고 가공되고 창제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죽지사는 고려시대 이제현이 유우석의 〈죽지사〉를 근거로 〈소악부〉를 지었다. 성현(成俔)이 〈죽지사〉 10수를 지어 ≪허백당풍아록(虛白堂風雅錄)≫에 수록하였다. 허난설헌(許蘭雪軒)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의 작품 속에서도 이런 종류의 작품이 간헐적으로 발견된다.
죽지사는 가곡이다. 복사꽃은 산에 가득하고, 봄물은 산을 박차고 흐른다. 복숭아꽃의 붉음이 쉽게 시드는 것은 마치 낭군의 뜻이 쉽게 쇠해지는 것과 같고, 봄물의 흐름이 무한한 것은 마치 나의 근심이 무한한 것과 같다. 이 역시 남녀 간에 서로 희롱하는 뜻이다. ○ 죽지사는 파투지방에 전해오는 노래인데, 오직 좁은 산속에서 잘 불렀다. 유우석은 죽지사 서문에서 건안 마을의 아이가 죽지사를 연달아 부르며, 짧은 젓대를 불고 북을 쳐서 곡절(曲節)에 맞추었다.
* 劉禹錫(유우석, 772~842) : 당나라 중기 낙양인(洛陽人)으로 자(字)가 몽득(夢得)이다. 덕종(德宗) 정원(貞元) 초(785)에 진사로 정계에 진출한 후, 795년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회남절도사 두우(杜佑, 735~812)의 막료가 되었으며,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된 후에는 왕숙문(王叔文, 758~806) · 유종원 등과 함께 환관과 권문세족들의 잘못된 권력을 쇄신하는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 왕숙문은 덕종 때 왕비(王 )와 더불어 태자의 독서를 맡은 동궁시독(東宮侍讀)을 지냈다가, 태자가 순종(順宗)에 즉위하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순종의 신임을 받은 왕숙문은 위집의(韋執誼)를 재상으로 추천하였으며, 또한 유우석과 유종원 등을 조정의 대신으로 기용해 개혁정치를 펼쳤다. 왕숙문이 어머님의 병환으로 물러난 지 146일 만에 환관 구문진(俱文珍)이 순종을 퇴위시키고 헌종(憲宗)을 옹립하면서 왕숙문은 투주사호참군(渝州司戶參軍)으로 쫓겨난 뒤 다음 해 피살되었다. 그 결과 유우석과 유종원도 헌종 영정(永貞) 원년(805)에 지방으로 쫓겨났다. 유종원은 영주(永州, 호남 영릉)로, 유우석은 낭주(朗州, 호남 상덕)로 좌천되었다. 유우석이 좌천되었을 때, 지방 관원은 그가 못마땅하여 숙소를 세 번이나 옮겼는데, 세 번째 옮긴 숙소는 딸랑 침대 하나만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럴 때 그는 이렇게 <누실명(陋室銘)>을 읊었다.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면 이름난 산이요. 물은 깊지 않아도, 용이 살면 영험한 물이지. 이곳은 누추한 방이나, 오직 나의 덕으로도 향기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