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슈슈 Jun 24. 2024

나의 밴드 연대기

빛바래지 않는 청춘의 한 페이지

 한동안 대한민국 여성들의 가슴을 벌렁거리게 만든 '산업튀'의 변우석 배우님이 유퀴즈에 나온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본방사수를 위해 티브이 앞에 앉았다. 하지만 나는 변우석이 아닌 더 강렬한 무언가에 빠져 마음을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사진: JTBC 뉴스>
<JTBC 뉴스 발췌>
한 여중 밴드부의 '동아리 홍보 영상'이 작은 화제가 됐습니다. 네 명의 학생들이 연주하는 짧은 영상, 누리꾼들에게 '청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대학을 졸업했는데 밴드부에 들어가고 싶다", "청춘이 오래도록 빛나길" 이런 따뜻한 반응이 이어졌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들어봤는데요. 지금까지 드럼이 없던 밴드에 지난해 마침 부임한 새 과학 선생님이 드럼을 맡아 학교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연주하기 위한 선생님의 조건은 '과학 점수를 잘 받을 것'이었다고 합니다.


태안여중 밴드 KBZ(김치볶음밥즈) 네 명의 여중생이 합주하는 실리카겔의 'no pain no gain' 영상이 그야말로 떡상하여 뉴스에도 나오고 유퀴즈에도 나오게 된 것이다. 연주를 잘하기도 했지만 과하지도 수줍지도 않은 소녀들의 모습과 즐겁게 합주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 댓글창에서는 KBZ를 잘 키워서 몇 년 내로 록페스티벌 헤드라이너로 세워야 한다는 주장에 좋아요! 가 수백 번 눌리고 있었다.  

"청춘의 한 페이지?"

이게 뭔가 하며 플레이한 합주 영상에서 네 명이 발을 구르며 시작하는 기타 리프 인트로를 들으며 나는 학창 시절에 머물던 밴드 연습실로 타임슬립하는 기분이 들었다.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뭐든 표현하고 싶던 시기

잘하지 못했지만 잘하기보다 그냥 하고 싶었던 날들


 다들 사춘기에 열병 앓듯 좋아하거나 심취해 있었던 무언가가 있지 않은가? 나는 학창 시절 '락앤롤병'에 걸렸었다. 그 당시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을 필두로 펑크음악으로 시작한 인디씬에는 봄이 왔다. 홍대 인디 뮤지션들의 음악을 국영수 공부하듯이 몇 시간이고 듣고 도서관에서 '만화로 보는 록음악의 역사' 같은 책을 읽으며 락앤롤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 나의 장래희망이 팝음악 잡지의 대표 격이던 지금은 폐간된 Hot music의 기자였으니, 나름 진로와 관련된 작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월급을 받으며 음악을 맘껏 듣고 평론이나 기사를 쓴다니! 어린 나에게 음악기자는 너무나 멋짐 그 자체였다. 하지만 주위에 누구도 음악기자가 되는 법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그저 핫뮤직 잡지를 사면 부록으로 딸려오는 컴필레이션 음악 CD를 닳도록 듣고만 있었다.


지방 소도시에 살던 나는 애끓는 열정을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이 시골동네에서  내 또래의 동지들은 없어 보였다. 결국 PC통신 시절, 유니텔에 있던 작은 규모의 락동호회에 가입하여 사춘기의 열병을 해소하는 나름의 건설적인 해결책을 찾게 된다. 그곳은 검은색 메탈리카 티셔츠를 입은 험상궂은 아저씨들이 많을 것만 같은 메인 락동호회와는 달리 회원들의 연령대가 낮은 편이었고, 음악만 좋아하면 두 팔 벌려 환영하여 가입이 가능한 문턱 낮은 동호회였다. 매일 밤 채팅방에서 새로 나온 국내외 밴드의 신보를 파일로 복사해서 공유하기도 하고 음악얘기를 떠들어댔다.('소리바다'가 존재하던 시절, 당시에는 음악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없던지라 온라인으로 음악을 돈 주고 구매하거나 스트리밍을 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였다.) 한참을 언니 오빠들과 온라인상에서 어울리다 보니 중학생 신분에 동호회의 관리자 중 1인이 되었고, 주위 또래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코흘리개로 보이는 중증에 걸리고야 말았다.

 그 당시 나의 행태를 생각하면 나의 부모님이 보살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컴퓨터가 거실에 있었음에도 새벽에 몰래 PC통신에 접속하려고 접속 시에 울리는 특유의 '삐~비빅!'소리를 감추기 위해 이불로 컴퓨터 본체를 감싸 안고 숨죽이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PC통신에 접속하면 전화가 안되던 상황이라 당시 참다못한 아버지께서 두꺼비 집을 내렸던가, 컴퓨터 코드를 잡아채 뽑아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구네 집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정모에 참여하기 위해 안동에서 청량리행 열차를 타고 몇 번이나 홍대로 출발하게 된다. (마지막에는 "이대로 가면 집 나가는 걸로 알겠다"는 멘트를 하신 걸로 보아 위험한 여행을 감행했다.) 안동에서 온 촌스러운 여중생은 실제로 대면하게 된 회원님들과 홍대 앞 어느 카페에 앉아 기어들어가는 염소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하고 라이브 클럽에서 인디밴드들의 공연을 보며 더운 마음을 식혔다.


자꾸 보다 보면 해보고 싶은 게 또 사람 마음 아니던가? 

친해진 동호회 회원이 대입 준비해야 한다며 빌려준 일렉 기타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나와 공부를 더 멀어지게 만들어버렸다. 실제로 기타 만질 일이 희귀하던 동네에서 자란 나는 돌아가는 기차에서부터 일렉기타를 꺼내 튕겨보며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기타는 생겼는데 어떻게 칠지 몰라 지역 밴드 커뮤니티에 "기타 어디서 배우나요?"라는 글을 올렸을 뿐인데, 누군가가 바로 쪽지를 보내왔다.

"나랑 밴드 할래?"

마치 '하프라는 악기가 너무 비싸 하프만 있으면 음대의 하프 전공자가 될 수 있다!'는 온라인의 괴담처럼 기타가 생기니 바로 밴드를 하자는 사람이 생겼다. 나는 C코드도 모른 채 밴드 세컨드 기타리스트가 되고 말았다. 5개의 고등학교에서 밴드 해보자고 모인 애들은 인근 대학교 연습실들을 유랑하고 다녔고, 천 원 라이브라는 지역 청소년들의 밴드 음악 공연무대에도 섰다. 하지만 악기 연주자들의 기본기가 워낙 빈약해서 연주도 별로고, 보컬오빠는 열정만 많은 음치가 아닐지 의심되었다. 공연은 망하고 멤버들은 각자의 길로 흐지부지 흩어졌다.


고등학교 입학 후 다른 반 여자애 두 명이 교실로 찾아왔다.

친구 C: "너 기타 친다며?, 우리랑 밴드 할래?"
친구 K: "매점에서 맛있는 거 사줄게"

아니, 매점에서 맛있는 거 사준다고 밴드 하자니? 이런 로맨틱한 제안이 있나.

일본 영화의 삼삼한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미 지어진 밴드 이름이 심상치 않았다.

여고생들의 밴드 이름은 '다방 씨스털즈', 영어로 쓸 수 없고 순수 한글로 '씨스털즈'로 표기한다.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분분하나 아무튼,

다방 씨스털즈였다.

공연 포스터가 붙던 날 누군가는 길에 붙은 공연 포스터에 적힌 우리 밴드 이름을 보고 박장대소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글명으로 표기된 우리 밴드의 이름은 '노티스 3기', '포커페이스 4기'와 같이 멋을 내 지은 영어 이름들 사이에 단연 유니크해 보였다. 우리의 '다방 씨스털즈'에는 다른 학교 학생도 멤버로 있었기에 학교 소속 밴드도 아니었다. 그 말은 우리는 연습실이나 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실용음악 전공자 한 명 없던 인문계 여고생들의 밴드는 부모님의 눈치를 피해 연습실을 찾아 헤매다 대중교통으로는 편도 한 시간가량 걸리는 남자고등학교 연습실에 잠입하여 연습하게 되었다. 더 가까운 곳도 있었는데 왜 거기까지 가게 되었는지? 가성비 떨어지는 연습시간보다는 사춘기 소녀들은 잿밥이 관심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남학생 구경하기 쉽지 않던 여고생들은 안동고의 연습실을 빌려 쓰며 선후배들과 친해져 남고 밴드부의 비공식적인 소속 밴드가 되었다. 다방 씨스털즈는 장비도, 연습실도 없는 상황에서 음악에 대한 방향에 대한 조언을 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우리는 그 남고를 졸업한 밴드부 선배들과 동갑내기 친구들의 진두지휘 아래 공연 연습을 하고 연주나 사운드 잡는 법도 배웠다. 공연 전에는 체력 단련을 해야 한다며 남의 고등학교 뒷산에서 연병장을 뛰듯 달리기도 시켰다.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하나, 둘!"을  외치며 갓 제대한 선배님과 구보를 했다.

 공연이 다가올수록 우리들의 불안은 점점 증폭되었다. 합주를 하다 "그 부분에서 네가 틀렸니, 내가 틀렸니"로 시작해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때로는 연습실에서 쥐가 등장하여 의도치 않게 샤우팅과 점프를 하게 되고, 훈련 중이던 안동고 축구부 학생들이 연습실 문틈으로 빼곡히 서서 우리를 관찰해 소리를 질러댔다. 독서실에서 공부할 시간에 합주하고 뒤풀이를 즐기던 우리들의 성적은 당연히 길을 잃었지만 다른 것을 얻었다며 초긍정적인 사고를 하던 철없던 우리들이었다.


졸업 이후에도 우리는 밴드 선후배들과 누나 오빠 동생하며 친하게 지냈고, 함께 클럽을 대관해 정기 공연을 하기도 하고, 체육대회를 하며 사회인이 되어서도 친하게 지냈다. 밴드 최고의 아웃풋은 다방 씨스털즈의 드러머 친구 K와 포커페이스의 기타리스트 K의 결혼이다. 둘은 결혼해 아들을 낳았으니 이게 바로 락앤롤 아니겠는가.


얼마 전 다방 씨스털즈 멤버 중 2인을 만나 어릴 적 얘기를 나누었다.

친구 C: "야~ 우리 아들한테 나 밴드 했던 거 절대 비밀이다. 공부 안 하고 밴드 한다고 나대던 거 생각하면 아들한테 말할 수 없다."

친구 K: "그때 생각하면 진짜 재밌었는데, 어디 가서 밴드 했다고 말하기 창피해서 말 안 한다."     


20년이 지난 우리는 꽤나 점잖은 어른이 되었다. 자녀에 대한 체면을 생각하는 어머니가 된 우리들은 낯 뜨거워하면서도 입모아 하던 얘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 생각하면 밴드 했던 거만 생각나! 근데 진짜 내 딸이 그러면 머리채 잡는다! "


합주 연습 후 늦은 시간, 야간 자율학습이 끝난 남학생들을 가득 태운 독서실 차를 히치하이킹해서 얻어 타고 귀가하던 발칙한 소녀들. 태안 시골길에서 한 줄로 서서 악기를 들고 걸어가는 태안여중 학생들을 보며 20년 전 친구들과 내가 겹쳐 보인다.

 

그 이후로도 당시 연습실에서 만난 인연을 이어 '지붕 프로젝트', '3남 1녀'란 이름으로 짧게 연습도 하고 공연도 했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나에게 두근거리는 말이 있다.

"나랑 밴드 할래?" 이제는 아무도 안 물어봐줘서 내가 먼저 얘기해야 할 것 같지만 말이다.

 

<여전히 밴드 사운드만 들으면 좋아서 심장마비 올 지경>


        

작가의 이전글 법상동 이층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