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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Dec 22. 2024

151> 四皓廟(사호묘) / 사호의 사당

漢詩工夫(241004)

四皓廟(사호묘) / 사호의 사당

 - 李商隱(이상은)

本爲留侯慕赤松

본위유후모적송

●●○○●●◎

본래 유후인 장량은 신선 적송자를 사모하고


漢庭方識紫芝翁

한정방식자지옹

●○○●●○◎

한나라 조정에서 자지옹(상산사호)을 알았는데


蕭何徒解追韓信

소하도해추한신

○○○●○○●

소하는 한신 뒤를 쫓을 줄만 알았으니


豈得虛當第一功

기득허당제일공

●●○○●●◎

어찌 헛되이 제일의 공덕을 얻을 수 있나.

* 四皓(사호) : 진시황 때에 난리를 피해 섬서(陝西)성 상산(商山)에 들어가 은거한 네 노인인데, 상산사호(商山四皓)라고 일컫는다. 동원공(東園公)·기리계(綺里季)·하황공(夏黃公)·녹리선생(甪里先生)을 말한다. 사호(四皓)의 '호(皓)'란 "희다"는 뜻으로, 이들 모두 눈썹과 수염이 흰 노인이어서 붙여진 별칭이다. 유방이 불렀으나 오자 않았다.

* 留侯(유후) : 한(漢)의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책사로 한(漢) 나라 건국공신 한 사람이었던 장량(張良). 한나라 건국 후 고조는 장량의 공을 높이 평가해 제(齊) 땅 3만 호를 고르도록 했다. 그러나 장량은 과분하다며 이를 사양하고 유(留, 강소성 패현 동남쪽) 땅을 요청해 1만 호 정도의 봉지인 유후(留侯)로 봉해졌다. 북송의 대문호 소동파는 <유후론(留侯論)>을 저술해 그의 지략과 인간미를 기린 바 있다.

* 赤松子(적송자) : 고대 비를 다스렸다는 신선.

* 紫芝翁 : 상산사호를 말한다. 조송설(趙松雪)이 <사호(四皓)>란 시에서  [白髮商巖四老翁(백발상암사노옹) 상산 바위에 백발의 네 노인 / 紫芝歌罷聽松風(자지가파청송풍) 노래 소리 그치자 솔바람 소리 들리네 / 半生不與人間事(반생불여인간사) 반평생 인간사와 어울리지 않더니 / 亦隨留侯計術中(역수유후계술중) 또한 장량을 따라 계책을 논의하네.] 라고 읊었다. 이로 인해 자지옹은 상산사호를 지칭하게 되었다.

* 蕭何(소하) : 전한(前漢)의 개국공신. 천하 쟁패 시에 보급품을 맡아서 성공적인 역할을 함.

* 韓信(한신) : 초나라 항우의 장수였다가 한나라 유방에게 옮겨 대장군이 됨. 개국공신. 과하지욕(跨下之辱) 즉 가랑이 사이를 기는 치욕을 참고 성공함.

此(차)는 商山四皓廟(상산사호묘)에 有感而作也(유감이작야)라. 張良(장량)이 當廢太子之時(당폐태자지시)하야. 招此四人故(초차사인고)로 高祖曰(고조왈) : “羽翼已成(우익이성)하니, 難動矣(난동의)라”하야. 竟不廢太子(경불폐태자)하니, 張良之功(장량지공)을 比之於蕭何(비지어소하)면 蕭何(소하)는 徒追韓信而已(도추한신이이)니, 豈可當第一功乎(기가당제일공호)아. 上二句(상2구)는 言留侯(언유후)가 慕赤松故(모적송고)로 漢方識四皓也(한방식사호야)요. 下二句(하2구)는 言張蕭兩人之功(언장소양인지공)이 一以立儲貳之功(일이립저이지공)하고, 一以求干城之才(일이구간성지재)하니, 其功(기공)이 懸殊也(현수야)로다.

이는 상산사호 묘에 느낌이 있어서 지은 것이다. 장량이 태자폐위의 때를 만나서 이 네 사람을 부른 연고로, 고조가 “이미 날개가 이루어졌으니 움직이기 어렵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태자(惠帝)를 폐하지 않았으니, 장량의 공을 소하와 비교하면 소하는 다만 한신을 쫓아가(다시 데려왔을) 뿐이니, 어찌 제일공에 해당할 수 있겠는가? 위 2구는 유후(장량)가 적송자(신선)를 사모하여 한나라가 바야흐로 상산사호를 알게 되었다는 말을 하였고. 아래 2구절은 장량과 소하 두 사람의 공이 하나는 태자를 세운 공이고, 하나는 간성의 재목을 구한 것이니, 그 공이 매우 다르다는 말을 하였다.

* 儲貳(저이) : 왕세자.

* 干城之才(간성지재) : 나라를 구하는 인재.

* 當廢太子之時(당폐태자지시) : 고조가 후궁인 척부인(戚夫人)을 총애하여 장자인 태자를 폐하고, 척부인 소생의 여의(如意)를 태자로 삼으려 했다. 이에 태자의 모후인 여후(呂后)가 장량에게 계책을 논의했다. 장량은 혈육 간의 골육상쟁을 피하기 위해 평소 고조가 흠모해 마지않던 상산사호를 활용할 것을 건의했다. 즉 태자가 정성을 다해 상산사호를 초빙하고, 사호가 태자의 뜻을 좇아 동궁을 출입하게 되면 태자를 보는 고조의 시선이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장량의 계책이 적중해 고조는 태자를 바꾸려는 뜻을 접고 말았다 한다.

* 李商隱(이상은) : 813년 ~ 858년(추정), 자는 의산(義山)이고, 호는 옥계생(玉溪生), 번남생(樊南生)이다. 허난(河南) 싱양(滎陽) 출신이다. 조부 이보(李俌)는 후베이(湖北)성 징저우(邢州)의 녹사참군(彔事參軍)을 지냈으며, 부친 이사(李嗣)는 중시어사(中侍御史)를 맡았다. 이상은이 태어날 때 부친은 가현령(嘉縣令)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때부터 가세가 몰락했다. 이상은은 10세에 아버지 이사를 병으로 잃었고, 그와 어머니, 동생들은 허난의 고향으로 돌아왔고, 빈곤하게 생활하며 친척들의 도움에 의존해 살아갔다. 이상은은 장자로서 집안을 지탱하는 책임을 졌다. 25세에 令狐楚(영호초)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進士(진사)가 되고 校書郎(교서랑), 東天節度書記(동천절도서기), 檢校工部郎中(검교공부낭중) 등 높지 않은 벼슬을 역임했다. 영호초의 반대파인 王茂元(왕무원)의 사위가 되어 두 정파 사이를 내왕하여 절조를 비난받기도 했다. 그의 시는 서정적인 작품이 많고 修辭(수사)를 중히 여기어 정밀하고 화려하다고 하며, 典故(전고)를 많이 인용했다. 시를 지을 때는 참고 서적이 자리를 꽉 차지해 물개가 물고기를 늘어놓은 것 같았다고 한다. 당 나라 말기와 五代(오대)를 통하여 그의 시는 크게 유행했다. 溫庭均(온정균)과 함께 ‘溫李’로 불리웠으며, 이들의 시파를 西崑體詩派(서곤체 시파)라 했다. 그는 일생을 불우하게 지냈지만, 杜甫(두보)의 전통을 이은 만당의 대표적 시인으로 높이 평가받으며 저서에 ‘義山詩集(의산시집 6권)’과 ‘西崑唱酬集(서곤창수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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