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수는 접어두세요
강습이 끝난 후 자유수영을 하며 레인 끝에 다다를 무렵이면,
1번 아저씨가 매의 눈으로 나의 자세를 분석 중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숨을 고를 틈도 없이 1번 아저씨의 수요 없는 공급인 개인 레슨이 시작된다.
"자유형 할 때 이상하게 로봇 같아. 근데 있잖아, 배영은 더 로봇 같아."
"손을 이렇게.. 어? 이렇게 드는 거랑, 물속에 푹 넣은 거랑! 어떤 게 더 부력이 셀 것 같아? 이렇게 뻗어서 글라이딩을 해봐"
대화가 들렸는지 레인 끝에 매달려 가랑이를 양쪽으로 찢으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할머니 회원분이 말을 얹는다.
"맞아, 아까 자세가 갸우뚱갸우뚱하더라~."
수영패밀리들과 단체로 한강을 평영으로 건너신 적 있다는 할머니 회원, 그녀는 강습이 끝난 후 주어지는 10분간의 자유 수영시간에 자유형을 하다가 느닷없이 멈춰 서고는 물구나무를 서곤 했다. 부딪칠까 봐 급하게 멈춘 나를 보면 찡긋 웃으며 이렇게 말하신다.
"자기도 물구나무 한 번 서봐~!"
오늘도 싱크로나이즈 선수처럼 레인 중앙에 솟아있는 할머니의 두 다리를 보며 충돌하지나 않을까 앞을 살핀다.
수영 커뮤니티에서는 수영장 빌런으로 손꼽히는 것들이 있다.
1. 수영실력 지적질
2. 수영장 물구나무
3. 수영장 변태 (예: 물속에 잠수해서 여자 회원들의 평영 자세 관찰/의도한 신체접촉)
4. 속도는 느린데 무조건 앞자리 사수
5. 발터치 등등
아직 변태는 만나지 않아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 수영장을 다닐수록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나 보던 빌런들이 자꾸 눈에 보인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영법은 배웠지만 어설픈 내 수영실력을 본 어르신들은 나에게 뭐라도 알려주고 싶어 했고 나도 감사한 마음으로 조언해 준 동작들을 연습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하다가
"나도 잘 못하지만요~이렇게 한번 해봐."로 시작했던 1번 아저씨의 훈수도 처음엔 겸손한 메타인지를 바탕으로 시작됐던 것이다. 약간의 미안함이 가루처럼 묻어있던 훈수라 나는 이것을 건강한 조언으로 받아들였다.
한편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피드백이 딱히 없는 우리 센터에서(자세와 무관한 운동 할당량 채우기 느낌) 수영 유튜버 선생님의 가르침과 더불어 오프라인 선생님을 초빙한 듯한 느낌이 들어서 수영 실력이 조금 나아질 수도 있겠다는 작은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훈수와 더불어 칭찬을 빙자한 멘트들이 자꾸 귀에 걸렸다.
회원님은 우리 레인의 꽃이야.
회원님은 아직 젊어서 자세 잘 잡고 예쁘게 수영해야지.
듣다 보니 남는 건 불쾌함이었다. 이쯤 되면 훈수에 성희롱 한 스푼 아닌가.
1번 아저씨는 어느 날부터 수영장에서 보이지 않게 됐다. 능글맞게 사람들을 챙기며 레인의 반장 역할을 하던 사람이었다. 탈의실에서 우연히 들은 것은 1번 아저씨가 어깨통증으로 수영을 중단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고, 그 말을 전한 것은 1번 아저씨의 아내분이었다. (같은 시간대에 다른 레인에서 수영하고 있으셨음)
그런데 말이다.
훈수 스트레스에서 벗어났다는 자유를 느끼기도 전에 어느 날 2번 아저씨가 나에게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수영장에는 레인마다 훈수쟁이 할당제가 있나 보다. 메인 훈수쟁이가 자리를 비운다면, 잔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평소에 꾹 참고 있던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우나 보다.
나만의 속도로 조금씩이나마 발전하는 성장캐를 꿈꾸는 나로서는, 비관적인 훈수들로 수태기가 올까 봐 두려워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