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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Feb 10. 2023

(11) 웃지 않는 미녀 - 포사

★ 18禁 역사 읽기 ★ (230210)

중국 역사(歷史)에 등장하는 빼어난 미인들은 한국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출생에 대한 비밀이 많다. 역사가 주로 남성들에 의해 주도된 일의 기록인 관계로 그렇다고 생각되지만, 여성이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을 일으켰을지라도 그 여성에 대한 출생 기록이 모호(模糊)한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번에 이야기 하고자 하는 미녀 포사(褒姒)의 출생 기록도 불분명(不分明)을 떠나 허황(虛荒)하기 이를 데가 없다. 따라서 역사 고증(考證)에 관하여 깐깐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사마천(司馬遷)도 포사(褒姒)의 출생의 비밀을 마치 한국 드라마처럼 적당히 얼버무린 전설(傳說)을 인용하고 있다. 포사(褒姒)의 출생에 관한 전설을 판타지 스타일 드라마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夏)왕조의 마지막 왕인 걸왕(桀王)이 재위하고 있던 어느 날, 포(褒)나라(지금의 섬서성 포성현)에 살고 있던 두 노인이 갑자기 용(龍)으로 변하더니 하늘로 올라갔다. 두 마리의 용은 수 천리를 날아가 하(河)나라의 도성(都城) 짐심(斟尋)에 있는 걸왕(桀王)의 궁궐에 떨어지더니 이렇게 부르짖었다. “우리는 포(褒)나라의 조상이며 임금이다! 잘 모시도록 하라!”그러고는 입을 굳게 다물고 뜰에 드러누워 버렸다. 걸왕(桀王)은 그들 두 마리의 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고, 더구나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아서 정말 난감(難堪)했다. 달리 방법이 없어 점(占)치는 관리에게 점을 쳐보라고 하였다. 점쟁이는 거북 등짝을 구워 점을 치기 시작했다. 한참 만에 점관이 “참으로 괴이합니다. 죽일까 하고 물었더니 흉(凶), 쫓아버릴까 하고 물었더니 역시 흉(凶), 그냥 방치(放置)할까 하고 물어도 끝내 흉(凶)하다는 점괘만 나옵니다. 어떻게 할까요?” 걸왕(桀王)도 어찌할 바를 몰라 고심하였지만, 용들은 여전히 궁정(宮庭) 뜰에 버티고 누워 침과 거품만 질질 흘리고 있었다.

걸왕(桀王)은 용이 흘리는 침이 용의 정기(精氣)라고 생각하고, 용이 내뿜은 침과 거품을 받아 저장(貯藏)하면 어떻겠는가 하고 점을 쳐 보라하자, 그것은 몹시 길(吉)하다는 점괘가 나왔다. 그래서 걸왕(桀王)은 폐백(幣帛)을 올리고, 칙어(勅語)를 기록한 죽간(竹簡)을 보이며 용에게 고(告)했더니, 두 마리의 용은 궁정 밖으로 날아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점괘(占卦)대로 함(函)에다가 용의 침과 거품을 거두어 황금 그릇에 담아 밀봉(密封)하고는 궁궐의 창고에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이후 하(河)나라가 망하고, 그 함(函)은 은(殷 : 상나라)나라로 전해졌고, 은(殷)나라 역시 망하자 다시 주(周)나라로 전해졌다. 하(河)·은(殷)·주(周) 3대가 지나는 천여 년 동안 그 함(函)을 신주(神主) 모시듯 전해지며, 한 번도 열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주(周)나라의 제10대 왕인  여왕(厲王)이 즉위했다. 이 자가 폭정과 실정을 저질렀기 때문에, 특히 국인(國人)들의 자금원인 산림천택(山林川澤)을 국유화 하겠다고 결정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 사마천(司馬遷)의 기록에 의하면 여왕 31년(기원전 841년), 국인들이 그 횡포에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여왕은 체(彘) 땅으로 달아나 버렸고, 태자(희정, 훗날의 주 선왕)는 소목공(召穆公)의 집으로 도망쳐 숨었다. 그리고 주정공(周定公)과 소목공(召穆公)이 나라를 다스렸는데, 이것을 공화(共和)시기라 한다. 이 말이 근현대에 와서 공화국(Republic)의 어원이 되었다. 다른 기록인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제후인 공백(共伯) 화(和)가 국인들을 지휘해 여왕을 내쫓아 천자를 대행했으며, 그래서 그의 이름에서 공화(共和)가 유래했다고 한다. 아무튼 주(周)나라 여왕(厲王)이 쫓겨나기 전에, 궁궐 수리 중에 그 함(函)을 옮기다가 그만 떨어뜨려버렸다. 그러자 박살난 함(函)으로부터 흘러나온 용의 침과 거품은 점점 부풀어 올라서는 궁정을 가득히 채웠다. 이를 아무리 제거하려 해도 오히려 더욱 많아질 뿐,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결국 점을 쳐서 그 해답을 구했더니, 침과 거품에게 부정(不淨)한 모습을 보여주면 사라진다는 괘사(卦辭)가 나왔다. 그러자 여왕(厲王)은 궁녀(宮女)들을 모아 나체(裸體)로 거품 주위에서 춤을 추도록 하였다. 월경(月經)하는 여인들을 동원시켜 발가벗기고 춤을 추며 소리를 지르게 하는 것 좋다는 점괘대로 왕이 생리(生理) 중인 궁녀를 집합 시키니 그 수가 500명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도대체 궁녀가 얼마나 많기에 동 시간대에 같이 생리하는 여자들이 한꺼번에 500명씩이나 동원되다니 굉장하다. 당시 궁궐에 소요되는 생리대 납품만 해도 아이 한명 대학 등록금은 되겠네. 그러자 과연 침과 거품은 점점 작아지더니 마지막엔 한 마리의 도마뱀으로 변해서 후원 쪽으로 재빨리 도망쳐버렸다. 고래로 중국에서는 요사(妖邪)스런 동물을 쫓거나 괴이(怪異)한 일이 벌어지면 벌거벗은 여인들을 이용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러한 관습은 후에 아편전쟁 때까지 계속되어, 영국의 군함(軍艦)을 물리치기 위하여 청(淸)나라는 부인들이 깔고 앉아 쓰던 요강(溺釭)을 모아 영국 군대가 보이는 언덕에 쌓아서 군함을 내쫓으려 했다고도 한다.


놀라 후원(後園)으로 도망치던 도마뱀은 후원을 지나가던 어린 후궁(後宮) 소녀와 마주치자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소녀는 자라나서 성인이 되었고, 처녀의 몸인데도 임신(妊娠)이 되어 자꾸만 배가 불러오게 되었다. 성모 마리아도 아니고 정말 성령이 아니라 도마뱀의 정(精)을 받아 잉태(孕胎)를 했으니 헐.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궁궐로부터 도망쳐서 몰래 여자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없는 신분(身分)이라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는 바로 여왕(厲王)이 죽고 선왕(宣王)의 시절이었다. 당시에 수도인 호경(鎬京) 시중에 이상한 동요(童謠)가 유포(流布)되고 있었다. 뽕나무로 만든 활과 대나무로 만든 전통(箭筒)을 가진 자가 결국 주(周)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선왕(宣王)은 자기의 안위가 걱정스러워 뽕나무로 만든 활과 대나무로 만든 전통(箭筒)을 모두 없애도록 지시했다. 또한 이를 만드는 자들도 모두 체포하도록 했다. 그 때 활과 전통을 만들어 팔던 어느 노부부가 잡히지 않으려고 밤에 산속으로 도망치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산 아래 계곡에 이르자 조그만 광주리에 갓난아이가 실려 떠내려 오는 것이었다. 그 위로 수백 마리의 새떼가 공중을 떠돌고 있었고, 마치 그 아이를 보호하는 모습이었다. 아이를 건진 부부는 궁리(窮理) 끝에 주(周)나라 도읍에서 멀리 떨어진 포(褒)나라로 도망쳐서 영험(靈驗)한 아이를 키우기로 했지만, 가난 때문에 포성(褒城)에 사는 사대(似大)라는 사람에게 아이를 팔았다. 사대(似大)는 아들은 무사한데 딸만 얻으면 태어나는 족족 죽어나가는 터라 여자아이를 얻고 싶어서, 아이를 사서 포성(褒城)의 포(褒)에 사(似)의 사람 인(人) 변을 계집 녀(女)로 바꾼 사(姒)로 포사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키웠다. 그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났으며, 용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음인지 용모(容貌)가 아주 빼어났다. 그 아이가 다 자랐을 즈음, 포(褒)나라 제후 포향(褒珦)이 주(周) 왕실에게 중죄(重罪)를 지어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죄의 사면용(赦免用)으로 바쳐진 그 미녀가 바로 포사(褒姒)였다.

포사(褒姒)를 죄의 사면용으로 바치는 이야기는 이렇다. 주나라(西周)의 마지막 왕인 유왕(幽王)은 천하의 개망나니였다. 아버지인 선왕(宣王)의 상중(喪中)인데도 술과 음악, 여자를 달고 산다. 난폭(亂暴)·음탕(淫湯)·무식(無識)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데 다 간신배(奸臣輩)만 가까이 하고, 충신들의 말은 듣지도 않고 내쫓거나, 감옥에 가두는 만행(蠻行)을 서슴치 않는다. 충신 포향도 올곧은 충언을 하다가 유왕(幽王)에게 찍혀 3년 넘게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포향의 아들 홍덕(洪德)은 소문난 효자로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구해낼까 늘 고민 고민하던 중이었다. 어느 날 영지(領地)의 소작료를 받으러 돌아다니다가 우물가에서 웬 소녀를 보고 깜작 놀랐다. 옷차림은 비록 남루(襤褸)하나 속에 감춰진 몸매와 외모는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홍덕(洪德)은 순간 아버지를 구할 방도로 머리를 굴린다. 유왕(幽王)이 호색한(好色漢)이라고 하니 저 소녀를 바치면 아버지를 풀어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래 전에 은나라 주왕(紂王) 때, 서백(西伯)인 주문왕(周文王)의 세력이 급속히 커지자 주왕(紂王)이 주문왕을 견제하고자 감옥에 가둔 적이 있었다. 그 때 주문왕의 심복인 산의생(散宜生)이 미녀 열명을 주왕(紂王)에게 바치고 주문왕(周文王)을 구한 사례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포사를 양부모로부터 거금을 주고 산 홍덕(洪德)은 그녀에게 궁중 예법과 사람을 홀리는 기술 등을 잘 가르쳐서 누가 봐도 한 번에 홀딱 반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홍덕(洪德)은 주나라의 삼공(三公) 중에 한 사람인 괵석보(虢石父)에게 뇌물을 바치고, 유왕을 알현하여 포사를 후궁으로 진상할 기회를 잡고 아버지 포향을 석방시켰다.

여자라면 환장하는 유왕(幽王)이 포사(褒姒)를 보자마자 눈이 회까닥 돌아간다. 지금까지 데리고 놀던 여자들은 3류 작부(酌婦)집이나 기생집 선수 정도로 보이는 거다. 한 낮의 태양과 반딧불의 차이라고나 할까. 유왕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 포향을 풀어주라고 한다. 효자 아들 홍덕의 계책은 대성공을 거둔 거다. 그 날 이후로 유왕은 포사(褒姒)의 치마폭과 다리사이, 손아귀에 놀아나게 돼 버린다. 역사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유왕은 앉으면 포사(褒姒)를 무릎위에 올려놓고, 서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마실 때는 잔을 하나로 하고, 밥 먹을 때는 같은 그릇으로 먹었다. 조회(朝會)는 한 달에 한번 하면 많이 하는 거고, 백관(百官)들은 왕을 보러 갔다가 그냥 돌아가기 일쑤였다. 유왕은 포사(褒姒)의 교태(嬌態)어린 몸매와 싸늘한 미소에 넋이 반은 나갔고, 이제까지의 여인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잠자리 기술에 완전히 혼이 빠져 버린다. 시앗을 보면 길가의 돌부처님도 돌아앉는다고 했지만, 본부인의 질투쯤은 유왕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걸 다 갖은, 권력 있고, 정력 좋은 사내가 그걸 마다하겠는가? 포사가 후궁으로 들어와서 내명부(內命婦)의 최고인 왕후이자, 정비(正妃)인 강씨(申后)에게 인사도 오지 않으니 눈이 뒤집어진다. 강씨(申后)는 제후 신백(申伯)의 딸로서 명문가 출신이고 신후(申后)로 불리었다. 남편 유왕이 포사에게 폭 빠져 아예 밀실(密室)에서 밤낮이고 나오질 않으니, 참다못한 강씨(申后)가 드디어 밀실로 쳐들어간다. 두 년놈이 발가벗고 희희낙락(喜喜樂樂) 놀고 있는데 방문을 확 열어 제치고 들어가니 보니, 침대에 둘이 포개어져서 포사는 눈만 빤히 뜨고 쳐다보고, 유왕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엎드려 헐떡이고 있었던 것이다. 왕후 강씨(申后)가 호통을 치자, 유왕은 강씨(申后)가 포사를 때리기라도 할까봐 그녀를 가로 막으면서 내일 인사를 드리도록 시키겠다고 얼버무렸다고 기록돼 있다.

포사는 간덩이가 부은 건지 아예 간이 없는 건지 몰라도 별로 동요(動搖)를 하지도 않는다. 강씨(申后)가 그렇게 난리 부르스를 쳤는데도 침대에 누워 미동(微動)도 않고 바라봤으며, 강씨(申后)가 씩씩거리며 돌아간 뒤에 천연덕스럽게 저 여자 누구냐고 왕에게 물었다. 내일 한번 찾아가서 정비(正妃)께 인사드리라는 유왕의 당부에 콧방귀도 안 뀌고 돌아누우며, 다음날도 인사하러 가지 않았다고 기록 돼 있다. 그 이후 포사의 잔머리와 포사에게 들러붙는 간신(奸臣)과의 협잡(挾雜)으로 태자인 강씨(申后)의 아들 의구(宜臼)는 유배를 가게 되고, 급기야는 강씨(申后)마저 모함에 걸려 폐위(廢位)된다. 드디어 강가에 버려진 아이가 왕후에 오르게 된 거다. 근데 묘한 건 여성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면서도 포사는 도무지 웃지를 않는 거였다. 포사에게 폭삭 빠진 유왕은 어떻게 하면 포사를 웃게 만들까 늘 그게 고민이었다. 각종 좋다는 음악(音樂)·기예(技藝)·묘기(妙技)·만담(漫談) 등 무용단과 예술단을 총 동원해서 보여줘도 포사는 그냥 시큰둥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유왕은 지쳐서 애원하듯이 포사에게 묻는다.

유왕 :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제발 웃을 거리가 뭔지 알려줘.

포사 : 저는 본디 좋아하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어릴 때 우연히 들은 비단 찢는 소리가 기분이 상쾌합니다.

유왕 : 고뤠???? 그거 아주 쉽죠. 잉......

당장에 비단 수백 필이 동원되고 비단 찢는 여자들이 집결해서 찢어댄다. 포사는 어이없어 하면서 뺨 근처에 경련 같은 약간의 실소(失笑)를 아주 가늘게 지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유왕은 미친 듯이 즐거워했다. 그래서 매일 산더미 같이 비단을 쌓아놓고, 찢어 제키니 국고(國庫)의 비단들은 벌써 바닥이 났고, 제후(諸侯)들과 심지어 일반 백성들로부터도 비단을 징발(徵發)해서 나라에 비단이 남아날 턱이 없었다. 그러자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만 갔다. 그래도 포사는 입 꼬리만 약간 움직일 뿐 크게 기뻐하지는 않았다. 유왕은 급기야 대국민 긴급포고령을 발표한다. 누구든 포사를 웃게 하는 자에게 천금의 상을 내리겠다. 이때 천하의 간신 괵석보(虢石父)가 왕에게 알랑 방귀를 뀌어 댄다. “봉화대(烽火臺)에 불을 피우면 각 제후들이 군사들을 몰고 긴급 출동해 올 겁니다. 제후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집결하면, 별일은 없고 그냥 심심하던 차에 봉화(烽火)를 시험 삼아 올려봤으니까 각자 돌아가라고 명령을 내리십시오. 그 모습을 보면 왕후께서 반드시 웃으실 겁니다.” 유왕은 그 계책이 그럴듯해 그대로 시행한다.

봉화(烽火)는 외적이나 반란군의 침입 등 국가가 위급할 때 릴레이식으로 올려 모든 군사를 왕궁으로 모이도록 하라는 신호인데 애첩을 웃기려는데 쓴 것이다. 여산(驪山)은 호경(鎬京) 동북쪽에 위치한 작은 산으로 지금의 섬서성 임동현(臨潼縣) 근방에 있다. 지대가 높기 때문에 봉수대(烽燧臺)를 설치하기에 적합한 군사상 요충지(要衝地)였다. 봉수(烽燧)란 불이나 연기를 올려 군사상 긴급 사태를 알리는 통신 수단이다. 즉 오늘날의 사이렌이나 경보(警報)에 해당되는데, 주로 밤에는 봉(熢 : 횃불)을 올려 불을 볼 수 있게 하고, 낮에는 수(燧, 연기)를 피워 보이게 했다. 즉 주수(晝燧) 야봉(夜烽)으로 낮엔 연기, 밤엔 횃불이었다. 낮의 연기는 바람이나 구름, 안개 등 일기(日氣)에 따라 전달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비교적 기후에 영향을 덜 받고 곧게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를 내고자, 낭분(狼糞)이라고 부르는 이리나 늑대의 똥을 태웠다. 그래서 낮에는 낭연(狼煙) 또는 낭화(狼火)라고도 불렀다. 우리나라 봉수의 경우, 평상시(1개), 적 발견(2개), 적 국경 접근(3개), 적군의 침입(4개), 교전 상황(5개)로 구분하고 있었다. 하여간 봉화는 타올랐고, 각 제후들은 오랑캐가 급습한 줄 알고 촌각(寸刻)을 지체 않고 궁성으로 집결한다. 그런데, 성안은 조용하고 평온하기만 한 거다. 오히려 높은 누각(樓閣)에서는 유왕이 포사와 즐기는 음악소리만 띵까띵까 울리는 게 아닌가. 장수들과 병졸들이 의아해하고 있는 순간, 누각에서 술 취한 유왕이 쓱 나와 한 마디 한다. “그냥 한번 해 봤어. 심심한데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서. 이제 각자 돌아가” 제후들은 맥이 빠져 자기들끼리 모여 수군거렸고, 군사들은 투구를 땅바닥에 집어던지면서 흥분하기도 하면서 웃지 못 할 광경이 벌어졌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포사가 별안간 두 손으로 난간(欄杆)을 두드리며 크게 웃었단다. 유왕은 포사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기분이 째져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한 번 웃으니 백가지 아름다움이 일시에 생기는구나!” 간신 괵석보(虢石父)는 물론 천금의 상을 타 먹었다. 미인의 웃음을 얻기 어렵다는 뜻의 일소천금(一笑千金), 천금을 주고 웃음을 산다는 쓸데없는 짓거리인 천금매소(千金買笑)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생긴 거다.

이후에도 유왕은 포사를 위해 여러 번 봉화(烽火)를 올렸고, 그때마다 제후들은 허탕을 친다. 늑대와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가 이 사건을 각색한 거라는 중국 당국의 문화공정이 발동할 것으로 보인다. 장난질 봉화에 몇 번을 속은 제후들은 더 이상 속아서 달려오지 않게 되었다. 사실 그런 사태들이 벌어지기 전부터 주나라 왕실 사정은 난장판이었다. 유왕은 정비(正妃)의 자리에 있던 신백(申伯)의 딸 강씨(申后)를 쫓아내고, 포사를 정비의 자리에 앉혔으며, 또한 정비의 아들인 의구를 태자에서 폐하고, 포사의 어린 아들 백복(伯服)을 태자로 책봉했던 것이다. 왕후와 태자에서 폐위된 모자가 친정이며 외가인 신백(申伯)에게 가서 있었다. 이런 만행을 보고 들은 신백(申伯)도 가만있지 않았다. 증국(繒國)과 서이(西夷), 견융(犬戎) 등 변방 유목 민족들까지 꾀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반란군의 주력부대는 1만5천명의 호전적(好戰的)인 대군을 거느린 견융(犬戎)이었으며, 신백(申伯)는 3만5천명의 대병을 거느리고 주나라 수도 호경으로 진군했다. 신백(申伯)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유왕은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봉화를 올려 제후국에 알리라고 다급하여 명령했다. 그러나 봉화가 올라도 단 한 명의 제후나 군사도 모이지 않았다. 며칠을 기다려도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반란군은 호경성을 겹겹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노대신(老大臣) 정백우(鄭伯友)는 사태가 불리함을 알고 여산 별궁으로 파천(播遷)할 것을 권하고, 결국 유왕은 작은 수레에다 포사와 백복(伯服)을 타워서 궁성의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신백(申伯)의 반란군이 호경 성중으로 돌입했을 때는 이미 유왕 일행은 일찌감치 도망치고 난후였다. 신백(申伯)는 유왕을 굳이 뒤쫓을 필요는 없고, 자신의 딸인 왕후와 외손자인 태자 의구를 복위(復位) 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추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견융(犬戎)의 부대는 유왕 일행이 여산 별궁으로 도망친 사실을 알고는 끈질기게 뒤쫓았다. 정백우가 별궁 앞쪽으로 불을 놓아 견융군을 현혹시킨 뒤, 몇 안 되는 군사를 앞세우고 유왕 일행이 후문으로 나섰지만 견융군은 이미 그들의 도피로를 눈치 채었다. 정백우는 어떻게든 길을 열어 보려고 애썼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유왕이라도 탈출시켜 보려고 견융군에게 열심히 칼을 휘둘렀지만 집중적으로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고슴도치처럼 처참하게 죽고 만다. 유왕 일행은 견융의 병사들에게 붙잡혀 유목민의 추장(酋長)한테로 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유왕과 태자 백복은 단칼에 베어졌으며 포사는 추장이 자기 첩으로 삼으려고 살려둔다. 호경으로 돌아온 견융군 추장은 약속대로 신백(申伯)한테서 반란 성공의 대가로 금은보화와 비단을 잔뜩 얻었다. 그러나 군사들이 원정에 지쳤다는 핑계를 대면서 그대로 눌러 앉으려고 떠나는 것을 파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신백(申伯)은 그 사실을 간파하고 제후들에게 밀서(密書)를 보냈고, 제후들이 곧장 달려온다는 답장을 추장에게 보여주며 그에게 빨리 떠날 것을 협박한다. 추장은 신백(申伯)의 말이 협박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쓴 입맛을 다시면서 “좋소. 그 대신 포사인가 뭔가 하는 여자는 선물로 나한테 주시오. 몇 번 데리고 잤더니 아주 쓸 만 합디다.”추장이 떠난다니 신백(申伯)도 흔쾌히 승낙한다. 그러나 견융의 추장은 포사를 데리고 떠날 수는 없었다. 떠나려고 포사를 찾았더니 목맨 시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때가 기원전 771년의 일이다.

유왕의 아들 태자 의구는 평왕(平王)으로 왕위에 올라 도읍을 지금의 낙양(洛陽) 부근으로 옮기게 된다. 그 이전을 서쪽에 도읍이 있었다고 서주(西周), 그 이후를 동주(東周)로 구분하게 된다. 그리고 반세기 뒤 춘추(春秋)시대가 열리고, 뒤이어 전국(戰國)시대가 개막되니, 중국 역사에 수많은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이룬 가장 혼란했던 춘추전국 시대가 전개되는 거다. 이때까지도 주나라는 그 명맥을 근근이 유지 했으나, 예전의 천자국(天子國)으로서의 막강(莫强)했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진 채로 낙양 부근만을 영유하는 제후국의 신세로 버티게 되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256년에 진(秦)나라에게 항복함으로써 완전 멸망하게 된다. 그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포사와 유왕의 방탕한 생활인 셈이다. 중국 역사상 3요녀(三妖女)를 하(夏)나라 걸왕(桀王)의 말희(妺喜),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달기(妲己), 주(周)나라 유왕(幽王)의 포사(褒姒)를 꼽는다. 이러한 미인을 나라를 기우려 망하게 한다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 한다.

잘 웃지 못하는 포사(褒姒)가 냉혈한(冷血漢)이거나 버려진 아이, 팔려간 아이로 자라면서 정신적으로 웃음을 잃어버린 경우일 수도 있겠다. 사람이라면 기쁘거나 즐거울 때 웃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스운 일에도 웃지 않는 게 문제이지만, 아무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쉽게 웃고 한 번 웃으면 과도하게 웃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 또한 문제이다. 이러한 현상을 1965년 영국의 소아과 의사 Dr. Harry Angelman이 최초로 보고한 ‘엔젤만증후군(Angelman's syndrome)’이라고 한다. 이 질환(疾患)을 가진 아이들은 행복하지 않아도 웃는다. 엔젤만증후군은 발달이 지연되고 말이 거의 없는 편이며, 이유 없이 부적절하게 장시간 웃는 특징이다. 독특한 얼굴 이상이 나타나며, 발작(發作)과 경련(痙攣)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 희귀질환이다. 아직까지 원인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전적으로 15번 염색체(染色體)의 특정 유전자를 물려받지 못한 경우에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약 12,000~20,000명 중 1명이 이 질환의 영향을 받는다고 추정하고 있다. 어머니의 15번 염색체 이상이 유전되면 엘젤만증후군, 아버지의 15번 염색체 이상이 유전되면 프라더-윌리 증후군(Prader-Willi Syndrome)에 해당된다. 프라더-윌리 증후군은 비만(肥滿)과 지적장애가 동반된다.

선천적(先天的) 유전 이외에 후천적(後天的)인 뇌질환(뇌졸중, 뇌출혈)이나 교통사고 등으로 뇌의 특정 부위가 손상되면 상가(喪家) 집이나 심각하고 진지한 상황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와 장시간 웃는 질병도 있다. 이를 의학적으로 ‘병적 웃음(Pathologic laughing)’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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