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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평안해지는 법

노년은 잃는 시간이 아니라, 가벼워지는 시간이다

by 최국만


나이가 들수록 마음이 조용해진다.

예전에는 사소한 말에 마음이 뒤흔들리고,

무엇인가 이루지 못한 것들 때문에 스스로를 탓하곤 했다.

하루를 버틴다는 것이 삶의 목적 같던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평안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내 안에서 자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평안은

내 곁에 오래 머문 사람과 함께 자란다.

나에게는 그 사람이 아내였다.


젊은 시절 우리는 참 많은 일을 서둘러 해냈다.

아이들 키우고, 일터에서 치열하게 살아내고,

매일이 전투 같았다.


그러다 아내가 항암치료를 받게 되었을 때

우리 인생의 속도가 멈추었다.


그때 우리는 알았다.

사람은 서둘러야 할 때보다

멈추어야 할 때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지금 우리는 천천히 걷는다.

길가에 핀 작은 들꽃을 보며 걸을 만큼

삶의 걸음이 부드러워졌다.


서두르지 않는 이 속도에서

평안이 피어난다.


아내의 손등에는 치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예전보다 힘이 약해지기도 하고

어떤 날은 잠시 숨을 고르기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손등에서

예전보다 더 깊은 아름다움을 본다.


젊은 날에는

가진 것으로 사랑을 증명하려 했지만,

이제는 비워낸 만큼 사랑이 더 환해진다.


불필요한 걱정,

나를 지키고자 했던 자존심,

사소한 서운함들.


그것들을 조금씩 내려놓고 나니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비워낼수록

평안은 깊어진다.


나는 예전에는 사랑을 ‘말’로 확인하려 했다.

잘하고 있는지, 부족하지 않은지

늘 조바심을 냈다.


하지만 아내와 함께 늙어가며 깨달았다.


사랑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이다.


아내가 힘든 날,

나는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옆에 앉아 손을 잡아준다.


산책길에서

아내의 걸음이 느려지면

나는 한 발 느리게 걸을 뿐이다.


말은 줄고,

손의 온도만 남는다.


그 온도가 우리 둘을 살려주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많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 곁에 있다.


아내가 아침에 끓여주는 따뜻한 차 한 잔,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

별이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모습.


이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안다.


오늘 살아 있다는 것,

함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감사할 일이다.


노년은 끝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이 가장 깊어지는 시간이다.


더 이상 세상에 무엇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애쓸 것도 없다.


그저

서로의 곁에 오래 머물면 된다.


천천히,

부드럽게,

함께.


우리는 여기까지 잘 살아왔다.

그리고 아직 살아 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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