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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Dec 16. 2024

148> 漢宮詞(한궁사) / 한나라 궁중의 노래

漢詩工夫(241004)

漢宮詞(한궁사) / 한나라 궁중의 노래

 - 李商隱(이상은)

靑雀西飛竟未回

청작서비경미회

○●○○●●◎

파랑새 서쪽으로 날아가 끝내 돌아오지 않고


君王長在集靈臺

군왕장재집령대

○○○●●○◎

임금님은 집령대에서 오래도록 기다리네.


侍臣最有相如渴

시신최유상여갈

●○●●○○●

시립한 신하 중 사마상여(司馬相如) 가장 목말라


不賜金莖露一盃

불사금경로일배

●●○○●●◎

금경의 이슬 한 잔 하사하지 않는구나.

* 漢宮詞(한궁사) : 宮詞(궁사)는 주로 임금의 궁중 생활을 소재로 일어나는 사건을 많이 묘사하며, 특히 후궁과 비빈(妃嬪)들의 근심스러운 정황이나 적막한 심경을 즐겨 반영한다. 형식은 대개가 7언절구가 중심을 이룬다. 당시(唐詩) 가운데에 이런 작품이 대단히 많은데, 작자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활이나 주제를 반영하는 정도에서는 차이가 많이 난다. 한궁사(漢宮詞)는 한무제(漢武帝)의 고사(故事)를 노래한 것이다. 군옥산(羣玉山)에 사는 서왕모(西王母)가 파랑새를 시켜 한무제(漢武帝)를 찾아가겠다 하였다. 그날 밤 서왕모가 하강(下降)하여 한무제와 운우(雲雨)의 정을 맺었다. 서왕모는 한무제에게 자신의 정원에서 자라 3,000년마다 1번씩 열매가 열리고 복숭아를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신선 세계의 불로장생(不老長生) 반도(蟠桃) 7개를 바치며 3년 뒤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하고 떠났다. 그러나 파랑새는 서쪽으로 날아간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욕심 많은 황제는 서왕모를 그리며 늘 집영대에서 기다렸고, 뛰어난 문인인 신하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당뇨병(소갈병)을 앓아 늘 물을 마셔야 하는 처지인데도, 금경(金莖)에 받아 모은 영약인 이슬을 한 잔도 주지 않았다. 시인은 이러한 한무제(漢武帝)의 옛 일을 빌려 현재의 당(唐) 나라를 풍자하였다.

* 靑雀(청작) : 고지새. 파랑새. 신과 인간 사이를 연결해 주는 새이다. 한무제(漢武帝)가 7월 초하루, 승화전(承華殿)에서 재(齋)를 올릴 때, 푸른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울었다. 동방삭(東方朔)에게 무슨 새냐고 물으니, 선녀 서왕모(西王母)가 오늘밤 내려온다는 소식을 전하러 온 새라 대답했다.

* 西(서) : 신녀(神女) 서왕모(西王母)가 산다는 서쪽의 옥돌로 된 산인 군옥산(羣玉山)을 가리킨다.

* 集靈臺(집영대) : 한 무제가 신선 서왕모(西王母)를 영접하기 위해 화음(華陰, 지금의 산시 성 화현華縣)에 지은 궁전. 한편 당현종(唐太宗)이 섬서성(陝西省) 임동(臨潼)에 세운 누대도 집령대라 함.

* 相如渴(상여갈) :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목마름. 사마상여는 한 무제 때의 문인으로 소갈병(消渴病 : 당뇨병)이 있어 물을 자주 마셨음.

* 金莖(금경) : 20장(丈) 높이의 이슬을 받아 내리는 구리 기둥인 동주(銅柱)를 가리킨다. <漢書郊祀志(한서교사지)>에 의하면, 한무제가 건장궁(建章宮) 신명대(神明臺)에 금경을 세우고 금경 위에 이슬을 받는 선인장(仙人掌)처럼 만든 큰 구리 쟁반인 승로반(承露盤)을 올려서 이슬을 받아 이 이슬에 옥을 바수어 만든 가루 옥설(玉屑)을 타서 마시며 ‘불로장생의 영약(靈藥)’이라 하였다.

此(차)는 言求仙之虛誕也(언구선지허탄야)라. 靑雀(청작)은 卽靑鳥(즉청조)니, 西王母之使(서왕모지사)라. 相傳漢武帝會(상전한무제회)하야. 西王母許以三年後復來(서왕모허이삼년후부래)러니, 其後(기후)에 竟未回(경미회)하니, 是(시)는 神仙(신선)이 無驗矣(무험의)라. 武帝建集靈望仙諸臺(무제건집령망선제대)하고, 帝長在臺(제장재대)하여, 以候其來(이후기래)라.

이는 신선을 찾는 허투루 낳은 말이다. 청작은 파랑새니 서왕모의 사신이고, 전하여 한무제와 회합하고, 3년 후 다시 올 것을 서왕모가 허락하였는데, 그 후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는 신선의 증험이 없는 것이다. 무제가 집영대와 신선을 바라는 여러 대를 세우고, 무제가 오래도록 대에 머물면서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司馬長卿(사마장경)이 有消渴之疾(유소갈지질)하고, 旣侍武帝則仙人(기시무제즉선인)이 豈不能醫(기불능의)리오. 帝取雲表露(제취운표로)하야. 和玉屑以飮之(화옥설이음지)하야. 求長生(구장생)하니, 露果有驗(로과유험)이면 何不賜一杯於相如(하불사일배어상여)하야. 以愈其疾耶(이유기질야)아. 病且不愈而安望成仙(병차불유이안망성선)이리오. 是日(시일)에 憲宗(헌종)이 服金丹暴崩(복금단포붕)하고, 穆宗(목종)이 復踵前轍故(부종전철고)로 義山(의산)이 作此詩(작차시)하야. 以寄諷諫(이기풍간)이라.

사마장경(사마상여)이 소갈병을 앓고 있어서, 이미 무제를 모시고 있었는데, 신선이 어찌 그의 소갈병을 고칠 수 없겠는가? 무제가 구름 표면의 이슬을 취하여 옥가루와 배합하여 마셔야 장생불사를 할 수 있다. 이슬이 실제로 효험이 있다면 어째서 사마상여에게 한 잔을 하사 하시어 그 병을 낫게 하시지 않는가? 병이 또한 낫지 않는다면 어찌 신선이 되기를 바라겠는가? 이날에 헌종이 금단을 복용하고 갑자기 죽고, 목종이 다시 전철을 밟았으므로 의산(이상은)이 이 시를 지어서 풍간에 붙인 것이다.

* 李商隱(이상은) : 813년 ~ 858년(추정), 자는 의산(義山)이고, 호는 옥계생(玉溪生), 번남생(樊南生)이다. 허난(河南) 싱양(滎陽) 출신이다. 조부 이보(李俌)는 후베이(湖北)성 징저우(邢州)의 녹사참군(彔事參軍)을 지냈으며, 부친 이사(李嗣)는 중시어사(中侍御史)를 맡았다. 이상은이 태어날 때 부친은 가현령(嘉縣令)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때부터 가세가 몰락했다. 이상은은 10세에 아버지 이사를 병으로 잃었고, 그와 어머니, 동생들은 허난의 고향으로 돌아왔고, 빈곤하게 생활하며 친척들의 도움에 의존해 살아갔다. 이상은은 장자로서 집안을 지탱하는 책임을 졌다. 25세에 令狐楚(영호초)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進士(진사)가 되고 校書郎(교서랑), 東天節度書記(동천절도서기), 檢校工部郎中(검교공부낭중) 등 높지 않은 벼슬을 역임했다. 영호초의 반대파인 王茂元(왕무원)의 사위가 되어 두 정파 사이를 내왕하여 절조를 비난받기도 했다. 그의 시는 서정적인 작품이 많고 修辭(수사)를 중히 여기어 정밀하고 화려하다고 하며, 典故(전고)를 많이 인용했다. 시를 지을 때는 참고 서적이 자리를 꽉 차지해 물개가 물고기를 늘어놓은 것 같았다고 한다. 당 나라 말기와 五代(오대)를 통하여 그의 시는 크게 유행했다. 溫庭均(온정균)과 함께 ‘溫李’로 불리웠으며, 이들의 시파를 西崑體詩派(서곤체 시파)라 했다. 그는 일생을 불우하게 지냈지만, 杜甫(두보)의 전통을 이은 만당의 대표적 시인으로 높이 평가받으며 저서에 ‘義山詩集(의산시집 6권)’과 ‘西崑唱酬集(서곤창수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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