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동 이층집

유년시절 나의 집 이야기

by 신슈슈

어릴 적 내가 자란 안동시 법상동 대로변에는 낡은 이층집이 하나 있다.


우리 가족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이층집도 지금은 그 집에 살던 사람들만큼이나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내가 살던 법상동은 마치 시간이 30년은 멈추어 있는 듯 그대로이고 ‘지방 소멸’ 다큐멘터리의 예시로 나올만한 동네의 느낌이다.


여름철 방구차가 지나가면 정신없이 따라다니다 어느덧 길을 잃고 어리둥절하던 골목길, 겨울이면 내리막길에서 비료 포대를 깔고 눈썰매를 타던 볼이 발간 아이들, 걸어서 하교하던 안동여중·여고생 인파들 사이에서 들려오던 소녀들의 웃음소리. 세월과 함께 어린 시절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어졌다. 지방의 여느 소도시가 그렇듯 골목마다 촘촘히 박혀있는 정비되지 않은 골목과 낡은 집들과 그 집들 사이로 머리가 새하얀 노인들만 보이는 동네. 대로변 1층에 있는 가게들은 낡은 간판을 남겨 두고 간판과는 용도가 다른 상가들이 듬성듬성 열려있다.


나는 아버지가 자란 집에서 태어나, 열한 살이 되어 분가할 때까지 할머니, 증조할머니와 함께 7명의 사대(四 代)로 이루어진 대식구와 함께 살았다. 그 집터에는 이층집이 있기 전 일제 강점기부터 증조할머니가 사시던 초가집이 있었고, 80년대 초에 2층으로 다시 건축된 집이다. 양옥도 아니고 한옥도 아닌 슬레이트 지붕의 이층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관계처럼 복잡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 집은 여느 가정집과는 다르게 현관이나 대문이라는 것이 없었다. 마치 80년대 상회의 모습처럼 일렬로 늘어선 나무 새시가 일층 입구 한쪽 면을 채우고 있었다. 고사리 손으로는 쉽게 열 수 없었던 무거운 나무 새시를 힘을 다해 옆으로 밀면 대로가 바로 보이는 집.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사적인 공간이 타인들에게 노출되는 구조였다.


무엇보다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집 밖으로 나가 출입구가 외부로 난 재래식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화장실에 한 번 가려면 힘껏 새시를 밀고 대로변으로 나온 후 시멘트로 대충 만든 두툼한 발디딤을 밟고 이층집 옆에 붙은 나무 쪽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다. 할머니는 때가되면 휴지 대신 신문지를 손바닥만 하게 잘랐고 나는 옆에 앉아 두 손으로 신문지가 부드러워 지도록 비비곤 했다. 비빈 신문지가 쌓이면 할머니는 서랍장에서 굵은 실과 바늘을 꺼내 신문지 뭉치에 고리를 만들어 화장실에 걸었다. 화장실에서 휴지를 사용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는데 나는 어린시절 모든 집의 화장실이 이런 줄 알았다. 사실 어릴 적에는 화장실에 가다가 친구라도 만날까봐 화장실 가는 내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올 때 길을 가는 친구라도 만난다면 상처일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가는 내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만난다면, 어디 가는 척 해야지 하며 말이다. 이 집을 모른 척 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1층에는 증조할머니와 할머니가 방 하나씩을 갖고 생활하고 계셨고 2층에는 나의 부모님과 3남매, 다섯 명이 복작거리며 지내는 작은방 두 개가 있었다.

집 내부에는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는데, 시멘트를 발라 만든 좁고 가파른 계단이었다. 이 계단은 어린아이들에게 너무 가팔라 혼자서는 1층으로 내려가지 못할 정도였고, 미취학 시기에는 언니가 나를, 내가 동생의 손을 잡고 내려가야 했던 비효율적인 구조였다. 어릴 적 계단 앞에서 “엄마 엄마”를 외치던 나는 마음이 급해 계단을 내려가다 발을 헛디디고 앞 구르기를 하듯 데굴데굴 굴러떨어진 적이 있었다. 다행히 어릴 적의 유연함 덕분인지 크게 다치지 않고 1층으로 떨어지자마자 리듬체조의 한 장면처럼 벌떡 일어났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난간 없는 이 계단은 할머니들의 생활공간과 우리 다섯 식구의 공간을 구분 짓는 구조이자 아슬아슬한 형태로 4대의 관계를 이어주는 존재였다.


1층의 거주자였던 증조할머니와 할머니는 안타깝게도 오랜 시간 고부갈등이 쌓일 대로 쌓인 관계였다. 엄마는 두 분이 전생에 ‘웬수’였다고 할정도로 할머니와 증조할머니는 대화를 하지 않으셨다. 집안 어르신들의 냉전 사이에서 며느리의 속은 타들어갔으리라. 마땅히 해야할 소통 없는 어르신들이 거주하는 1층에선 늘 적막이 흘렀다. 그렇게 엄마는 결혼하며 손주며느리이자 맏며느리라는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버거울 며느리 타이틀을 두 개나 보유하게 되었다.


증조할머니는 내가 초등학생이 된 후 치매를 진단받으셨다. 고령임에도 정정하시던 예전과는 달리 몸은 급격히 쇠약해지며 정신은 점점 어린아이가 되어갔다. 기척 없이 보따리를 챙겨 홀로 집을 나서곤 했고 증조할머니를 태운 택시 기사의 당황스러운 전화를 받고서는 할머니를 모셔 오는 일이 잦아졌다. 시간이 갈수록 거동이 어려워져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간병 노동을 담당하는 사람이 필요해졌고, 그것은 논쟁할 것 없이 손주 며느리인 엄마의 몫이 되었다. 엄마는 가파른 계단을 오가며 이층의 아이들과 일층의 어르신들을 살폈다. 때가되면 일곱 식구의 밥상을 차려내고 빨래를 한 후 널고 개켰으며 틈틈이 청소했다. 이층에 겨우 몸을 뉘였을 때면 장녀인 언니의 이름을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도 집안 어른들은 엄마를 부를 때 언니의 이름을 불렀고, 엄마는 고단함을 감춘 채 재깍 몸을 일으켰다.

어릴 적 나는 엄마가 왜 본인 이름으로 불리지 않느냐와 더불어 엄마를 부를 때 둘째인 내 이름이 아닌 언니 이름으로만 부를까 라는 어이없는 질투를 했었다. 엄마의 이름은 어디로 갔나. 온 집안은 엄마의 노동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지만 엄마는 결혼 후 이름을 잃어 버렸다. 엄마가 왜 아이의 이름으로 불려야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밤이 깊어지면 증조할머니의 방에서는 슬픈 곡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주로 아이고 아이고로 시작해 내가 오래 살면 뭐하나로 이어지는 곡소리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증조할머니께서는 기력이 떨어지실 때마다 엄마에게 제비집이나 잉어를 구해 고아달라고 하시곤 했고 어느 날은 중풍에 좋다며 새끼 쥐로 담은 쥐술을 구해 드시기도 했다. 남편과 아들을 미리 보낸 증조할머니의 진짜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밤마다 들려오던 증조 할머니의 한스러운 흐느낌과 괴상한 건강식의 불일치에 늘 혼란스러웠다. 증조할머니께서는 십수년간 치매를 앓으시다 아흔아홉살까지 장수하셨다.


엄마는 두 시부모를 살뜰히 공양하는 며느리였다. 어느 날은 시청에 불려 가 수상한 상을 받아오셨는데 상품으로 받아온 가죽 시계의 다이얼에는 ‘효부상’이라는 프린팅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세 아이의 육아, 사대의 살림, 증조모의 병수발로 물이 마를 틈 없던 엄마의 손목에는 가죽 시계가 채워질 틈이 없었고 손목시계는 안방 서랍 구석에 처박히고 말았다. 유년 시절 나의 어린 눈에도 효부상이라 적힌 그 시계는 희생이 인증된 며느리의 손목에 채워주는 족쇄 같아 보였다. 엄마는 그 시계를 끝까지 차지 않았다.


엄마는 어릴 적 우리를 씻기던 빨간 고무 대야에 아흔이 넘으신 증조할머니를 앉혀놓고 목욕을 시키시곤 했다. 등이 굽은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증조할머니를 수발하던 엄마는 아이 셋을 키워놓고 아기가 된 노인을 육아하는 돌봄의 굴레에 갇혀 본인도 천천히 노인이 되어갔다. 얼마 전 전화로 옛날얘기를 하던 중 엄마가 툭하고 내뱉은 말에 마음이 '쿵'하고 무너졌다.


“딸내미, 나 법상동에서 살 때, 그때 창피했다. 옆집에 동창이 살았는데, 걔는 너~무 잘 사는데 나만 증조할머니 똥바가지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게 창피했다.”


그 세월은 버텨낸 게 아니라 돌이 되어서 엄마 마음에 박혀있었다. 돌덩이는 삶의 희로애락과 함께하다 못 견딜 만큼 힘든 일이 생기면 그때의 엄마로 시간을 자꾸 소환한다. 남들 다하는 술, 담배 한번 안 하고 살았는데 병이 생긴 것도 젊어서 그렇게 고생해서이고, 마음이 힘들면 다 그때의 고생 때문이라고 귀결되었다. 그 시간을 허우적대는 엄마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어서 엄마 덕분에 이렇게 삼 남매가 다 잘되었다고 토닥였다.

“너무 고생했어, 엄마. 다 엄마 덕분이니 이제 과거 말고 현재를 살자.”


그 집에 살던 일곱 식구의 마음에는 작은 구멍이 하나씩 있었던 것 같다. 그 구멍은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천천히 메꾸어져 풀도 자라고 꽃이 피었다. 두 할머니를 두고 다섯 식구는 14년간의 합가를 끝내고 할머니의 반대에도 아파트를 분양받아 분가하게 되었다. 증조할머니를 돌봐야 해 여전히 법상동으로 출근하다시피 해야 했지만 결혼 후 처음으로 시댁 어르신들과 따로 살게 된 엄마는 새벽이 되도록 상기된 얼굴로 연신 싱크대와 냉장고며 새로 산 안방 장롱을 닦아댔다. 그렇게 행복해하는 엄마의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던 것 같다.

법상동의 이층집은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다. 리모델링이 되어 깨끗한 수세식 화장실을 두 개나 갖추고 있다. 슬레이트 지붕은 비가 새지 않는 현대식 지붕이 되었고 외벽도 깔끔하게 타일을 붙였다. 그 집에 살던 젊고 어리던 다섯 식구는 이제 모두 아파트에 산다. 지금은 노인과 중년이 되어가는 다섯 식구는 각자의 아파트에서 나름의 서사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카카오 로드뷰로 찾은 어릴적 집 ver.2/2008년-1차 리모델링 상태 >


<어릴 적 집의 모습은 흔적도 없는 현재의 법상동 집 ver.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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