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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Feb 09. 2023

(10) 가장 잔혹한 황태후 - 여태후

★ 18禁 역사 읽기 ★ (230209)

중국 역사상 최초의 태후가 진(秦)나라의 선태후(宣太后) 미월(芈月)이다. 그녀의 아들 영직(贏稷)이 진나라의 소양왕(昭襄王)에 오른 기원전 306년부터 섭정(攝政)을 하여 무려 36년간이나 권력을 휘둘렀다. 그녀 이전에는 중국 역사에서 태후(太后)라는 칭호는 없었고 선왕의 시호를 따서 무슨 후(后)라고만 불렀다. 그녀가 섭정을 하게 되면서부터 태후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여, 청(淸)나라가 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그녀는 초(楚)나라 출신으로 진나라 혜문왕(惠文王)의 후궁이 되어 아들 영직을 낳았다. 그녀를 ‘미팔자(芈八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서 팔자(八子)는 요즘 팔자 고친다는 팔자가 아니고, 진나라 후궁(后宮)의 계급이다. 당시 후궁은 총 8계급이다. 즉, 왕후(王后, 정실) - 부인(夫人) - 미인(美人) - 양인(良人) - 팔자(八子) - 칠자(七子) - 장사(長使) - 소사(少使)의 순이었는데, 팔자는 이 중 네 번째 계급이었다. 혜문왕 사후 태자였던 영탕이 무왕(武王)이었지만 힘자랑 한다고 구정(九鼎 : 하나라 때 만든 9개의 청동 솥으로 왕위를 상징)을 들다가 허리가 삐끗해 재위 4년 만에 죽는다. 그 바람에 후궁인 미월의 아들 영직이 진나라의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고, 어린 아들을 대신해 그녀가 섭정을 하면서 천하통일의 기틀은 만들었다. 그 후 기원전 247년 그녀의 고손자(高孫子)가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秦始皇)이다.

아무튼 중국 역사에 태후(太后)라 불리는 사람이 수두룩 빽빽하지만 위명(偉名)과 악명(惡名)을 날리는 사람이 딱 세 명이 있다. 주인공은 한(漢)나라 여태후(呂太后),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청(淸)나라 서태후(西太后)이다. 여태후(呂太后)는 한나라 고조(高祖)인 유방(劉邦)의 두 번째 부인인데, 첫 여자는 조(曹)씨라는 여자로 훗날 제도혜왕(齊悼惠王)이 되는 유비(劉肥)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역사 기록은 별로 없다. 유방(劉邦) 이 친구 한글 이름만 들으면 껄떡 맨들이 좋아할 얄쌍한 유방(乳房)처럼 생각했다간 큰 오산이다. 이 친구는 역발산(力拔山 : 힘은 산을 뽑고) 기개세(氣蓋世 : 기상은 세상을 덮을)라는 항우(項羽)와 더불어 천하를 놓고 자웅(雌雄)을 겨룬 끝에 마침내 승리(勝利)를 쟁취하여 한(漢)나라를 세운 사람이다. 애시당초 유방(劉邦)은  출신 가문이나 성격, 학식, 무예 등 모든 면에서 항우(項羽)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유방(劉邦)의 성격은 경박(輕薄)·무례(無禮)·호색(好色)·호주(好酒)·표변(豹變) 등등 별로였다고 한다. 그러나 막료(幕僚)인 한신(韓信)·소하(蕭何)·장량(張良)·조참(曺參) 등 당대(當代)의 맹장(猛將)과 참모(參謀)를 감복(感服)케 하는 인간성으로 항우(項羽)의 무적군대를 궤멸(潰滅)시키는 놀라운 대 역전극을 펼친 것이다.

원래 유방은 패(沛)라는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풍읍(豊邑) 동네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정장(亭長)이라는 벼슬을 했다. 정장(亭長)이란 요즘으로 치자면 국립 여인숙의 관리자이다. 당시 관리들의 공무 출장에 사용할 역참(驛站)을 진(秦)나라 시대에는 정(亭)으로 불렀고, 정장을 두고, 그 밑에 정보(亭父)와 구도(求盜)라는 평민 부하를 둔 구조였다. 관(冠)을 못 쓰고 두건만 쓸 수 있는 별 볼일 없는 미관말직(微官末職)이었다. 유방의 출생에 대한 전설이 있다. 유방의 어머니가 연못가 근처에서 쉬다가 문득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신(神)을 만났다고 한다. 그때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치고 하늘이 시커멓게 변했는데, 근처에 있던 유방의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자 아내의 배 위쪽에 교룡(蛟龍)이 떠있었고, 몸에 태기(胎氣)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 사람이 유방이란다. 외모는 콧날이 높고 이마는 넓어 용의 얼굴을 닮았으며, 수염이 아주 그럴듯해서 멋있었다고 한다. 또한 왼쪽 넓적다리에는 72개의 반점(斑點)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4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맨날 술만 먹고 여자나 후리니 5공 시절 같았으면 삼청교육대 입교 대상 1순위의 동네 한량(閑良)이었다. 왕년에 강남의 물 좋은 나이트의 죽돌이나 동네 술집 에이스였기도 하거니와 결혼하고도 여자들 상대로 썸을 잘 탔던 걸로 봐서는 실제로도 잘생기고 언변도 좋았을 가능성이 높다. 형 밑에 붙어살면서 맨날 형수한테 미움받고 살았다. 시도 때도 없이 건달들을 데려와 집의 밥과 술을 축내니 큰형수가 국솥을 박박 긁어 손님들을 무안하게 하여 내쫒기 일쑤였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은 밥과 국이 많이 있었는데 큰형수가 고의로 그런 것이었다. 유방은 이걸 기억해 뒀다가 천자(天子)가 되어 가족을 각지의 제후(諸侯)로 봉하는 와중에도 큰형수네 일가는 아무 작위도 주지 않았다. 그러다 부친 유태공이 하도 부탁을 하니 마지못해서 큰형수의 아들 유신(劉信)에게 ‘갱갈후(羹頡侯 : 국 솥 긁는 제후)’라고 이름 지어 주었다.

또한 동네 개백정인 번쾌(樊噲)에게 개고기를 외상으로 먹고 고깃값 떼먹기 일쑤인 한심한 생건달의 사내였다. 어느 날 이 동네에 여공(呂公)이 이사를 온다. 그는 일대에서는 제법 이름이 자자(藉藉)한 양반이고 현령(縣令)과도 각별한 사이다. 이 양반이 입향(入鄕) 신고식 겸, 동네 토박이들의 환영식을 개최한다. 이 신고·환영식은 미국 대통령 정치 후원금 방식으로 많이 내는 사람 순서로 주인공 근처 자리를 배정하는데, 당시 접수담당자는 바로 소하(蕭何)였다. 후원금 천전(千錢) 미만은 대청에도 못 앉고 마당에 자리 깔고 앉을 정도로 많이 왔는데, 허우대 멀쩡한 양아치 유방이 이 환영식에 떠억 나타나 소하에게 봉투를 척 내민다. 봉투에는 현금이 아닌 어음으로 ‘일금 일만전’이라 적혀 있으니, 소하가 유방한테 여기가 무슨 삼거리 주막집 외상 장부 적는 줄 아느냐고 다툼이 일어난다. 바깥이 시끌벅적하자 여공이 나와서 유방을 보았다. 여공과 유방의 첫 대면이다. 접수담당인 소하가 저놈은 순 노가리꾼이고 허풍선에다가 주색잡기(酒色雜技)만 잘하는 놈이라고 경고하지만 여공은 유방을 딱 보고는 한눈에 휘까닥 간다.  평소 관상(觀相)에 일가견이 있던 그는 그 얼굴은 황제의 관상이라고 순간적으로 느꼈다.

그리고는 유방을 상석(上席)으로 모셔서 진탕 대접을 하고, 자기 딸을 줄 테니 제발 받아만 달라고 징징 거린다. 딸을 “데려가서 청소나 하는 첩으로 삼으라.”면서 주었다. 이에 여공의 부인이 “아니, 현령이 딸을 달라 할 때도 내키지 않았는데, 저런 놈팡이에게 딸을 주다니요?” 하고 노발대발(怒發大發)했지만, 여공은 “아녀자가 무슨 일을 알아!” 하면서 무시하고 기어코 딸을 유방에게 주고 말았다. 그 딸이 바로 여태후가 된 여시부인이고, 성은 여(呂)이고, 이름은 치(雉)인 여치(呂雉)이다. 유방과 여씨부인과의 만남은 본인도 모르게 이뤄졌다. 한술 더 떠 번쾌에게는 여씨부인의 여동생을 주는 바람에 졸지(猝地)에 유방과 번쾌(樊噲)는 동서지간이 된다. 개백정 번쾌는 삼국지의 장비(張飛)와 버금가는 용맹과 충성을 자랑하는 걸물이다. 본래 유방에게는 조씨(曹氏)라는 본부인이 있었음에도 유방은 여씨를 아내로 맞이한다. 여씨부인은 이후 밭에서 호미질 등 갖은 막일을 하며 유방을 섬긴다. 곱게 자란 부잣집 딸이 피똥 싸는 생고생을 군말 없이 하는 거다. 그런 와중에 세상은 급박하게 혼란에 휩싸인다. 진시황(秦始皇)이 죽은 뒤 진(秦)나라 곳곳에서 반란(叛亂)과 봉기(蜂起)가 잇따른다. 천민(賤民) 출신인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더냐 하며 반란의 첫 물꼬를 트게 된다. 이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서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반체제의 깃발이 휘날린다. 항우와 유방도 각자 큰 뜻을 품고 이 대열에 합세하는 거다. 수많은 전쟁과 이합집산(離合集散) 끝에 진(秦)나라 타도의 선봉에 선 사람이 항우, 유방 두 사람만 남는다. 초한지의 줄거리가 되고, 장기판의 놀이 테마가 되는 이 두 사람의 싸움에서 결국 유방이 승리한다. 그래서 유방은 한나라 고조가 되고, 여씨부인은 망나니 시절의 첫째 부인 조씨를 몰아내고 황후가 된다.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명실상부한 천하통일을 이루어 한(漢)나라를 세운 것이다.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건 진시황(진시황)이지만, 급하게 영토만 통일하고 진정한 통일 제국의 기틀이 다져지기도 전에 망했다. 이어서 건국하여 제도·문물·경제 등등 진정한 통일을 이룬 제국은 한나라이고, 중국인들은 한(漢)나라에 많은 애정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한자(漢字)·한족(漢族)·한지(漢紙)·한속(漢俗)·한어(漢語) 등등 중국을 나타내는 고유한 키워드가 많이 있게 되었다. 고생은 나눠질 수 있어도 행복은 나누지 못한다는 말 그대로 통일이후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이런저런 잡음이 흘러나오게 된다. 불평불만이 팽배해 있고 니 똥이 더 굵니, 내 똥이 더 굵니 하며 티격태격한다. 더군다나 유방의 주위에 있던 장수들의 면면을 보면 무식과 똘끼 그 자체가 아닌가? 유방의 출신 성분부터 별 볼일 없고, 번쾌(樊噲)는 개백정, 소하(蕭何)는 면서기, 조참(曹參)은 옥리(獄吏), 영포(英布 : 일명 경포), 팽월(彭越)은 떼도적 출신이고, 전략 참모인 장량(張良)만이 번듯한 귀족출신이다. 그러나 유방은 항우를 멸망시킨지 8년 만에 병으로 죽게 된다. 오늘의 여주인공의 잔혹한 드라마가 이때부터 진행되는 것이다.


후임 왕은 여씨의 아들인 유영(劉盈)이다. 본디 유방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여씨가 낳은 아들은 유영한 명뿐이다. 이 유영에게 왕위를 물려받게 하기 위해 여씨부인이 다른 아들 5명을 죽인다. 근데 이 유영은 심약, 병약, 허약해서 골골골 하니 여씨부인이 판을 치게 된다. 거기다 유영이 24살에 후사도 없이 죽자 드디어 여태후(呂太后) 시대가 개막된다. 극악 잔인무도(殘忍無道)한 여태후의 마수에 걸려 죽어간 사람들은 부지기수다. 유방의 애첩인 척부인(戚夫人), 한나라의 창업공신인 한신(韓信), 팽월(彭越), 척부인의 아들인 유여의(劉如意), 다른 부인들이 낳은 유방의 무수한 씨앗들. 여태후 조차 몇 명을 죽였는지 모른다 할 정도로 대 살육(殺戮)이 자행된다. 미쳐 날뛰는 여태후의 서슬이 두려워서 창업공신들조차 숨을 죽인다. 일체의 공직을 멀리하고 미친 척하며 세월을 보낸다. 마치 구한말에 대원군(大院君)이 상갓집 개로 불리며 때를 노렸던 것처럼 말이다. 지략가인 진평(陳平)은 날마다 술독에 빠져 지내며, 소하는 일부러 추태를 부리며 스스로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조참은 가무와 기행으로 나날을 보냈다. 당시의 상황을 사기(史記)에는 군신들이 술을 마시다 공을 다투고, 취하면 함부로 소리치고 검을 빼서 기둥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부터 황후자리에 올라앉은 여씨부인이 어떻게 사람들을 죽였는지 하나하나 알아보자.

1. 한신(韓信)

한삼걸(漢三傑)로 불리는 설명이 필요 없는 대장군이다. 천하통일 전에는 위(魏)·대(代)·조(趙)·연(燕 )·제(齊)·초(楚) 등 6국을 멸하고 스스로 제왕(齊王)이 되었고, 후에는 유방이 한신의 공을 높이 사서 초왕(楚王)에 임명한다. 근데 어느 족제비 같은 작자가 한신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모함을 해댄다. 경박하기 짝이 없는 유방은 한신을 회음후(淮陰侯)로 강등시킨다. 한신은 이때 유방에 대해 반감을 품는다. 그러던 중 거록(鉅鹿) 태수(太守) 진희(陳豨)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이 친히 출정하나 한신은 병을 핑계로 종군(從軍)을 거부한다. 간신 촉새들이 또 한신이 모반을 꿈꾸고 있다고 지지배배 댄다. 이 소식을 들은 여씨부인 잔꾀를 쓴다. 거록의 반란 진압이 무사히 이루어졌고, 장락궁(長樂宮)에서 축하연을 거행하니 모든 제후들은 필참 하라고 고지를 한다. 한신은 부하 괴철(蒯徹)의 만류를 무릅쓰고 참석하다가 체포당해 그 길로 댕그렁 목 잘린다. “천하를 휘졌던 내가 한낱 아녀자의 꾀에 넘어가다니, 분명 하늘의 뜻이로구나.” 한신의 마지막 말이란다. 반란을 마치고 개선한 유방은 여씨부인의 보고를 받고 한편으로 기뻐하고 한편으로 동정했다고 사기에 기록돼 있다. 이 걸출한 사내로 인해 다양한 사자성어가 생겼다. 뜻은 독자들이 사전을 찾아서 해독하시라. 젊을 시절의 걸식표모(乞食漂母), 과하지욕(胯下之辱), 명수잔도(明修棧道) 암도진창(暗度陳倉), 구상유취(口尙乳臭), 일반천금(一飯千金), 다다익선(多多益善), 성야소하 패야소하(成也蕭何 敗也蕭何), 차희차련(且喜且憐) 등이다.

2. 팽월(彭越)

유방을 도와 숱한 공을 세운 사내인데, 거록(鉅鹿) 태수(太守) 진희(陳豨)가 반란을 일으키자 팽월이 의심받는 과정은 한신과 똑같다. 유방의 반란 진압 출정에 협조 안 한 거지. 유방이 핏대가 나서 팽월을 소환 명령하지만 명령에 불응하고 안 간다. 가면 붙잡혀 죽을게 뻔한데 미쳤다고 가겠는가? 그러자 유방은 습격대를 보내 팽월을 체포해 버리고는 사형선고를 내린다. 팽월이 무죄를 하소연하며 옛정을 생각해서 봐달라고 징징 울고불고 하자 마음 약한 유방은 사형선고를 번복하고 촉나라로 유배를 보낸다. 운명이라는 게 참 고약하기도 한 게, 유배를 가던 도중에 팽월은 우연히 여씨부인을 만난다.

  여씨 : 어머머, 장군님. 나는 육사 골프장에서 지금 막 라운딩 끝내고, 샤워하고 생맥 한잔하고 집에 들어가는 길인데....골프채도 없이 어디 해외로 라운딩 가시나요?

  팽월 : 헐, 골프는 무슨 쩝쩝쩝....유방 형님한테 찍혀서 계급장 띄고 유배 가는 중이에요. 잉잉잉....

  여씨 : 저런...팽장군 같은 분을 유배라니 당치도 않아요. 걱정 마시고 저랑 같이 성으로 돌아가시지요. 우리 그이가 정신이 회까닥 했나 봐요.

  팽월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형수님!! 담에 육사 골프장에서 같이 라운드하면 매홀 멀리건, 핸디 10개, 투 퍼터 오케이 무조건 드릴게요. 따따따블 불러도 콜 할게요.

궁성으로 온 여씨부인은 득달같이 쪼다 서방인 유방을 닦달한다. “아니 저런 맹장(猛將)을 유배 보내면 어떻게 해요. 들판에 굶주린 호랑이 풀어놓는 거나 똑같은 거 아니에요? 그저 처리하려면 확실히 죽여 없애는 게 젤 안전빵이란 거 몰라요?” 그래서 팽월은 가차 없이 죽음을 당한다. 그의 시체는 소금에 절여 조각조각 내서 각 지역의 제후들에게 하사(下賜)했단다. 모반하면 너네들도 요따위가 된다는 경고용으로 말이다. 그러나 도리어 공포감에 연왕에 책봉된 유방의 불알친구인 노관(蘆管)과 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켰고, 친히 토벌에 나섰던 유방이 다쳐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3. 척부인(戚夫人)

호색한(好色漢)으로 유명한 유방이 밤낮 끼고 살았던 여자가 척부인이다. 척부인 척희(戚姬)는 제음(濟陰) 도정(陶定) 출신의 애첩으로 그녀의 소생 여의(如意)가 있었다. 유방과 원정 중에 만난 척희는 상체를 뒤로 해서 추는 초(楚)나라 춤을 잘 추었다고 하니, 호색의 유방이 뻑 가지 않고 배기겠나? 또한 유방은 척희를 지나치게 아낀 데다 자신을 닮은 여의를 태자로 삼고 싶어 했다. 그러니 여씨부인이 그녀를 얼마나 눈에 가시처럼 싫어하고 증오했는지는 눈에 훤하다. 더구나 여씨부인에 비해 나이도 어리고 얼굴도 예쁘니 더욱 죽이고 싶었겠지. 유방이 죽자 드디어 척부인에 대한 사무친 한풀이가 시작된다. 중국 역사상 가장 잔인한 복수극이 전개된다. 이 드라마는 완벽한 16금(禁) 등급이고, 심약한 사람이나 임산부들은 보면 안 될 정도다. 처음에는 척부인을 감옥에 가둬두고,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자르고 얼굴을 벌겋게 달은 인두로 지져버린다. 붉은 죄수복을 입히고 목에 쇠칼을 차게 하고는 방아를 찧게 했단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리자 흉악범의 감옥에 집어넣어 강제로 욕을 보이게 한다. 야사에는 음부를 짓이겼다거나  그녀의 아들 조왕 유여의의 시체를 가져와 보여주며 농락했다고 한다. 더 해서, 산 채로 수족(手足)을 자르고, 눈을 뽑은 후, 음약(瘖藥)을 먹여고 또 혀를 잘라 벙어리로 만든다. 또 귀에 유황(硫黃)을 부어 귀머거리로 만들어서 돼지우리(뒷간을 겸하는)에 던져졌다. 이를 가리켜 사람돼지란 뜻인 ‘인체(人彘)’라고 불렸다. 참고로 여기 쓰인 돼지 체(彘)자는 거의 쓰이지 않는 벽자(僻字)인데, 바로 이 사건 때문이었다. 춘추전국 시대 글에는 종종 보이는 글자지만, 이 일 때문에 사람들이 끔찍하게 여겨 사용을 꺼리면서 한나라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사장(死藏)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혜제(惠帝 : 여씨 자기의 아들)를 불러 구경하게 한다. 혜제가 “저게 무슨 짐승이오?” 묻자. 여씨부인이 “저게 바로 우리 모자를 음해했던 척부인이랍니다.” 라고 말한다. 성품이 온유하고 자애로웠던 혜제는 통곡과 혼절로 앓다가 1년만에 깨어난다. 그 뒤로 혜제는 정치에 염증을 느껴 음주와 가무 주색에 빠져 지내게 된다. 그러다가 23세의 젊은 나이로 죽는다.


4. 유여의(劉如意)

여의(如意)는 척부인의 하나뿐인 아들. 유방 살아생전 유방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아들이다. 유방은 이 아이를 너무 사랑해 조왕으로 임명한다. 이때가 여의 나이 불과 9살. 여씨부인은 이를 벅벅 갈아댔다. 유방 죽고 나자 여씨부인은 여의를 궁성으로 소환한다. 혜제는 자기 어머니의 포악함을 미리 알고는 직접 마중 나가 여의를 영접한다. 뿐만 아니라 여의와 함께 침식을 같이하며 보호하려 애쓴다. 그러나 귀신같은 여씨부인은 혜제가 아침에 사냥을 나가고, 유여의는 어려서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때 독살한다. 하나의 야설(野說)에 따르면, 여태후는 양미간이 넓고 냉혹하다는 관상을 가졌다지만 어쨌든 여자 아닌가? 남편이라고 하는 유방은 허구한 날 항우하고 쌈박질이나 하니 언제 한번 오붓한 사랑을 하겠는가. 마침내 집에 심부름꾼으로 일하던 심이기(審食其)라는 놈을 유혹해 통정(通情)을 하게 된다. 여태후가 항우에게 포로로 잡혀 있을 때도 이 녀석과 같이 있었다. 이놈은 호리호리하지만 대단히 여태후를 만족시켰나 보다. 유방이 천하통일 궁성으로 들어갈 때 여씨부인은 심이기(審食其)를 챙겨 간다. 궁궐의 출입을 관리하는 자리를 맡아 여태후를 위해 조정 신하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끄나풀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는 심이기(審食其)를 벽양후(僻陽侯)로 봉하여 크게 치사(致謝)하고는 가까이 두어 밤마다 불러들인다. 이 관계는 여태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니 여태후가 척부인을 그렇게 사무치게 미워할 까닭이 뭐 있겠는가? 유방이나 여씨부인이나 도토리 키 재기, 피장파장 아닌가? 그저 가진 놈들이 더 흥청망청, 음란방탕, 패악무도하다니깐.


5. 소제(少帝) 유공(劉恭), 유홍(劉弘)

한(漢)나라의 제2대 황제인 혜제(惠帝)의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나 오래 있지 못하고 곧 폐위되었으므로 소제(少帝)라고 부른다. 제4대 황제 유홍(劉弘)도 마찬가지로 소제(少帝)라고 불리므로 그와 구분하기 위해서 전소제(前少帝)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제는 혜제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생모는 미인(美人 : 후궁의 품계) 품계에 있던 후궁으로 알려져 있다. 《사기》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에 따르면, 혜제의 정비(正妃)인 효혜황후(孝惠皇后) 장씨(張氏)는 아들을 얻지 못하자 거짓으로 임신한 척하며 후궁인 미인(美人)이 낳은 아이를 데려다가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생모를 죽이고, 그 아이를 태자로 삼았다고 한다. 아마 여태후의 소행일 것이다. 소제는 기원전 188년(혜제 7) 음력 8월에 혜제가 죽자 장례를 마친 뒤 그해 음력 9월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아직 나이가 어렸으므로 조모인 여태후(呂太后)가 섭정이 되어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여태후는 조카인 여대(呂臺)를 여왕(呂王)으로 봉하는 등 여씨(呂氏) 일가를 제후왕(諸侯王)으로 삼으며 황제의 권한을 행사했다. 기원전 184년(소제 4) 소제는 우연한 기회에 자신이 효혜황후의 친아들이 아니며 생모가 여태후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제는 여태후를 원망하며 장성한 뒤에 반드시 원한을 갚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여태후는 뒷날 변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소제를 영항(永巷 : 죄를 지은 궁녀를 가두던 곳)에 가두고, 중병에 걸렸다며 아무도 그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 뒤 여태후는 소제가 병 때문에 정신이 온전치 않다며 그를 폐위시키고 남모르게 죽였다. 그리고 그해 음력 5월에 소제의 이복동생인 상산왕(常山王) 유의(劉義)를 새로 왕으로 세우고 이름을 유홍(劉弘)으로 바꿨다. 유홍이 새 왕으로 즉위한 뒤에도 여태후가 계속해서 황제의 권한을 행사했으므로 연호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6. 유우(劉祐)

척부인 아들인 유여의가 조왕으로 있다가 여태후에게 암살된 뒤, 조왕 후임으로 유방의 5자(子) 유우를 앉힌다. 유우의 부인으로는 강제로 여씨집안 여자를 맞게 한다. 유우가 부인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자 부인이 유우를 밀고하게 된다. 유우는 늘 입버릇처럼 요렇게 말했다. 어찌 여씨가 왕이 될 것인가. 여태후가 죽게 되면 반드시 복수하리라. 이 밀고(密告)를 들은 여태후가 유우를 즉각 소환해서 별궁에 가두고는 굶겨 죽인다.


7. 유회(劉滙)

유우의 후임으로 조왕에 앉게 된 유회. 부인은 역시 여씨집안 여자를 강제로 맞게 한다. 늘 여씨집안의 감시와 견제를 받는 유회는 부인을 사랑할 맘이 없다. 그러다가 어느 애첩과 사랑에 빠진다. 그 애첩을 마누라가 독살시킨다. 하여튼 대단한 여씨집안 여인들이다. 유회는 슬픔과 분노 속에 지내다가 자살을 하게 된다. 그러자 여태후는 분풀이로 유회의 일족을 멸하는 대 살육을 감행한다. 여후의 정적 제거 주무기는 짐주(鴆酒)라는 이름의 술을 가장한 짐독(鴆毒)이었다. 이것은 독사(毒蛇)나 각종 독충(毒蟲)을 먹고 사는 새인 짐새의 깃털로 담근 술이었다고 한다. 이런 짐독을 이용한 독살을 짐살(鴆殺)이라 했다. 이렇게 물에 잘 녹는 짐새의 깃털을 물이나 술에 담그거나 타도 색, 맛, 향이 변하지 않아 독살에는 최적이었다. 진(秦)나라의 여불위(呂不韋)가 자살을 위해 먹은 독이 짐독이란 설이 있고, 동탁(董卓)이 황제를 시해하고 황후를 짐독으로 독살했다는 기록이 있다. 위(魏)나라의 중신인 종요(鍾繇)는 자신의 첩인 장창포(張昌蒲)를 위하여 본처를 내쫓은 적이 있었는데, 이에 위제(魏帝) 조비(曹丕)가 본처를 복권하라는 조서를 내리자 짐독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던 적이 있다. 동시대 인물 왕릉 또한 짐독을 먹고 죽은 것으로 나온다. 송나라 시대 남송 때의 기록으로는, 짐새가 발견됐다고 보고가 있다.

이렇듯 잔인하기만 한 여태후도 나이는 속일 수 없는지 집권 8년 만에 죽는다. 죽음의 계기도 심상치가 않았는데, 궁궐에서 걷는데 갑자기 나타난 푸른 개처럼 생긴 괴물이 겨드랑이를 툭 치고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태후가 지나는 길에 쥐새끼라도 지나갔으면 눈에 안 띌 리가 없을 텐데, 주변 사람들은 되레 ‘그런 게 있었느냐’는 반응이길래 점을 쳐봤더니 죽은 조왕 유여의가 태후에게 자신은 물론 자기 어머니를 죽게 만든 것에 대한 복수를 하고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그 후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한 것이다. 사마천의 史記 <呂后本紀>에 의하면, 여태후(呂太后)가 죽자(B.C. 180) 이제까지 그녀의 위세에 눌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던 유씨(劉氏) 일족과 진평(陳平), 주발(周勃) 등 한고조의 유신(遺臣)들은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북군(北軍)을 장악한 조왕(趙王) 여록(呂祿), 남군(南軍)을 장악한 여왕(呂王) 여산(呂産)을 비롯한 외척 여씨(呂氏) 타도에 나섰다. 그간 주색에 빠진 양 가장했던 우승상(右丞相) 진평은 태위(太尉) 주발(侯勃)과 상의하여 우선 여록으로부터 상장군의 인수(印綬)를 회수하기로 했다. 마침 어린 황제를 보필하는 역기(酈寄)가 여록과 친한 사이임을 안 진평은 그를 여록에게 보냈다. 역기(酈寄)는 여록을 찾아가 황제의 뜻이라 속이고 상장군의 인수를 회수해 왔다. 그러자 주발(侯勃)은 즉시 북군의 병사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원래 한실(漢室)의 주인은 유씨(劉氏)이다. 그런데 무엄하게도 여(呂)씨가 유(劉)씨를 누르고 실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이는 한실(漢室)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나 상장군 주발(侯勃)은 천하를 바로잡으려고 한다. 여기서 여씨에게 충성하려는 자는 우단(右袒)하고, 나와 함께 유씨에게 충성하려는 자는 좌단(左袒)하라.” 그러자 전군(全軍)은 모두 좌단하고 유씨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이리하여 천하는 다시 유씨에게로 돌아갔고, 찬성하든 반대하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할 때 흔히 좌우단간(左右袒間)에 결정하라고는 말이 여기서 생겨난 것이다.


여태후의 평가는 후세에 분분(紛紛)하지만 유방을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나름으론 나라의 초창기를 안정화하려고 애도 썼다. 그녀는 유방의 임종 전에 중요 인사에 안배적 차원으로 신하들을 다루어 나갔다. 상국(相國)의 자리는 그렇게 소하, 조참, 왕릉, 진평, 주발 등 개국공신 순으로 이어져 내려 나라는 안정되었고 백성들은 편안하였다. 모든 공신들은 내치에 힘썼으며 백성들 마음을 따르기 위해 힘썼고, 법제 경제와 사상문화의 각 영역에 힘을 써서 훗날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이루는 기초를 놓았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여태후의 정치가적 풍모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흉노의 왕 묵돌(冒頓) 선우(單于)가 유방 사후에 치욕적인 편지를 보내었다. 이야기에 따르면 「그대도 홀로 되어 외롭게 지내고 있으니, 두 사람이 즐겁지 않고, 스스로 즐길 수 없으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꾸길 원한다.(陛下獨立,孤僨獨居,兩主不樂,無以自虞,願以所有,易其所無)」고 하는 모욕적(侮辱的)인 편지를 보냈다. 여태후는 화가 났지만 유방도 40만 대군으로 포위만 당하였지 무찌르지 못한 일을 번쾌가 10만 대군으로 어떻게 하느냐는 계포(季布)의 주장에 따라 마음을 가라앉히고 답서를 쓰기를 「나는 이미 기력이 쇄하여 머리카락과 이빨이 떨어져 나갔고, 걷기조차 힘이 든다오.(我已年老棄衰,髮齒也墮落了,步行也不方便)」이라 했다. 그런 후에 거마(車馬)를 증여하고 좋은 말로서 사절하자 흉노왕 선우는 자신의 실례를 부끄럽게 여겨 사자를 파견하여 한조(漢朝)에 사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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