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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Dec 19. 2024

150> 賈生(가생)

漢詩工夫(241004)

賈生(가생)

 - 李商隱(이상은)

宣室求賢訪逐臣

선실구현방축신

○●○○●●◎

선실에서 어진 이 구하여 쫓겨난 신하 찾으니


賈生才調更無倫

가생재조갱무륜

●○○○●○◎

가생의 재주 다시 견줄 사람 없었다네.


可憐夜半虛前席

가련야반허전석

●○●●○○●

안타깝다 한밤중에 공연히 자리에 앉아


不問蒼生問鬼神

불문창생문귀신

●●○○●●◎

백성의 일 묻지 않고 귀신의 일만 묻는구나.

* 宣室(선실):미앙궁(未央宮) 앞의 전전(殿前)의 정실(正室)

* 逐臣(축신):쫓겨나서 귀양 간 신하.

* 才調(재조):才能(재능).

* 無倫(무륜):견줄 사람이 없다. 무여륜비(無與倫比).

* 蒼生(창생):국민, 백성,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일컫는 말.

* 賈生(가생) : 가의(賈誼, 전200-전168). 서한(西漢) 시대 유명한 정치가 또는 문학가, 개혁 정치를 조장하고 많은 정치적인 주장을 제기한 사람. 충간을 일삼다가 평생 참소를 당하여 뜻을 펴지 못함. 그는 낙양출신으로 열여덟 살 때 뛰어난 글 솜씨로 명성을 날렸는데, 스무 살이 되어 효문제(孝文帝)의 총애를 받았다. 하루는 문제(文帝)가 귀신에 대해 묻자 어찌나 대답을 잘하던지 문제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 두 사람의 무릎이 맞닿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시문에 뛰어나고 제자백가에 정통하여 문제의 총애를 받아 약관으로 최연소 박사가 되었다. 1년 만에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어 진(秦)나라 때부터 내려온 율령·관제·예악 등의 제도를 개정하고 전한의 관제를 정비하기 위한 많은 의견을 상주하였다. 그러나 주발(周勃) 등 당시 고관들의 시기로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 자신의 불우한 운명을 굴원(屈原)에 비유하여 복조부(鵩鳥賦)와 弔屈原賦(조굴원부)를 지었으며, 초사(楚辭)에 수록된 석서(惜誓)도 그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4년 뒤 복귀하여 문제의 막내아들 양왕(梁王)의 태부가 되었으나, 왕이 낙마하여 급서하자 이를 애도한 나머지 1년 후 33세로 죽었다. 저서에 신서(新書) 10권이 있으며, 진(秦)의 멸망 원인을 추구한 過秦論(과진론)은 널리 알려져 있다.

史記(사기)에 賈生(가생)이 徵見(징견)할 새, 孝文帝方受釐坐宣室(효문제방수복좌선실)이러니, 上(상)이 因感鬼神事而問鬼神之本(인감귀신사이문귀신지본)한대 賈生(가생)이 因具道所以然之故(인구도소이연지고)하야. 至夜半(지야반)토록 文帝前席(문제전석)하다. 旣罷曰(기파왈) : “吾久不見賈生(오구불견가생)하야. 自以爲不過之(자이위불과지)러니. 今不及也(금불급야)로다” 賈誼(가의)가 得寵(득총)하야. 一歲中(일세중)에 超遷至太中大夫(초천지태중대부)러니. 大臣以年少(대신이연소)로 多短之(다단지)하야. 爲長沙太傅矣(위장사태부의)라.

<사기>에 가생이 부름 받아 뵐 적에 효문제가 막 음복(飮福)을 하고, 선실에 앉아 있었는데,  임금이 귀신의 일에 느낌이 있어서, 귀신의 근본을 물었는데, 가생이 인하여 그 귀신의 소이연을 갖추어 말씀드림에 밤중이 되었는데도 문제께서 자리를 앞당겼다. 이야기를 끝내고 말하였다. “내가 오래 가생을 보지 못하여 스스로 (나보다) 낫지 않다고 여겼는데, 이제 보니 내가 그대에게 미치지 못하겠다.” 가의가 총애를 얻어 한해 안에 등급을 넘어 옮겨져 태중대부에 이르렀다. 대신들이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다수가 헐뜯으니 장사태부로 삼았다.

此時(차시)에 帝徵見而不問蒼生而問鬼神(제징견이불문창생이문귀신), 則文帝何以惑於鬼神耶(즉문제하이혹어귀신야)아. 上二句(상2구)는 言帝之求賢訪逐臣及賈生之才調也(언제지구현방춘신급가생지재조야)요. 下二句(하2구)는 言夜半前席(언야반전석)에 不問治民之策(불문치민지책)하고, 但問鬼神之本(단문귀신지본)하니, 是可慨也已(시가개야이)라.

이때에 문제가 불러 보고는 백성의 일은 묻지 않고, 귀신을 물으니, 문제가 어찌 귀신에게 미혹되었는가? 위 두 구절은 문제가 어진신하를 구하고 쫓겨난 신하를 찾는 일과 가생의 재주를 말했고, 아래 두 구절은 밤중까지 앞자리에서 백성 다스리는 계책은 묻지 않고, 다만 귀신의 근본만은 물었으니 이는 개탄할 만한 일이라는 말을 하였다.

* 李商隱(이상은) : 813년 ~ 858년(추정), 자는 의산(義山)이고, 호는 옥계생(玉溪生), 번남생(樊南生)이다. 허난(河南) 싱양(滎陽) 출신이다. 조부 이보(李俌)는 후베이(湖北)성 징저우(邢州)의 녹사참군(彔事參軍)을 지냈으며, 부친 이사(李嗣)는 중시어사(中侍御史)를 맡았다. 이상은이 태어날 때 부친은 가현령(嘉縣令)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때부터 가세가 몰락했다. 이상은은 10세에 아버지 이사를 병으로 잃었고, 그와 어머니, 동생들은 허난의 고향으로 돌아왔고, 빈곤하게 생활하며 친척들의 도움에 의존해 살아갔다. 이상은은 장자로서 집안을 지탱하는 책임을 졌다. 25세에 令狐楚(영호초)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進士(진사)가 되고 校書郎(교서랑), 東天節度書記(동천절도서기), 檢校工部郎中(검교공부낭중) 등 높지 않은 벼슬을 역임했다. 영호초의 반대파인 王茂元(왕무원)의 사위가 되어 두 정파 사이를 내왕하여 절조를 비난받기도 했다. 그의 시는 서정적인 작품이 많고 修辭(수사)를 중히 여기어 정밀하고 화려하다고 하며, 典故(전고)를 많이 인용했다. 시를 지을 때는 참고 서적이 자리를 꽉 차지해 물개가 물고기를 늘어놓은 것 같았다고 한다. 당 나라 말기와 五代(오대)를 통하여 그의 시는 크게 유행했다. 溫庭均(온정균)과 함께 ‘溫李’로 불리웠으며, 이들의 시파를 西崑體詩派(서곤체 시파)라 했다. 그는 일생을 불우하게 지냈지만, 杜甫(두보)의 전통을 이은 만당의 대표적 시인으로 높이 평가받으며 저서에 ‘義山詩集(의산시집 6권)’과 ‘西崑唱酬集(서곤창수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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