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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배우는 노년의 용기

아내가 사준 산에서, 나는 두 번째 인생을 배우고 있다

by 최국만


퇴직을 하기 5년 전이었다.

나는 여전히 국내와 해외를 넘나들며

취재 현장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방송국의 일이 늘 그렇듯,

집보다 사건 현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조용히 말했다.


“여보… 내가 당신을 위해 산을 두 군데 샀어.”


그 말이 처음엔 무슨 뜻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자 아내는 웃으며 덧붙였다.


“당신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야.

퇴직하면 집에만 있을까 봐,

그러면 금방 늙을까 봐…

나무도 심고, 자연 속에서 다시 살아보라고.”


그때는 그 말을 깊게 새기지 못했다.

바쁘다는 이유로,

당장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지만 퇴직 후,

아내가 사준 산은

내 인생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그 산에 들어가 흙을 밟고,

작은 나무를 심고,

계절의 틈을 만지는 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산주’가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산림조합에서 주최하는

임업인·산주 교육에 참석하게 되었다.

교육은 경북 청송에 있는 임업인종합연수원에서

11월18-19 60대 이상 산주들과 함께한

1박2일 일정이었다.


괴산 증평 산주들 약 40여명이다.

평균 나이는 60세가 훌쩍 넘었다.

퇴직한 분들, 귀촌한 분들,

오랜 세월 산을 지켜온 분들…


이 나이에

나물 재배, 산림 관리, 임산물 가공 같은

새로운 기술 교육을 받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모두가

눈망울을 반짝이며 강의실 맨 앞자리를 향했다.


아내도 함께였다.

교육장에서, 식당에서, 산림실습장에서

서로의 삶을 이야기하고

산을 이야기하고

건강을 이야기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따뜻하고,

얼마나 용감해 보이던지.


노년의 용기란

크게 소리내는 것이 아니었다.

숨을 고르고 한 걸음 더 내딛는 것.

새로운 걸 배우고자 자리를 지키는 것.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었다.


산은 아내의 마음이었고, 내 두 번째 인생의 시작이었다


이번 교육을 받으며

내 마음속에서는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아내는 암을 앓고 있다.

그래서 함께 앉아 교육을 받는 이 시간이

내게는 더 소중하고 절실했다.


나는 산을 보며 깨달았다.

지금 내가 걷고 서 있는 이 산이

단순한 땅이 아니라

아내가 내게 건넨 삶의 길이라는 것을.


퇴직 후 텅 빈 시간이 찾아올까 봐,

방황할까 봐,

갑자기 늙어갈까 봐 걱정했던

아내의 마음이

그 산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래서 나무를 심을 때면

반드시 아내의 이름을 속으로 불렀다.

나무가 자라듯

아내의 몸도 천천히 회복되기를,

우리의 삶도 다시 단단해지기를 바랐다.


아내가 완쾌되면

다시 둘이서 산길을 걸을 것이다.

새로 심은 나무들을 돌아보며

“여보, 우리가 이 나무들을 키웠네”

그렇게 말할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산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희망도, 치유도, 성공도 아니라

다음 계절을 기다릴 이유라고

나는 믿는다.


노년에도 배울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의 젊음이다


60대 산주들과 함께한 이번 교육은

나에게 또 하나의 큰 깨달음을 주었다.


노년이란

늙음의 시간이 아니라

다시 배우는 사람들의 시간이라는 것.


몸은 느려지고

관절은 조금씩 고장 나도

마음이 배우는 일을 멈추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젊다.


아니,

이제야 비로소

‘내가 원하는 속도’로 살아갈 수 있기에

더 젊어졌다.


산이 내 삶에 알려준 것들


이제 나는 확신한다.

산은 나를 고요하게 만들었고,

나를 다시 배우게 했고,

나를 더 좋은 남편으로,

더 건강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와 함께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마음을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이렇게 믿는다.


산은 아내가 내게 사준 땅이 아니라

내가 살아갈 남은 인생의 방향이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노년의 용기를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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