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귀촌 14년차,괴산에 뿌리내리다

삶의 속도를 늦추며 얻은 평화.흙냄새와 바람이 가르쳐 준 새로운 배움

by 최국만

도시에서의 삶이 마감될 무렵,

나는 아내와 함께 조용한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30여 년간 방송국 PD로 일하며 진실을 좇았던 시간은 치열하고도 고단했다.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초 단위로 살아온 삶이었다.

분주함과 책임감,때로는 공허함이 뒤섞인 그 시간을 지나 ,괴산이라는 작은 고장에서 우리 부부는 다시 삶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괴산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이다. 아내는 도시 생활을 접고 밭을 일굴 결심을 했고,나는 그 결심을 함께 따랐다.

누군가는 방송국에서 평생 일한 내가 농촌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괴산의 사람들과 자연은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귀촌은 단지 주소지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속도와 방향을 바꾸는 일이었다.

시계를 보며 쫓기듯 살았던 우리가 이제는

히늘을 보며 하루를 짐작하고,텃밭의 작물들을 보며 계절을 느낀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사람과의 관계였다.

방송국에서는 늘 사건과 이슈 중심의 인간관계를 맺어왔지만,이곳에서는 함께 나누는 밥 한 끼,손에 흙이 묻은 채 건네는 안부 속에서 진짜 "이웃'을 만난다.


나는 중원대학교 9기 최고위과정에도 참여했다.아내의 권유로 시작했지만, 그곳에서 지역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서로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수업이 끝난 후 함께 막걸리 한 잔을 나누며 이야기 꽃을 피운 시간은,방송국의 회의실보다 훨씬 더 따뜻했다.


무엇보다 농촌의 시간은 다르다.도시는 '속도'가 중심이지만,이곳은 '흐름'이 중심이다.그 흐름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노자가 말한 '무위자연',즉 있는 그대로의 흐름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여기에 있다.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작물은 자라고,

이웃은 마음을 연다.그렇게 나 역시 서서히 괴산의 사람이 되어갔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 것 같지만,어느덧 14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우리 집 앞 냇가에는 여전히 올갱이가 살아 있고, 여름이면 반려견들이 뒹구는 잔디마당엔 아내가 심은 꽃들이 흐드러진다.


어느새 마을 사람들은 나를 'PD님'대신 '농부'처럼 대해준다.

나는 PD의 카메라를 내려 놓았지만, 이제는 괴산의 한 사람으로,또 누군가의 이웃으로 살아간다.


귀촌은 나에게 단순한 '은퇴 후의 삶'이 아니라,존재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었다.

불교에서는 모든 현상이 변한다는 의미로

제행무상이라 한다.방송의 속도에 묻혀 미쳐 느끼지 못했던 인생의 덧없음,그 속에서 피어나는 감사와 수용의 감정을 나는 괴산에서 배웠다.


언젠가 도시로 돌아가야 할 줄 알았던 마음도 이제는 괴산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자연이 주는 고요함,사람 사이의 온기,삶의 속도에 맞춰 살아가는 지혜,이 모든 것이 괴산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귀촌은 땅에 뿌리내리는 일이 아니라,내 마음에 뿌리를내리는 일이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