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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 늙어간다는 것

병마와 함께 맞이한 나이듦,단순한 부부가 아닌 삶의 동반자

by 최국만

스물셋의 젊은 그녀와 마주 앉아 나눴던 첫 대화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돈도,명예도,확실한 미래도 없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눈빛을 믿고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 길 위에서 웃고 울며 아이들을 키웠고,무너질 듯한 순간에도 서로의 어깨에 기대며 일어섰다.


젊은 날,우리는 늙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나이 들어가는 줄로만 알았고,노년이란 막연히 몸이 불편해지고,머리가 희어지며,세상과 조금씩 멀어지는 시기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살아보니 알겠다.

늙는다는 것은 단순히 몸이 쇠해지는일이 아니라,더 많이 견디고,더 많이 품고,더 깊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라는 것을.


나는 지금 아내와 함께 늙어가고 있다.

이제 그녀와 나의 삶에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해졌고,말보다 눈빛이 많은 이야기를 대신한다.

함께 늙어간다는 것은 같은 속도로 늙는다는 뜻이 아니다.

아내는 나보다 일곱 해나 젊지만 ,내 삶의 고비마다 그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삶의 짐을 함께 짊어졌다.


그녀는 이른 새벽 어둠 속에서도 도시락을 싸고,직장을 나가 27년을 성실히 일했다.

아이들을 돌보며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고,부모님께 더 따뜻한 사랑을 드리지 못한 내 부족함까지 감싸 안았다.

언제부터인가 내 삶이 어지러울수록 그녀는 더 단단해졌다.

그리고 지금,우리는 노년의 문턱에 함께 서 있다.


아내가 암이라는 복병을 만나 수술대에 올랐을 때,나는 처음으로 시간을 붙잡고 싶었다.

그동안 그녀가 버텨온 시간들을 ,이제는 내가 대신 견뎌주고 싶었다.

하지만 질병은 타인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는다.

병원 복도의 차가운 의자에서 ,그녀가 수술대 문 안으로 사라지는 순간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제발,나보다 하루라도 늦게 떠나달라고…”


아내와 함께 늙어간다는 것은 서로의 쇠약함을 감추지 않는 일이다.

젊은 날에는 아프지 않은 척,괞찮은 척을 했지만 이제는 숨기지 않는다.


무릎이 시큰하다고 말하고,가끔 기억이 흐릿해진다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를 더 천천히 부르고,더 자주 안아준다.

그리고 삶이 더 이상 경쟁이 아니라 공감의 여정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함께 늙는다는 것은 ,생의 마지막 장을 함께 써 내려가는 일이다.

우리는 이제 소유보다 기억을 ,성취보다 의미를 나눈다.

밭에서 함께 땀 흘리고 ,시장에서 장을 보고,개와 고양이에게 말을 걸고,,늦은 오후 찻잔을 사이에 두고 옛이야기를 꺼내며 웃는다.

그 평범한 일상들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늙어가는 것이 쓸쓸하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내 곁에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부축하며 걷는 길은 느릴지언정 외롭지 않다.

삶의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우리는 더 가까이 붙는다.

마치 두 그루의 나무가 바람을 나눠 견디듯이,그렇게 우리는 한 세월을 살아낸다.


나는 아내와 함께 늙어간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그녀와 함께한 모든 계절이 나를 사람답게 만들었고,지금도 내 삶의 중심에는 여전히 그녀가 있다.

앞으로 몇 번의 계절을 더 함께 보낼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하루하루가 너무 감사하고,매 순간이 축복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다짐한다.

나의 마지막 숨이 다하기 전까지,그녀 곁에서 따뜻한 하루를 지켜주겠노라고.

그것이 내가 젊은 날의 사랑에게 해줄 수 있는,가장 늙은 방식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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