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슈슈 Jun 21. 2024

법상동 이층집

유년시절 나의 집 이야기

 어릴 적 내가 자란 안동시 법상동 대로변에는 낡은 이층집이 하나 있다.

우리 가족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이 집도 지금은 그 집에 살던 사람들만큼이나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법상동은 마치 시간이 30년은 멈추어 있는 듯 그대로이고 ‘지방 소멸’ 다큐멘터리의 예시로 나올만한 동네의 느낌이다. 


 여름철 방구차가 지나가면 정신없이 따라다니다 어느덧 길을 잃고 어리둥절하던 골목길, 겨울이면 내리막길에서 비료포대를 깔고 눈썰매를 타던 아이들, 걸어서 하교하던 여중·여고생 인파들 사이에서 들려오던 소녀들의 웃음소리, 세월과 함께 어린 시절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어졌다. 

 지방의 여느 소도시가 그렇듯 골목마다 촘촘히 박혀있는 정비되지 않은 골목과 집들. 그 집들 사이로 머리가 새하얀 노인들만 보이는 동네. 대로변 1층에 있는 가게들은 낡은 간판을 남겨 두고 간판과는 용도가 다른 상가들이 듬성듬성 열려있다.          

<카카오 로드뷰로 찾은 어릴적 집 ver.2/2008년-1차 리모델링 상태 >


 나는 아버지가 자란 집에서 태어나, 11살이 되어 분가를 할 때까지 할머니, 증조할머니와 함께 7명의 3대로 이루어진 대식구와 함께 살았다. 그 집터에는 이층집이 있기 전 일제 강점기부터 증조할머니가 사시던 초가집이 있었고, 80년대 초에 2층으로 다시 건축된 집이다. 양옥도 아니고 한옥도 아닌 슬레이트 지붕의 2층 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관계처럼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고사리 손으로는 쉽게 열 수 없던 무거운 나무샷시로 채워진 입구를 지나면 대로변이 바로 보이는 이 집은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집 밖으로 나가 건물 내부에 있지만 출입구는 외부로 난 재래식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할머니는 신문지를 손바닥만 하게 잘라 두 손으로 비벼 부드럽게 만들어 실로 묶어놨으며 화장실에서 휴지를 사용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어릴 적 화장실에 가다가 친구라도 만날까 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화장실을 오갔던 소녀는 이 집에 내가 산다는 것이 조금 부끄러웠던 것 같다. 

  

  1층에는 증조할머니와 할머니가 방 하나씩을 갖고 살고 계셨고 2층에는 나의 부모님과 3남매, 다섯 명이 복작거리며 지내는 작은방 두 개가 있었다. 집 내부에는 1층으로 이어지는 시멘트를 발라 만든 좁고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이 계단은 어린아이들에게 너무 가팔라 혼자서는 1층으로 내려가지 못했고, 좀 더 큰 형제가 동생을 데리고 내려갈 수밖에 없는 비효율적인 구조였다. 어릴 적 계단 앞에서 “엄마 엄마”를 외치던 나는 마음이 급해 계단을 내려가다 발을 헛디디고 앞 구르기를 하듯 데굴데굴 굴러 떨어진 적이 있었다. 다행히 어릴 적의 유연함 덕분인지 크게 다치지 않고 1층으로 떨어지자마자 리듬체조의 한 장면처럼 벌떡 일어났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난간 없는 이 계단은 할머니들의 생활공간과 우리 다섯 식구의 공간을 구분 짓는 구조이자 아슬아슬한 형태로 3대의 관계를 이어주는 존재였다. 


 1층의 거주자였던 증조할머니와 할머니는 안타깝게도 오랜 시간 고부갈등이 쌓일 대로 쌓인 관계였다. 엄마는 둘이 전생에 ‘웬수’였다고도 할 정도로 할머니와 증조할머니는 대화를 거의 하지 않으셨다. 그 사이에서 엄마는 손주며느리이자 맏며느리라는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버거울 며느리 타이틀을 두 개나 보유한 K-여성이 되었다. 게다가 고령임에도 정정하셨던 증조할머니는 어느 날인가 ‘치매’라는 병을 안고 어린 아기가 되어갔다. 보따리를 싸서 집 밖으로 뛰쳐나가 택시를 잡고 가출을 한 할머니를 여러 번 모셔오고 식사를 했는지도 기억을 못 하셔 밥을 안 준다며 타박하는 일이 잦아졌다. 증조할머니의 방에서는 “내가 죽어야지..”하는 슬픈 곡소리가 가끔 들려오곤 했는데 기력이 떨어지실 때마다 제비집이나 잉어를 고아 드시기도 하고 쥐술이라는 스태미나 음식들을 자주 요청하셨다. 증조할머니는 10년간 치매를 앓으시고 아흔아홉 살까지 장수하셨다. 


 이런 K-여성의 희생적인 사연 덕분에 엄마는 언젠가 시청에 불려 가 '효부상'이라는 수상한 상을 받아오셨다. 하지만 효부상이라는 선명한 프린팅이 다이얼에 박혀있던 가죽시계는 살림과 병수발로 물이 마를 틈 없던 엄마의 손목에 채워질 틈도 없이 안방 서랍 구석에 처박히고 말았다. 어린 눈에도 효부상이라 적힌 그 시계는 인증된 희생적인 며느리의 손목에 채워주는 족쇄 같아 보였다.

   

 그 당시 엄마는 어릴 적 우리를 씻기던 빨간 고무 대야에 아흔이 넘으신 증조할머니를 앉혀놓고 목욕을 시키셨다. 등이 굽은 가벼운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증조할머니를 수발하던 엄마는 아이 셋을 키워놓고 아기가 된 노인을 육아하는 돌봄의 굴레에 갇혀 본인도 천천히 노인이 되어갔다. 얼마 전 전화로 옛날 얘기를 하던 중 엄마가 툭하고 내뱉은 말에 마음이 '쿵'하고 무너졌다. 


“딸래미~ 나 법상동에서 살 때, 그때 쪽팔렸었다. 옆집에 동창이 살았는데, 걔는 너~무 잘 사는데 나만 증조할머니 똥바가지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게 쪽팔렸다.”


 그 세월은 버텨낸 게 아니라 돌이 되어서 엄마 마음에 박혀있었다. 돌덩이는 삶의 희로애락과 함께하다 못 견딜 만큼 힘든 일이 생기면 그때의 엄마로 시간을 자꾸 소환한다. 

남들 다하는 술, 담배 한번 안 하고 살았는데 병이 생긴 것도 젊어서 그렇게 고생해서이고, 마음이 힘들면 다 그때의 고생 때문이라고 귀결되었다. 그 시간을 허우적 되는 엄마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어서 엄마 덕분에 이렇게 삼 남매가 다 잘되었다고 토닥였다. 

“너무 고생했어 엄마. 다 엄마 덕분이니 이제 과거 말고 현재를 살자.” 


 그 집에 살던 일곱 식구의 마음에는 작은 구멍이 하나씩 있었던 것 같다. 그 구멍은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천천히 메꾸어져 풀도 자라고 꽃이 피었다. 두 할머니를 두고 다섯 식구는 14년간의 합가를 끝내고 할머니의 반대에도 아파트를 분양받아 분가하게 되었다. 증조할머니를 돌봐야 해 여전히 법상동으로 출근하다시피 해야 했지만 결혼 후 처음으로 시댁 어르신들과 따로 살게 된 엄마는 새벽이 되도록 상기된 얼굴로 연신 싱크대와 냉장고며 새로 산 안방 장롱을 닦아댔다. 그렇게 행복해하는 엄마의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던 것 같다.  

 

 법상동의 이층 집은 아직도 그 자리에 서있다. 리모델링이 되어 깨끗한 수세식 화장실을 두 개나 갖추고 있다. 슬레이트 지붕은 비가 새지 않는 현대식 지붕이 되었고 외벽도 깔끔하게 타일을 붙였다. 그 집에 살던 젊고 어리던 다섯 식구는 이제 모두 아파트에 산다. 지금은 노인과 중년이 되어가는 다섯 식구는 각자의 아파트에서 나름의 서사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어릴 적 집의 모습은 흔적도 없는 현재의 법상동 집 ver.3>


작가의 이전글 햇병아리 간호사의 암병동 적응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