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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가 새끼를 낳은 밭

자연이 우리에게 건넨 조용한 선물.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빛

by 최국만

작은 야산 아래,우리 집이 있다.

산이 품어주는 집,집 앞 시냇물이 속삭이는 마을.

사계절 내내 들짐승과 새들이 드나드는 이곳은 말 그대로 ‘자연과 동고동락하는 삶‘이다.

도시에서 바쁜 삶을 뒤로하고 귀촌한 지도 어느덧 십수 년,나는 이제 도시인도,시골 사람도 아닌,

자연과 삶을 함께 배우는 ’중간자’로 살고 있다.


그날은 햇살이 뜨거운 초여름이었다.

겨울의 찬 기운이 물러나고,땅속에서 새싹이 파릇하게 올라오던 날.

아내와 나는 평소처럼 텃밭 일을 하러 마당에 나섰다.

우리 집 정원은 곧 숲이고,숲이 곧 정원이다.

그래서 매번 둘러볼 때마다 작고 새로운 생명을 발견한다.


정원 끝 풀숲에서 뭔가를 발견한 아내가 급히 나를 불렀다.

나는 뱀이라도 나온 줄 알고 달려갔다.

그런데 아내의 품에는 태어난지 며칠 안되보이는 고라니 새끼였다.

아직 엄마 품이 필요한 ,손바닥만 한 몸에 눈만 또렸한 새끼는 겁에 질려 있었고,작고 높은 울음소리로 애타게 어미를 부르고 있었다.


그 새끼가 있던 곳은 돼지감자 줄기가 우거진,사람 눈에 쉽게 띄지 않는 은신처였다.

자연은 얼마나 현명한가.

고라니 어미는 산자락과 시냇물 사이,조용하고 안전한 우리 집 뒤편 풀숲을 자신의 보금자리로 택했다.

그곳에 새끼를 낳은 것이다.


아내는 그 새끼를 조심스레 안아주며 진정시켰다.

그녀는 평소 동물에 대한 애착이 깊다.

도로 위에서 교통사고 난 고양이를 품어 치료해 다시 자연으로 돌려 보내고,함께 사는 개들인 별이와 뭉게,아롱이와 레이를

누구보다 정성스럽게 돌보는 사람이다.

그런 아내이니, 엄마와 떨어진 고라니 새끼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보,어떡하지….?”

“괞찮아,어미가 올 거야.잠깐 돌봐주다 자연으로 돌려보내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산 위에서 어미 고라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경이롭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고라니 새끼를 그 자리 근처에 내려 놓았고,어미는 우리 인기척을 피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곧 새끼는 어미를 향해 발도 제대로 떼지 못한 채 달려갔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이 작은 생명이 왜 하필이면 우리 집 근처를 택했을까?

단순히 은신하기 좋고,먹을 게 많아서였을까?

아니다.

감히 나는 믿고 싶다.

우리 부부의 삶의 방식,생명를 대하는 태도,그리고 ’존중’이라는 보이지 않는 울림이 그 어미 고라니에게도 전해졌다고.


어미는 그 새끼를 가장 안전한 곳에 낳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집 뒷숲은 ,그 선택을 받은 곳이다.


생명을 그렇게 감지한다.

어디가 안전한지,어디가 온기 있는지.

어디에 나의 아이를 맡겨도 괞찮을지도.


문득 떠오른 말이 있다.

“수구초심” 여우도 죽기 전에 자신이 태어난 언덕을 향해 머리를 둔다고 했다.

삶의 마지막에서조차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능.

인간도 다르지 않다.우리가 도시의 화려함과 편리를 잠시 내려놓고 시골로 오는 이유,

바로 그것이 아닐까.

자연 속에서 새끼를 낳은 밭을 다시 바라본다.

거기에 어린 고라니가 있었고,어미가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 부부는 그 곁에서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 새 생명은 ,말없이 ‘존재의 근원’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자연은 단지 공간이 아니라,마음을 밑길 수 있는 믿음의 장소라고.

이 땅에서 오늘도 나는 고맙다.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이 작은 숲과 함께 늙어간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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